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성원 피해생존자 안종환. 어린 시절, 어머니 등에 업혀 부산역으로 간 종환은 갑자기 경찰에 붙잡혔다. 트럭을 타고 도착한 곳은 형제복지원. ‘한국판 아우슈비츠’라 불리던 수용시설이다.종환이 덕성원으로 옮겨지면서 모자는 생이별하게 됐다. 어머니의 형제복지원 입소 기록은 찾았지만 퇴소 기록은 찾지 못했다. 46세인 종환은 지금까지 어머니의 생사조차 알지 못한다.덕성원에서 갖은 구타와 학대를 겪고 퇴소했다. 퇴소해도 덕성원을 벗어날 순 없었다. 종환은 덕성원 원장의 아내에게 큰돈을 빌려주고 한 푼도 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덕성원이 너
“상지야, 아빠랑 같이 가자.” 엄마가 시장 가고 없을 때, 아빠가 그를 강원도에 있는 장애인거주시설로 데려갔다. 가족 몰래 그를 시설에 버린 것이다. 그는 성람재단 산하 문혜요양원에서 16살 때부터 30살이 되던 2007년 가을까지 살았다. 그는 언어장애가 있다. 시설 사람들은 그의 목소리를 “동물의 울부짖음”으로 취급하고, 그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이제 그는 AAC(보완대체의사소통)로 소통한다. AAC는 그가 글을 쓰면 음성으로 읽어 주는 기계다. AAC로 조상지가 목소리를 갖게 되자, 사람들은 이제 그에게 생각을 묻고 그의
영화숙 피해생존자 진순애. 순애는 영화숙 피해생존자 중 언론에 증언한 첫 번째 여성 피해생존자다.순애는 경주에 살던 평범한 시골 소녀였다. 영화숙에 갇히기 전까지는. 영화숙은 순애의 모든 기억을 앗아갔다. 생일이 언젠지, 몇 살인지, 성이 뭔지, 영화숙에 몇 년간 감금돼 있던 건지 기억나지 않는다. 뚜렷하게 기억하는 건 경주 집 주소 하나다. 낯선 남자들에게 납치돼 영화숙으로 끌려갔던 밤, 순애는 집 주소를 적어 냈다. 그러나 순애를 데리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영화숙에서는 훈련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계속됐다. 목숨을 걸고 탈출
문석영은 태어난 지 4개월 만인 1992년 11월, 서울시 강동구에 있는 암사재활원에 보내졌다. 형제 중 유일하게 그 혼자만 시설에 보내졌다. 장애가 있었기 때문이다. 문석영은 발달장애와 백색증으로 인한 시각장애를 갖고 있다. 문석영은 스물다섯이던 2017년 5월, 시설을 나와 자립생활을 시작했다. 나만의 방을 갖고 싶었고, 자유를 찾고 싶었다. 선생님이 정해준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그는 대규모시설에서 소규모시설(그룹홈)로 옮겨진 후, 장애인자립을 위해 마련된 임시주거지(자립생활주택)에서 살다가
덕성원 피해생존자 정영삼. 영삼은 자신이 1966년 4월 20일생이라고 알고 있지만 확실하진 않다. 태어날 때부터 ‘성애원’이라는 시설에 살았다. 부모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8살 때 덕성보육원으로 옮겨졌다. 부산에 있는 덕성보육원은 파리를 잡아 오지 않으면 밥을 주지 않는 곳이었다. 청소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아버지’라 불리던 김진기 원장이 아이들을 때렸다. 영삼은 오른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하도 맞아서 안 들리나 짐작한다.고등학교 졸업 후 덕성원의 젖소 목장에서 1년 반 동안 일했지만 영삼은 월급을 한 푼도 못 받았다.
탈시설, 수용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자립해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최근 발달장애인을 둘러싼 탈시설이 논란인데요, ‘탈시설하면 예산 많이 든다’ ‘수용시설도 주거 중 하나다’ ‘시설에 살 선택권을 줘야 한다’며 언론은 가짜 뉴스를 생산합니다.그러나 시설의 역사는 오래됐습니다. 우리 사회는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홈리스)뿐만 아니라, 과거에는 ‘부랑인’이라고 분류된 사람들을 시설에 수용했습니다.비마이너는 과거 부랑인시설에 수용됐던 사람, 최근 탈시설한 중증뇌병변장애인, 발달장애인까지, 시설수용생존자 다섯 분의 목소리를 보도합니다.이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