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8일 297일 차 혜화역 선전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활동가들은 2021년 12월 6일부터 혜화역 승강장 5-4(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방면)에서 장애인권리예산·입법 쟁취를 위한 선전전을 하고 있습니다. 전장연은 지난해 47차례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진행하고, 141일 동안(3월 30일~12월 1일) 177명의 장애인·비장애인 활동가들이 삭발 투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올해 장애인권리예산은 정부 예산안에 반영된 자연증가분을 제외하면, 국회에서는 고작 1.1%만 증액됐습니다. 기획재정부가 예산 증액에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전장연은 올해 1월 2일, 48차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하려고 했으나 서울교통공사·서울시의 ‘무정차’ 대응으로 지하철에 탑승하지 못했습니다. 장애인 권리를 무정차하는 정부를 규탄하며 전장연은 매일 아침 8시, 혜화역 승강장에서 시민들에게 권리예산과 입법을 알리는 선전전을 합니다. 비마이너는 꾸준한 매일의 투쟁을 꾸준하게 기록하고자 합니다. 같으면서도 다른 어제와 오늘을 사진과 글로 전합니다.
오늘(8일)은 꽤 축축하고 흐릿하다. 봄은 산뜻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축축함과 흐릿함을 함께 가지고 있다. 얼었던 것들이 녹는 과정은 생각보다 예쁘지만은 않다. 언제나 좋지만은 않다. 매일 승강장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항상 좋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꾸준히 그곳에 있다.
8시 10분, 승강장에 늦게 도착한 탓에 발언을 놓쳐버렸다. “여성의 날을 축하합니다~ 우와~” 맞다. 오늘은 3·8 세계 여성의 날이다. 한국여성의전화(아래 한여전) 활동가들이 발언을 마치고 들어온다.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가 박예림 한여전 활동가를 붙잡는다. 오늘의 현수막이 되어달라고, 이제부터 사회자라고 한다. 갑작스러운 제안이지만 흔쾌히 함께한다. 승강장을 둘러보니 사람들의 곳곳에 연보라 장미가 함께하고 있다. 머리에, 휠체어에, 손에, 피켓 옆에.
8시 13분, 이예진 노들장애인야학(아래 노들야학) 활동가가 책 『시설사회』를 낭독한다. 낭독을 시작하려는데 지하철 문이 열리고 갈색 점퍼 승객이 지나가며 씩씩 소리를 낸다. “누가 왜 시설에 수용되었으며 이것이 식민 지배의 독재 정권 경제 성장 패러다임과 어떤 연관이 있었는지 역사 쓰기가 가능해야 이에 대한 역사적…”
8시 17분, 갑자기 마이크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다. 박예림이 말한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우리는 맨날 생방송이라서 엔지(NG)가 많이 나요.” 활동가들이 분주히 움직인다. “뭐가 나갔다고?” 박경석이 묻자 “앰프가 나갔어~” 정다운 전장연 정책실장이 답한다. 이예진은 마이크 없는 낭독을 이어간다.
8시 22분, 박경석이 박예림에게 묻는다. “뒤에 열심히 (스티커) 붙이는 분들이 계시네요. 뭔지 아세요, 사회자님?” 박예림이 스티커에 적힌 문구를 읽는다. 박경석과 박예림의 대화가 이어진다. “저게 어떻게 보여요? 좀비처럼 보여요?” “그렇게 보이기도 합니다만…” “좀비처럼 보인대~”
박예림이 설명을 덧붙인다. “좀비라는 게 계속 이런 의제가 필요하기 때문에 남아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경석은 좋은 해석에 고맙다고 한다. ‘혜화역’이라고 쓰인 벽에 활동가들은 계속 스티커를 붙인다. 스티커를 보니, 사연 없는 좀비는 없어 보인다.
8시 28분, 새로운 앰프가 등장한다. “오셨어요? 마이크 님 오셨습니다. 반갑습니다.” 박경석은 구호를 멈추고 마이크와 앰프에게 극진한 환영의 인사를 한다. 새로운 앰프는 도착하자마자 소리를 뱉어낸다. “동정은 집어쳐!” 앰프는 불안정하다. 언제 하울링이 생길지 모르는 불안감이 구호와 함께 흘러나온다. “삑-” “이윤보다 생명을!” “삐익-” 모두 이 소리가 더 커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 같다.
“의료연대 왔죠~ 생명보다 이윤을 맞죠?” 박경석이 묻는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서울지역지부 서울대병원분회(아래 의료연대) 활동가들은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박경석이 “안 속네”라며 웃으며 말한다. 지하철 들어오는 경쾌한 음악이 나온다. 사당행 열차다. 앰프는 힘을 내본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 한 남성이 내려서 핸드폰으로 선전전 모습을 찍고 다시 탑승한다.
8시 31분, 의료연대 활동가가 앰프가 있는 곳으로 초대받아 나온다. 박경석은 앰프를 무릎 위에 올려두고 달래본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에서 연대하기 위해 나왔고요. 저희도 지금 윤석열 정부의 의료 민영화 시도와 또 노동 개악에 맞서서 계속 싸워나가고 있는데요. (...) 권리는 직접 쟁취하는 것이고, 이렇게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매일 아침 싸우시는 전장연 대표님에게 굉장한 존경심을 표하고 싶고…”
박경석이 손바닥을 펼쳐 앞에 모여 있는 사람을 향해 손짓한다. 아마도 여기 모인, 하루하루를 채워나가는 모두가 존경스러운 존재임을 말하는 손짓 같다. “항상 응원하는 마음 가지고 지하철에 타고 내리고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의료연대 활동가가 발언을 마친다.
8시 33분, 어제(7일)도 함께 했던 프랑스에서 온 박채달 씨가 앞으로 초대됐다. 박채달이 발언하려 하자 앰프가 “삐익-”하고 커다란 소리를 낸다. 사람들이 잠시 괴로운 표정을 짓는다. 박채달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 활동가들은 분주히 유선마이크로 바꾼다.
박채달이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는’ 사람으로 본인을 소개한다. 박경석이 노들야학에도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선전전을 마치고 노들야학 사람들과 커피 한잔하며, 문화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더 나눠보자고 한다. “(어제 선전전) 다녀온 다음에 쓴 시를 낭독해도 될까요?” 박채달 씨가 시를 낭독한다.
어제의 오늘을 살 수는 없다
어제의 어제에 잠들 수는 없다
어제의 내일에 일어날 수는 없다
오늘의 오늘
오늘의 내일
내일의 오늘
내일의 내일
오늘을 사는 사람의 얼굴에는
내일이 있다
웃고 있다
어떻게 인지는 모르겠지만
Il y a ce qui est si difficile à prononcer: espoir
발음 하기 힘든 뭔가가 있다
희망
걷는다
‘Il y a ce qui est si difficile à prononcer: espoir’는 ‘발음하기 어려운 게 있다: 희망’이라는 뜻이다. 8시 40분, 시 낭독을 마치자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지른다. 박경석이 말한다. “참 고맙습니다. 이런 선물을 주셔서.”
소감을 나눠달라는 요청에 정다운이 “그냥 느껴요~”라고 한다. 박경석이 정다운을 앞으로 부른다. 정다운이 “어젯밤 저와 같은 걸 느끼셨구나. 어제 제 마음을 아시나요?”라고 묻는다. 박경석이 답한다. “잘 압니다. 어제 술 먹고 있던 거 잘 알아요.”
박경석이 박채달에게 묻는다. “지하철 행동을 보기 위해서, 이것을 목적으로 해서 멀리 프랑스에서 비행기 타고 왔죠?” 박채달이 말한다. “비행기를 타고 왔어요.” 옆에 있던 양유진 비마이너 운영실장이 “배를 타고 오진 않았을 거야”라고 말을 보탠다. 박경석은 “옛날에는 표류하며 (외국인들이) 한국 땅에 닿고 이랬던 적이 있어요”라고 말한다. 이야기의 전개가 갑작스럽지만, 흥미롭다.
박경석이 말한다. “주류에서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명확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을 짓밟고 그러죠. 사람을 차별하는 것들을 정당화하는 이런 구조적인 문제. 경쟁하고, 능력이 없으면 배제해버리는 것. 이 배를 우리는 탈출해서 표류하며 이렇게 왔고, 이것이 세상을 확장하는 거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박경석은 끝말잇기 하듯, ‘프랑스’, ‘비행기’, ‘표류’로 말을 이어간다. ‘세상의 확장’으로 이야기는 종결된다.
8시 47분, 박경석은 김유미 노들야학 교사에게 사무국장이 된 소감이 어떠냐고 묻는다. 김유미는 피켓을 목에 걸고, 웃음을 머금은 채 나온다. 여러 가지 의미가 섞인 웃음 같다. 자리 잡고 발언하려고 하자, 승강장에 지하철이 도착한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마치 뮤지컬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혜화역 오일장 같기도 하다.
김유미가 말한다. “소감을 왜 여기서 말해야 하는지…”라고 시작하지만, 곧바로 노들야학을 소개한다. “노들야학은 표류하고 있는 공간인 것 같아요. 중증장애인 학생분들이 많으신데, 성인이 되고 나서도 지역사회 안에서 환영받는 공간이나 아니면 사회적인 역할, 이런 것들을 갖지 못하고 계속해서 표류하시다가 노들야학에 머무시는 분들이 많으세요. 그래서 노들야학은 이분들이 지역사회 어디에서나 잘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교육과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표류하는 학교 같습니다.”
‘소개’ 말고 ‘소감’을 다시 요청받는다. “소감… 소감이… 그냥 저도 잘 같이 떠다니면서 필요한 곳에 닿을 수 있도록 활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짧은 소감을 마치니 노들야학 30주년 준비사항을 공유해 달라는 다음 요청을 받는다. 김유미는 노들야학 30주년과 관련된 이야기를 굴비 엮듯 이어 나간다. 이야기가 마무리될 때까지 피켓을 들고 ‘인간 현수막’이 되어준 이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킨다.
8시 53분, 공지사항을 나눈다. 내일(9일)은 혜화역이 아닌 삼각지역에서 선전전을 하게 된다. 윤석열 정부의 6차 장애인정책종합계획에 대한 입장 발표를 삼각지역에서 할 예정이다.
9시, 한여전 활동가가 장미꽃 한 송이를 건넨다. 시들지 않는 연보라색 꽃에는 “여성의 존엄을 뜻하는 장미를 전합니다”라고 적힌 쪽지가 붙어있다. 축축하지만 보송한 아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