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으로 해오던 창작 습관에서 벗어나 아트링크 시간만큼은 새로운 방식의 작업을 해보려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작업을 고안하는 방식으로 몇 달째 ‘랜덤’이라는 개념을 여러 방법으로 응용해보고 있는데요. 오늘은 단어를 모아서 랜덤으로 조합을 해보는 작업을 해보았습니다. 랜덤 워딩 = 새로운 문장 만들기 작업에서는 각자 책을 한 권씩 훑으며 마음에 드는 단어를 카드에 적은 후, 랜덤으로 카드를 선택하여 문장을 만들었습니다. 각자의 관점에서 마음에 들었던 단어를 한데 모으고, 랜덤으로 조합해보면 그전엔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 지난 연재 기사 먼저 보기 (▶7살 나이에 전국을 떠돌던 아이, 그에게 국가는 없었다) 시계와 달력이 없는 곳그의 증언이 아동보호소 기록과 불일치하는 문제 말고도 의아스러운 점이 또 있었다. 그는 첫 인터뷰에서 선감학원에 66년도에 입소해서 4년간 생활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 그가 국가인권위에 제출했다는 탄원서에는 62년도에 입소해서 8년간 생활했다고 적혀 있다. 두 번의 증언 모두 그가 선감학원에 들어가기 직전에 있었다는 아동보호소 기록(69년 입소한 것으로 적혀 있다)과 차이가 많이 나기에 두 번째 인터뷰에서 이 점에
1984년에 태어나 91년에 처음 공교육의 우산 아래로 들어갔다. 공장에 다니는 가난한 부모 밑에서 컸지만, 끼니를 거른 적은 없이 살았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입시 스트레스에 치여 살던 와중에, TV에서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여중생을 추모하는 촛불집회를 보고 난 뒤 ‘대학 들어가면 저기부터 가야겠다’ 마음먹었다. 별 탈 없이 대학에 들어갔고, 원 없이 데모를 하러 다녔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때와 별 다르지 않은 ‘삐딱한’ 사상을 지닌 채로, ‘삐딱하게’ 살고 있다.이것은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의 생애를 소략한 것이다. 이 한
>> 지난 연재 기사 먼저 보기 : ▶빌어먹을 삶, 나머지 인간 인천 생활을 접고 형이 있는 안양으로 올라왔다. 안양에서 깡패 생활을 했다. 좀처럼 바닥 인생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길 위를 흐르다 미끄러져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빠졌다. 형님, 한 방 하고 땡칩시다. 거절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아는 동생 둘과 안양에서 자산가로 소문난 이의 집에 칼과 몽둥이를 들고 들어갔다. 금고에 있는 돈만 챙겨 나오려고 했다. 저 돈만 있으며 가게 하나 차려 번듯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생역전을 꿈꿨으나 방심하는 사이 그 남
성환아, 일어나.형이 깨웠다. 열차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열차에서 내리려고 보니 신발이 없어졌다.너 신발 어디 갔어?형이 어디선가 앵벌이 해서 모은 돈으로 사준 예쁜 새 신이었다. 서울역에서 내리자마자 신발을 찾으러 뛰었다.이 거지새끼들!잡혔다. 서울시립아동보호소 단속반이다. 신발 찾으러 같이 헤매던 친구와 함께 파출소로 끌려갔다. 친구를 두고 도망쳤지만 이내 곧 잡혔다. 그렇게 아동보호소에 또다시 갇혔다. 소문 듣고 찾아온 형은 나와 함께 갇히는 걸 택했다.서너 살 무렵, 부모는 헤어지며 어머니는 형을, 아버지는 나를 꿰찼다.
우리는 단순한 관계입니다. 시간을 정해 같이 그림을 그립니다. 우울한 날, 날아갈 듯 기뻤던 날, 바쁜 날, 설레는 날 나는 최유리 창작자와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낯선 공간이었던 최유리 창작자의 집이 이제는 쌓인 시간만큼 익숙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늘 편안하고 웃는 모습으로 나를 반겨주었습니다. 최유리 창작자는 열심히 배우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간단한 정물과 여자의 몸, 나무, 꽃 등의 풍경을 그리는 일을 합니다. 의도된 힘과 의도되지 않는 힘 사이에서 붓을 들고 모양과 색을 찾아갑니다. 붓질은 그녀의
>> 지난 연재기사 먼저 보기 (▶어떤 사람의 유년, 선감학원에서 삼청교육대까지) 형제복지원 폐쇄 원생들은 낮에는 자신을 가두는 감옥을 제 손으로 쌓았고, 밤에는 목숨을 걸고 그 감옥을 탈출했다. 선감학원에선 발이 푹푹 빠지는 갯벌 위를 달려 바다를 건너고, 형제원에선 화장실의 똥통을 밟고 탈출해 산을 넘었다. 김창호의 세계는 늘 그런 곳이었지만 그는 탈출할 마음 같은 건 먹지 않았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밤, 해방은 벼락같이 찾아왔다. 1986년 12월, 사냥을 갔던 한 검사가 우연히 울주군에 있던 형제원의 작업장
부산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김창호는 2017년 6월 국회에서 열린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의 증언대회에 참석했다가 선감학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선감학원이라면 김창호가 형제복지원에 들어가기 전에 4년 동안 있었던 곳이었다. 그리고 선감학원을 나오던 1980년 이후 한 번도 입 밖으로 말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김창호는 어렵게 입을 뗐다. “나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37년 만이었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이자 선감학원의 피해생존자인 그를 만나기 위해 합천으로 갔다. 터미널로 마중 나온 김창호는 키가 작
>>지난 연재기사 먼저 보기 (▶붙잡힘과 탈출의 반복 속에 살아온 소년) 섬에서 도망쳐 나온 소년은 걷고 또 걸어 도시로 나왔다. 거기서 기차에 몸을 싣고 또 무작정 걸어걸어 어머니가 있는 가평 집까지 찾아 갔다. 하지만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소년은 예전에 혼자 집을 나온 그날처럼, 다시 가평에서 서울 삼선교 작은 아버지댁까지 찾아가게 된다. 가족들은 그가 죽은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와는 한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어렵게 만난 어머니는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살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는 지독하게 반복되는 꿈속에 있는 듯했다. 깨어나려고 몸부림치지만 여전히 꿈속이고, 꿈에서 깨어난 줄 알았는데 여전히 꿈속인 상태. 꿈은 매번 목숨 걸고 탈출해야 살아남는 악몽이고, 꿈속에서 그는 누군가에게 이유도 모른 채 붙잡힌다. 고통을 버티다 때를 기다려 탈출하는데, 곧바로 다른 누군가에게 붙잡히고 만다. 다시 이를 악물고 탈출에 성공하지만, 그는 새로운 그물에 다시 걸리고 만다.올해 쉰아홉인 한일영 씨는 야간에 일을 한다. 지난해 어느 날, 근무를 하다 쉬는 시간에 이것저것 검색을 해보다 불현듯 ‘선감
>> 지난 연재 기사 먼저 보기 (▶내 이름은 오광석, 나는 누구입니까) “단 하루도 온전하게, 솔직하게 산 적이 없어요”선감학원을 나온 뒤 광석은 가족을 찾고자 했다. 선감학원 입소 전 그의 기억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남편을 피해 광석과 여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왔었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장사를 했고, 외할아버지는 천안에서 이발소를 했다. 그는 외갓집에 가려고 홀로 기차를 탔다가 길을 잃어 파출소에 잡혔다. 스무 살 넘어 어른이 된 광석은 기억을 더듬어 외할아버지 이발소가 있는 천안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작은아버지를 만났지만 외
그를 처음 만나고 한 달이 채 되지 않던 지난 6월 초, 그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다. 그는 자신의 과거 기록을 찾고 있다고 했다.“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서의 기록을 찾고 싶은데 그곳으로 가는 길 좀 알아봐 줄 수 있나요? 아무리 찾아도 인터넷에 안 나와서 연락드렸어요.”그는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서울시립아동보호소 가는 길이 나오지 않는다며 곤혹스러워했고, 이런 부탁으로 연락하고 싶지 않았는데 연락드리게 되었다며 무척 미안해했다.그는 얼마 전 초등학교에 가서 생활기록부를 받아왔다고 했다. 그 학교는 그가 선감학원에서 옮겨간 부천 ‘새소
>> 지난 연재 기사 먼저 보기 (▶고아에게 가해진 폭력의 기억...'죄수들에게도 그렇게는 안 할 거야') 도망의 대가, 감금마산포 앞에 보면 엇섬이라고 있어요. 우리는 빨간섬이라고 불렀어요. 작은 섬이에요. 그런데 거기도 부락민들이 살아요. 그 마을 사람들이 도망가는 아이들을 숨겨 줘요. 그러고 나서 그 집에서 머슴살이를 시켜요. 거기서도 엄청 때리죠. 만약 말 안 들으면 다시 선감학원에 보낸다고 그러고. 마을 사람들이 도망가는 아이들을 잡아다 선감학원에 보내주면 밀가루 한 포대씩 받았어요. 그 때 당시 밀가루 한포대가 얼마나 비
1. 강동연 창작자는 해리포터를 좋아한다. 해리포터를 그리는 것은 더욱 좋아한다. 그리고 햄버거를 더욱 좋아한다. 햄버거와 함께 먹는 프렌치프라이는 더욱 좋아한다. 2. 강동연 창작가는 말이 없다. 좋은 건 ‘좋아요’. 싫은 건 ‘몰라요’다. 해리포터와 해리포터 그리기. 햄버거 먹기와 프렌치프라이 먹기는 ‘좋아요’고 고양이, 지하철, 햄버거 단품은 ‘몰라요’다. 3. 처음에 장난으로 프렌치프라이와 케첩으로 그림을 그려줬는데 싫어했다. 무안해서 프렌치프라이를 쌓아서 탑처럼 만들어 줬더니 그건 좋아했다. 그 이후로 우리는 프렌치프라이를
이대준 씨는 선글라스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직업도 버스 기사. 선글라스를 끼고 운전대 앞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 버스에 꼭 한번 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완벽한 그림이다. 그는 체구도 가볍고 목소리도 경쾌했다. 그가 운전하는 버스에 꼭 한번 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지난 겨울, 선감역사박물관 개소식에서 그를 처음 보게 되었다. 이날 여러 사람들과 함께 걸으며 그는 한 명의 생존자로서 마이크를 잡고 자신이 이곳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아픔을 입말로 풀어냈다. 그의 말씨에는 슬픔의 흔적이 그리 엿보이
>> 지난 연재 기사 먼저 보기 (▶바다를 두 번 건너 죽음의 섬에서 탈출하다)영주에서 학원을 그만두고 올라와 경기도 고양시 원당에 조그마한 집을 샀었어요. 여자를 만나서 결혼생활을 한 2년 했나. 교회에서 일을 했어요. 차도 운전하고. 보통 ‘관리 집사’라고 하죠. 집 샀을 때 진 빚이 있었는데 그 돈을 교회에서 빌려서 메꿨어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목사님하고 부딪쳤어요. 쉬는 날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불만을 이야기했죠. “목사님, 우리도 쉬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안 된다는 거예요. 그때 목사님하고 틀어져서 일을 그만뒀어요. 그
소년의 부모는 빚을 지고 피신을 다녔다. 소년이 열세 살 되던 해인 1963년, 가족은 평택의 어느 개울가 옆에 다 허물어져가는 집을 짓고 살았다. 돈을 벌 재주가 없는 소년에게 집에서 구두 통을 하나 만들어주었다. 소년은 그것을 들고 나와 구두를 닦았다. 쉽지 않은 그 시간도 오래가지 못했다. 3일째 되던 날 경찰에게 붙들려 선감학원에 들어갔기 때문이다.내가 김성민 씨(가명)에게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요청한 것은 그로부터 54년이 흐른 2017년 2월이었다. 내 손엔 그가 경기도청에 찾아가 직접 쓴 ‘선감학원 피해자 신고서’가 들
>> 지난 연재 기사 먼저 보기 (▶하인천 바다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던 소년, 고기잡이배에 던져지다) 2016년 7월 27일 KBS 에서 방송한 ‘유골은 무엇을 말하는가, 선감학원의 진실’ 편에서는 8살 정도 된 어린 아이의 유골을 발굴했다. 선감도의 한 야산의 나무를 베어내고 더듬더듬 아이가 묻혔으리라 추정되는 지점을 찾아 흙을 걷어냈다. 그러자 조그마한 꽃신과 함께 뼛조각 몇 점이 드러났다.그 덕분에 1962년 서울 길음시장 인근에서 할머니 손을 놓쳐 길을 잃고 헤매다 선감학원에 들어오게 된 허일용 씨는, 함께 원생
12살 아이는 고기잡이배에 태워졌다고 했다. 그 말의 무게감을 첫 인터뷰 때는 별로 체감하지 못했다. 첫 인터뷰 이후 몇 달 뒤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여러 사람을 앞에 두고 해설사로 나섰다. 자신이 어찌하여 이 섬에 오게 되었는지, 이 섬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를, 자신이 이 섬에 도착했을 때 처음 마주한 선착장 터에 서서 담담하게 들려주었다.예순이 훌쩍 넘어 이제 칠순을 바라보는 사내는 그날이 정확히 몇 년도 몇 월 며칠이었는지, 계절이 언제였는지조차 이젠 기억이 아득해져서 그날의 풍경만 어렴풋하게 떠올릴 뿐이었다. 그러다 그
5.16도로 명칭 변경 운동이 외면하고 있는 것올해 초 제주도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시내에서 친구와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어딘가를 지나던 중 곳곳에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게 보였다. 5.16도로 명칭을 변경할 것을 요구하는 지역 시민단체의 플래카드였다. 5.16도로는 제주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도로인데, 일제강점기에 처음 개통되었고, 1961년 5.16군사쿠데타 이후 확장공사에 들어가 1969년 준공되었다. 그런데 이 도로명칭이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를 기념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어 오랫동안 제주도민들이 불편해 하던 차에, 박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