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사회 - 시설화된 장소, 저항하는 몸들』 , 장애여성공감 엮음
가족과 도시, 국경에서 친밀한 관계까지 촘촘한 시설의 장소들

언젠가부터 물리적 구조물이나 장치를 뜻하는 ‘시설’이 장애인이나 고아를 위한 특수 ‘거주시설’을 가리키게 되었다. ‘복지시설’의 줄임말로 흔히 쓰이는 ‘시설’은 가족과 함께 ‘집’에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거주공간을 지칭한다. 어릴 적부터 수십 년 동안 시설에서만 산 장애인 중에는 다른 ‘집’을 알지 못하기에 시설을 집이라 여기는 사람도 있고, 아직도 많은 시설에서는 종사자들을 ‘아빠’ ‘엄마’라 부르게 한다. 그러나 자유롭게 외출하고 외박할 수 없고, 기상시간, 식사시간, 취침시간, 그 외 활동 시간이 정해져 있고, 신경안정제로 정숙을 강요하는 곳을 ‘집’이라 부르기는 어렵다. 차라리 시설은 ‘감옥’에 가깝다. 그래서 장애인 단체가 탈시설 정책을 요구하면서 ‘시설은 감옥’이라고 한 것은 경험에서 우러난 표현이지 문학적인 비유가 아니다.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서울장차연)는 2019년 4월, 서울시에 ‘2차 탈시설 계획’ 전면 수정을 요구하며 서울시청에서 20일간 농성을 했다. 사진은 ‘감옥 같은 시설’에 있다가 죽어서 나오는 퍼포먼스를 하는 서울장차연 소속 활동가들. 왼쪽에 수용시설을 의미하는 쇠창살에 장애인이 갇혀 있고, 오른쪽에는 모조관이 있다. 사진 박승원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서울장차연)는 2019년 4월, 서울시에 ‘2차 탈시설 계획’ 전면 수정을 요구하며 서울시청에서 20일간 농성을 했다. 사진은 ‘감옥 같은 시설’에 있다가 죽어서 나오는 퍼포먼스를 하는 서울장차연 소속 활동가들. 왼쪽에 수용시설을 의미하는 쇠창살에 장애인이 갇혀 있고, 오른쪽에는 모조관이 있다. 사진 박승원

시설은 감옥이 아니다?

작년에 서울특별시장애인복지시설협회(아래 시설협회)가 “장애인거주시설을 감옥에 비유하는 퍼포먼스 등을 중단하여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면서, 재발 시에는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며 장애계에 항의 공문을 보낸 적이 있다. 시설협회 입장에서 볼 때 ‘복지시설’과 ‘형벌시설’(감옥)은 목적과 기능이 완전히 구별된 별개의 시설로, ‘시설은 감옥’이라는 표현은 일부 장애인의 주관적 경험을 지나치게 과장한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 그럴까? ‘시설은 감옥’이라는 표현은 비유에 불과한 걸까? 일본의 경우 2016년 교도소에 수감된 노인은 2,498명으로 대부분 절도 같은 경범죄로 들어왔다. 재범률도 계속 상승하여 수감자 중 30퍼센트가 재범자라고 한다. 삼시 세끼 꼬박 식사가 제공되고 동료들도 있어 덜 외로우며 최소한 ‘고독사’는 면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감옥을 거주시설로 선택한 노인들이다. 

‘감옥’이 복지 ‘시설’로 기능하는 현상은 미국에서 훨씬 뚜렷하고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미국에서는 여섯 명 중 한 명이 감금되어 있다고 할 정도로 사설 감옥과 구금소(detention centres)가 일상적으로 건설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특정 인종(특히, 흑인과 히스패닉)과 비시민(난민, 미등록 이주노동자, 선주민 등)에 대한 대규모 감금이 이뤄지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플리바게닝(Plea Bargin, 사전형량조정제도)을 통해 재판절차도 생략한 채 우범화된 빈민집단의 수용시설로 감옥이 활용될 때 감옥은 ‘처벌’과 ‘교정’보다는 비정상화된 인구집단을 사회로부터 분리 수용하여 거주케 하는 복지시설로 기능한다. 정부보조금과 수용자의 노동력 대여까지 더해진 미국의 감옥-산업 복합체는 사회안보와 결합된 복지산업의 새로운 모델로 제시된다.

‘시설은 감옥’이라는 표현을 단지 비유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책이 나왔다. 최근 장애여성공감의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 [숨]이 제안한 ‘IL과 젠더 포럼’에 참여한 활동가와 연구자들이 주로 쓰고, 비마이너에 “교차적 관점으로 시설화 비판하기”란 기획으로 연재한 글들이 주축이 된 『시설사회』가 출간됐다. ‘시설사회’란 제목이 강조하듯 시설 문제는 시설 담장 안이 아니라 시설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서 발생한다는 것이 이 책의 기본 논조다. 특정 집단을 범주화하여 시설에 분리 수용할 필요가 있다는 담론을 생산하는 권력의 작용을 지칭하기 위해 이 책은 ‘시설화’라는 단어를 쓴다. 시설이라는 물리적 구조물보다 그 구조물을 만드는 담론과 권력의 작용방식(시설화)에 시설의 본질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책 『시설사회』 표지 , 장애여성공감 엮음, 와온
책 『시설사회』 표지 , 장애여성공감 엮음, 와온

혼혈아·사생아는 장애아?

시설을 만드는 담론 중 대표적인 것이 ‘정상성’이라는 개념에 관한 담론, 즉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와 경계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는 담론이다. 시설은 그런 담론이 생산되는 물리적 장소로 기능한다. 가령, 미혼모 시설은 미혼모에 대한 인구학적 특징을 파악하고 미혼모 인구 집단에 대한 지식을 생산하는 장이다. “지능지수, 교육정도, 가정환경, 성장배경, 고용상태로부터 성 경험, 임신 횟수, 흡연 여부, 약물 사용 등에 이르기까지 미혼모들의 신체정보 및 사회 인구학적 행위 패턴 정보는 전문가의 언어로 가공되었다.” 그에 따라 미혼모는 정상가족을 이루기에는 부적합한 집단으로 규정되었고, 미혼모가 출산한 아이는 다른 정상가족에 입양하도록 요구받았다.  

여기에 순혈 민족주의까지 더해져 혼혈 사생아는 ‘단일민족’, ‘단일국가’에 기반한 제1공화국의 정통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내무부와 경찰국을 동원하여 혼혈아동의 수를 파악하고 해외입양 전문기관까지 만들어 공격적으로 혼혈아 해외입양을 추진했다. 그 결과 1961년 한국장애아동조사보고서는 장애의 12가지 종류에 혼혈아와 사생아를 포함시켰다. ‘장애’를 정의하는 본질을 의학적인 ‘손상’이 아니라 사회적인 ‘비정상’에서 찾았다는 증거다.

가족의 시설화와 쉼터

이 책은 시설화가 일어나는 장소로 가족, 도시, 국경을 지목한다. 먼저, 미혼모시설과 장애인시설이 보여주듯 “시설은 가족을 만들 수 없는, 만들어서도 안 되는, 가족에게조차 버림받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정상가족’으로부터의 추방이 시설화의 기제인 것이다. 미혼모시설 이용자의 입양률이 꾸준히 80~90%를 기록하며 시설 밖 혼외출생 아동의 입양률에 비해 현저히 높은 점은 미혼모시설을 둘러싼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작용을 시사한다. 또한 한부모 가족을 위한 정부의 지원이 독립된 주거에 독립된 가족으로 생활하도록 지원하는 것보다 ‘복지시설 입소 기간을 늘리고 시설 환경 개선에 집중된 된 점’ 역시 한부모 가족을 정상가족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의도와 효과를 보여준다.

가족이 시설화의 장소라는 것은 가족 자체가 시설의 성격을 띠기도 함을 의미한다. 2018년 「장애인 학대 현황보고서」를 보면 학대 가해자는 부모(12.9%)와 배우자(5.8%) 등 동거인을 비롯한 친인척이 33.4%에 이르며, 학대 발생 장소도 피해 장애인 거주지(35.5%)가 가장 많았다. 특히 장애여성은 시설로 추방되기보다 가정 안에서 착취되는 경향이 강하다. “장애여성이 가족 안에서 경험하는 상황을 생각하면 탈시설보다 탈가정이 어렵다고 이야기하게 될 때가 있다. 장애여성은 폭력을 당하거나 일상적으로 통제, 무시를 당하면서도 가족을 떠날 생각을 쉽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정이 시설보다 더 시설 같아서, 가족이 보호의 울타리가 아니라 폭력과 착취와 구속의 올가미 같아서 집을 나온 사람들이 있다. 그 탈가정 장애여성, 혹은 비장애 청소년을 위한 시설이 ‘쉼터’라 불리는 곳이다. 문제는 ‘쉼터’가 ‘복귀’를 위한 임시 보호소일 뿐 독립적인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주거’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쉼터 입소자에게 요구되는 부모 동의, 쉼터 내부의 통제와 규율은 쉼터 입소자를 비정상으로 보고 정상으로의 복귀를 강요한다.

도시의 시설화와 수용의 회로망

탈가정청소년 중 상당수는 거리에서 먹을 것과 잘 곳과 놀 곳을 구한다. 그들 거리 청소년에게 도시는 경계가 없는, 그래서 위험한 집이다. 성인 노숙인들과 함께 그들은 도시의 안전과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간주된다. 18세기 유럽의 대대적인 부랑인 단속과 구빈원 설립,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도시정화 사업과 갱생원 설립,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의 부랑인 단속과 형제복지원은 수용시설과 도시 질서가 불가분의 관계임을 보여준다.

오늘날 수용시설과 도시 질서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현대의 수용시설은 더 이상 도시 바깥 추방의 장소에 있지도 않고, 도시 안 격리된 공간을 차지하고 있지도 않다. 오늘날 시설은 “도시의 인프라와 사회체, 담론들, 몸들, 또 다른 시설들이 이동하며 교차하는 적극적인 결절점”으로 도시의 흐름에 연결돼 있다. 후기 자본주의 역학 속에서 시설은 도시의 자본과 노동력, 상품의 흐름 속에서 설립되고 운영된다. 시설이 국가정책과 결합한 ‘시설산업’으로 운영되는 현실에서 시설자본이 형성되고 증식되는 양상, 시설에 수용된 몸과 노동력의 가치가 형성되고 착취되는 담론과 경제를 면밀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인간노동력보다 기계노동력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후기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 시설은 쓸모없는 잉여인구로 전락한 존재들에 대한 도시의 생명통치 기관으로 기능하며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복지, 수감, 구금, 보호, 요양, 입원 등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수용의 회로망에 결부된 시설들 사이의 연결고리가 무엇이고 그 연결 지점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동하고 순환하는지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 ‘시설은 감옥이 아니다’ ‘감옥에 가야 할 사람을 법무정신병원에 보내는 게 말이 되나?’라며 명목과 이름에 사로잡혀 시설들 간의 교차성, 수용과 감금의 회로망을 보지 못하는 한국사회에서 이러한 ‘감금지리학적’ 시선은 신선한 충격을 준다.  

국경의 시설화와 비시민 보호소

심신상실(미약) 판정을 받은 범죄자를 감금하는 치료감호소는 감옥과 정신병원의 교차성을 물리적으로 보여준다. 사법적 시민권을 부정당한 정신장애인 범법자의 추방공간인 치료감호소는 시민권도 없이 국경을 넘은 미등록 이주민과 난민들의 수용소인 외국인보호소와 긴밀하게 교차된다. 시설화의 세 번째 장소는 시민권의 경계지대, 국경이다.

단일민족과 혼혈아, 사생아를 장애인으로 분류하고 서둘러 국경 바깥으로 추방(입양)하기 위한 미혼모시설은 ‘가족’의 경계선과 ‘국경’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만들어진 시설로 장애인의 시민권과 난민의 시민권이 연결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시민권이 없고 오직 ‘요보호’ 대상으로서만 취급된다는 점에서 발달장애인과 탈가정청소년은 연결되어 있다. 탈가정청소년의 자율과 주거권을 소중히 여기는 단체가 만든 ‘자립팸’을 스스로 ‘이상한 나라’라고 부르고 그 집에 들고 남을 ‘입국’과 ‘출국’이라 일컫는 것도 ‘국경’에서 시설화가 일어남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청도 대남병원 ⓒ뉴스민
청도 대남병원 ⓒ뉴스민
 

돌봄의 시설화와 탈시설의 윤리학

코로나19로 첫 번째 사망자가 발생하고 수용인 102명 중 101명이 감염되어 코호트 격리된 시설이 청도대남병원 정신과 폐쇄병동이다. 그곳은 말이 ‘병원’이지 정신장애인 ‘거주시설’이다. 침상도 없이, 장판 깔린 방바닥에서 한 방당 10명 내외의 정신장애인들이 폐쇄적인 일상을 수십 년 동안 영위하고 있었다. 정신병원에서 환자들을 통제하는 대표적인 수단은 약물이다. 그 점에서 정신병원과 요양병원은 공통성을 갖는다. 노인돌봄의 탈가정화로 인해 급증하는 시설이 요양병원이다. 최근 KBS 뉴스에 따르면 요양병원의 90퍼센트가 싸구려 향정신성 약물을 처방하고 있으며, 치매환자의 70%가 약물로 통제된 ‘약물구속’ 상태에 처해 있다. 치매도 없고 노인도 아니지만 요양병원에 가는 사람들로 HIV 감염인들이 있다. 동성애에 대한 도덕적 편견과 불합리한 감염공포 때문에 다수 요양병원이 HIV 감염인들의 입원을 거부하고 있다. HIV 감염인을 받아들인 소수의 요양병원은 이번에는 가족의 동의와 국가의 허락이 필요하다며 입원자의 퇴원 요구를 거부한다.
 
오늘날 시설화가 일어나는 주된 영역이 돌봄 영역이다. 돌봄의 시설화라는 점에서 장애인시설과 요양병원은 공통성을 가지며, 노인돌봄과 장애인돌봄은 서로 교차한다. 그러나 노인의 정체성과 장애인의 정체성을 상호 배제적 관계로 보는 제도는 만 65세가 되면 장애인활동지원을 받던 사람도 갑자기 장애인 정체성을 부정하고 (장애인 활동시간보다 훨씬 급여시간이 적은) 노인돌봄(장기요양) 제도에 편입되기를 요구한다. 돌봄의 교차성 속에서 장애인의 정체성과 아픈 몸(만성질환자)의 정체성 간의 경계도 유동적이다. 장애인과 아픈 몸의 교차성에 대한 섬세한 주의와 제도 개선이 요청된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장애와 젠더의 교차성에 초점을 맞춰 돌봄 관계의 친밀성에 숨어 있는 시설화의 계기를 섬세하게 탐사하는 시선에 있다. 부모, 애인, 친구, 활동지원사와의 관계에서 자기돌봄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미세한 선 긋기와 대상화하는 시선이 거대한 추방에 앞서 일어나는 시설화의 요소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곧 탈시설이 단지 물리적인 장소이동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탈시설은 생활장소의 이동과 함께 함께 이웃, 친구, 애인, 동료 등과의 인간관계를 일방적 돌봄관계에서 상호 주체적 돌봄관계로 이동시키는 윤리학적 실천을 요구한다. 관계의 독점과 일방성을 방지하기 위해 발달장애인의 주변인, 친구, 조력자 등이 참여하는 ‘서포트 서클’을 만드는 실험은 탈시설의 운동이 어디까지 나아가야 하며, 어떤 것까지 바꿔야 하는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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