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복수혜 이유로 장애인복지법 15조, 정신장애인 배제
“정신건강복지법, 예산 없는 껍데기 규정뿐 복지지원 안 돼”
정신장애인들, 인권위에 차별 진정하며 “장복법 15조 폐지” 촉구

ㄱ 씨는 ‘장애의 정도가 심하다’고 판정받은 정신장애인이다. 환시·환청 증상으로 정신병원 입·퇴원을 반복하며 지냈다. 그 과정에서 가족관계도 사실상 단절됐다. 취업을 못 한 것은 물론 학업도 이어나가지 못했다. 대중교통 이용, 집안일 등 일상생활을 영위하기도 거의 어렵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ㄱ 씨는 활동지원서비스가 필요했다. 세 차례에 걸쳐 관할 지자체에 활동지원급여를 신청했지만 수급자격이 인정되지 않아 전부 ‘대상제외’ 통지를 받았다. 좌절감을 느낀 ㄱ 씨는 국민신문고에 ‘활동지원제도에서 정신장애인을 배제하지 말아달라’는 청원 글을 올렸다. 돌아온 답변은 ‘종합조사표에 정신장애인을 위한 평가항목이 존재한다’는 답변뿐이었다.

이에 ㄱ 씨와 다른 정신장애인들, 11개 시민사회단체 및 공익변호사단체는 4일 오전 11시, 서울시 중구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진정내용은 ‘장애인복지법 15조가 정신장애인을 차별한다’는 것이다.

시민사회단체 활동가와 공익변호사가 인권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현수막에는 ‘정신장애인 복지서비스 차별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기자회견’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하민지
시민사회단체 활동가와 공익변호사가 인권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현수막에는 ‘정신장애인 복지서비스 차별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기자회견’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하민지

- ‘장애인복지법 15조’가 문제인 이유

현행 장애인복지법 15조는 장애인 복지체계에서 정신장애인을 배제하는 주범으로 꼽힌다. 15조에 따르면 정신건강증진 및 정신질환자 복지서비스 지원에 관한 법률(아래 정신건강복지법)을 적용받는 장애인은 장애인복지법의 적용이 제한된다.

즉, 이 법으로 인해 정신장애인은 장애인복지법에 있는 장애인 복지시설, 직업훈련시설 등을 이용할 수 없다. 정제형 재단법인 동천 변호사는 4일 비마이너와의 통화에서 “장애인복지법 15조 때문에 정신장애인은 장애인 복지체계에 진입 자체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15조가 생긴 이유는 ‘중복수혜’ 때문이다. 정신건강복지법이 시행되고 있으니, 정신장애인은 그 법을 통해 여러 복지서비스를 지원받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건강복지법도 정신장애인을 지원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게 공익변호사들의 설명이다.

정제형 변호사는 “정신건강복지법은 정신장애인의 ‘치료’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데다 극히 일부 복지서비스에 관한 내용만 규정하고 있다. 정신장애인 복지를 위한 예산편성이나 인력배치 등의 내용은 부족한 실정이다”라고 지적했다.

정 변호사는 또 “정신장애도 장애인복지법상 15개 장애유형 중 하나다. 그러면 장애인복지법을 적용해야 마땅하다. 설령 다른 법에서 정신장애인에게 별도의 지원을 한다 하더라도 장애인복지법과 동등한 수준의 복지서비스를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미연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또한 정신건강복지법이 정신장애인을 지원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 변호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정신건강복지법 4장에 복지서비스 제공에 관한 내용이 있다. 하지만 예산이 반영되지 않은 껍데기 규정이다. 정신장애인은 장애인복지법에 의해서도, 정신건강복지법에 의해서도 복지지원을 받지 못해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고 규탄했다.

정제형 변호사가 마이크를 잡고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정제형 변호사가 마이크를 잡고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 정신장애인 배제하는 활동지원서비스

정신장애인이 놓인 복지 사각지대 중 대표적으로는 ㄱ 씨가 겪은 활동지원급여 탈락 문제가 있다. 활동지원급여 선정기준이 되는 ‘서비스 지원 종합조사표’의 조사항목을 보면 36개 항목 중 정신장애에 관한 항목은 단 8개뿐이다. 이번 진정을 대리한 공익변호사들은 “종합조사표가 애초에 신체장애인을 상정해 설계돼 있어서 정신장애인은 높은 점수를 받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정신장애인을 고려하지 않고 설계된 종합조사표 때문에 정신장애인은 활동지원급여를 신청해도 탈락하는 일을 부지기수로 겪는다. 2018년을 기준으로 활동지원서비스를 이용하는 정신장애인은 전체 정신장애인 중 단 2.2%뿐이다. 이마저도 중복장애를 가진 경우가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실정은 일본과 대조된다. 일본은 한국과 유사한 방법으로 활동지원서비스를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2014년, 신체장애인과 정신장애인의 특성을 모두 고려한 ‘장애지원구분 인정조사표’를 개발해 시행 중이다. 조사항목도 신체장애와 정신장애 각 34문항으로 동일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한 활동가가 ‘입원과 약물만이 살 길인가? 우리도 인간답게 살자!’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하민지
한 활동가가 ‘입원과 약물만이 살 길인가? 우리도 인간답게 살자!’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하민지

- 정신재활시설 부족… 다시 정신병원에 갇힌다

정신장애인의 지역사회 자립을 지원하는 시설도 턱없이 부족하다. 

정신재활시설은 정신장애인이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후 지역사회 복귀와 자립생활을 지원받는 곳이다. 2018년 보건복지부 국립정신건강센터 자료에 따르면 전국 정신재활시설 수는 349개소다. 정신재활시설 이용 가능한 최대 인원은 약 4천여 명이다.

하지만 정신병원에 입원돼 있는 정신장애인은 약 6만 명, 정신요양시설에 수십 년간 수용돼 있는 정신장애인은 약 1만 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정신재활시설 수는 이들을 수용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장애인이 정신병원·정신요양시설에서 나오더라도 갈 곳이 없어서 다시 병원이나 요양시설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조미연 변호사는 이 같은 현실을 지적하며 “장애인복지관에는 정신장애인을 위한 프로그램이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연계할 수 있는 복지 프로그램은 사실상 정신재활시설이 최선이다. 그러나 그 수가 현저히 부족해, 정신재활시설 이용을 예약하더라도 최대 4개월 이상 대기해야 한다. 이용기간도 최대 5년으로 제한돼 원치 않게 퇴소해야 한다. 그러면 갈 곳이 없어서 다시 정신병원으로 간다”고 말했다.

조 변호사는 또 “장애인복지법 15조로 인해 정신장애인은 장애인 복지체계로부터 분리되고, 정신장애인 문제는 의료적 문제로만 치부되고 있다. 하지만 정신장애인의 낮은 삶의 질은 의료가 아니라 질 낮은 복지가 초래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돈현 활동가(왼쪽)와 신석철 센터장(오른쪽)이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이돈현 활동가(왼쪽)와 신석철 센터장(오른쪽)이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정신장애인을 지원해 온 활동가들의 성토도 이어졌다. 이돈현 송파정신장애동료지원센터 활동가는 “법에서 정신장애인을 차별하다니 어이없다. 정신장애인은 장애인이 아닌가? 국민이 아닌가? 국가가 나서서 정신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고 있다. 장애인복지법 15조는 더 이상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다”라고 말했다.

신석철 송파정신장애동료지원센터 센터장은 정신장애인이 병원과 요양시설에 갇혀 사는 삶을 지적하며 “언제까지 병원과 시설에 갇혀 살아야 하나. 지역사회에서 이웃과 어울려 살고 싶다. 장애인복지법 15조 때문에 정신장애인은 병원에서 감금된 삶을 살고 있다. 더 이상 법으로 정신장애인을 감금하지 말라”라고 말했다.

한 활동가가 ‘정신장애에 대한 제도적 고정관념을 중단하고 평등한 서비스를 보장하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하민지
한 활동가가 ‘정신장애에 대한 제도적 고정관념을 중단하고 평등한 서비스를 보장하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하민지

 

관련기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비마이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