노들장애인야학의 김명학 교장(이하 호칭은 ‘명학’)은 꼭 인터뷰를 해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노들바람』의 제안이 아니었어도 언젠가 이야기를 길게 나누고 싶었다. 명학은 노들야학을 노들야학의 나이만큼 다닌 사람이다. 노들야학은 올해로 개교 30주년을 맞았고 명학도 30년째 이 학교에 재학 중이다. 물론 노들야학의 30년은 이곳을 거쳐 간 수많은 사람의 30년이다. 개인들이 겪은 시간을 모두 합한다면 족히 천 년은 될 것이다. 한 개인이 필적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그러나 명학은 여느 사람들과 다르다. 노들야학 30년이 모두 명학에
1. 노들장애인야학 10년간의 변화노들장애인야학은 지난 30년의 시간 동안 아주 많은 변화를 겪어 왔다. 야학은 장애인의 교육 공간이자 투쟁의 공간이기도 했고, 최근에 노동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또한 야학은 장애인의 권리 투쟁에 앞장선 만큼, 그 변화의 파장은 야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2013년 이후 야학에 큰 변화를 준 최근 10년간의 주요 활동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지난 10년간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있었던 큰 변화를 정리하면, 첫 번째는 학교의 명칭을 ‘야간학교’에서 ‘야(野)학’으로 바꾼 것이다. 이는 두 가지 의미가
제가 활동하는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아래 행성인)의 주요 활동원칙은 실천과 연대입니다. 이 가치들, 특히 연대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단체가 노들장애인야학입니다. 제가 활동을 시작하기 전부터 행성인은 노들야학과 긴밀하게 관계를 맺고 있었어요. 2019년에 육우당 추모문화제를 준비할 때였습니다. 활동을 시작한 이후 추모제 준비는 처음이었는데요. 회의에서 누군가 노들에 연락을 해봐야겠다고 하는 겁니다. 저는 어리둥절했어요. 공동주최를 어느 단위와 해보자는 것도 아니고 너무 자연스럽게 노들이란 단체 이름이 나왔으니까요. 그렇게
사람의 삶도, 투쟁도, 노동도 음악처럼 다양하다. 때로는 웅장한 오페라처럼, 때로는 말하는 듯 노래하는 듯한 랩처럼, 때로는 신나게 몸을 들썩이게 하는 댄스음악처럼 말이다. 소리를 내는 사람과 악기와 발성과 음색에 따라 다르다. 노들야학은 나에게 여러 장르의 음악 같았다.포크송 같던 첫 만남. 노들야학을 처음 찾아간 해는 2008년이다. 야학이라고 들었는데 건물 밖에 있었다. 야학이지만 공간은 없는 야학. 대학로에 천막을 치고 야학 공간 마련을 위해 농성 겸 교실을 운영한다고 말했다. 천막 야학이라니! 기가 막히게 멋진 발상이라고
2003년이었는지 2004년이었는지. 어쨌든 오래전 어느 봄날 한 친구가 시위 현장에서 연행됐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운동권이 보이면 멀리 돌아다니기 바빴던 저로서는 아직도 경찰이 실제로 사람들을 연행한다는 사실도 생경했고, 더욱더 시위에 나가면 안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친구가 연행당한 곳은 장애인 이동권을 요구하던 세종문화회관 앞 집회 현장. 장애인들의 집회라면 더욱더 신경 써서 돌아가야겠구나, 마음에 새겨놓았습니다.결심은 딱히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 정신을 차려보니 국가인권위원회를 점거하고 있던 장애인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마을버스가 한 대 지나갔다. 전에 내가 알던 마을버스의 모양과는 완전히 다른, 말로만 듣던 그 저상버스였다.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스타를 마주친 것처럼 나는 신나는 마음이 되었다. 내가 당신을 봤어요! 내가 당신을 본 걸 꼭 말해주고 싶은데 하필 너무 많은 얼굴이 떠올라버렸다. 얼굴들. 버스를 타자며 버스를 멈춰 세웠던 얼굴들. 저상버스를 도입하겠다는 약속이 기약 없는 공문구가 될 때마다 싸웠던 얼굴들.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사람들을 꼽아보려니 시간이 걸렸고, 잠깐의 감동이 지나가고 보니 마을버스 한 대에 감
서른 살을 맞이한 노들장애인야학이 만난 연대 단체의 사람들을 떠올리니 많은 얼굴이 동시에 스쳐 지나간다. 연대한다는 것은 뭘까? 우리는 왜 친구가 되려 할까. 투쟁하고 있는 치열한 노들장애인야학이 만난, 친구들과 함께 걸어간 길을 기억하려 한다.그녀들의 농성장에 켜켜이 쌓인 먼지와 정리되지 못한 물품만큼이나 우리의 고민은 언제나 치열했다. 투쟁하는 우리가, 투쟁하는 당신에게 찾아간 노들 씨의 맷집 역시도 지나간 시간만큼 단단한 굳은살이 잡혀간다. 낮과 밤 인간의 삶의 일상을 내어주는 투쟁과 농성.낮 동안 아스팔트의 열기를 내보내기에
2014년 노들에서 ‘급식’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밥을 먹기 시작한 역사적인 날 4월 1일, 당시 교장이던 박경석 고장은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2012년 활동지원 시간이 부족해 집에 혼자 있던 김주영 씨가 화마를 피하지 못해 사망하는 참사가 있었고, 장애인운동가들이 이에 항의하며 광화문 일대에서 노제를 진행한 것에 큰 벌금이 떨어졌었다. 박 고장은 김주영의 죽음에 대해 사회의 책임을 묻는 활동가들에게 벌금으로 재갈을 물리려는 처사에 저항하는 자진 노역 투쟁을 하고 있었다. 당시 모 기업 회장은 노역을 통해 하루에 5억 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