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탈시설로드맵 발표 앞두고 발달장애 부모들 릴레이 발언
“제대로 된 탈시설정책만이 장애자녀 권리보장할 수 있다”
“탈시설 세상 만들어지기 전까지 죽을 수 없다”

“제 자녀는 중증 지적·뇌병변장애를 가진 성인입니다. 제가 없으면 밥도 못 먹고 기저귀도 못 갈아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합니다.

아래로 비장애인 동생이 하나 있는데, 어릴 때 제게 말하더라고요. ‘엄마가 언젠가 죽게 되면 내가 누나랑 같이 살아야 하는데, 나는 누나 밥도 잘 못 먹이고 기저귀도 갈 수 없을 거야. 누나랑 어떻게 살아야 해?’

저는 ‘그래서 엄마가 삭발하고 투쟁하는 거야. 누나가 동네에서도 혼자 잘 살 수 있게 하려고. 그렇게 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라고 말했습니다.

그 시각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좋은 정책이 발표될 수 있을지 조금 무섭습니다. 제 자녀가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으려면 24시간의 지원, 국가 차원의 인프라 등이 필요합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어떤 부모님들은 시설 없애고 다 죽으라는 거냐고 말합니다. 탈시설과 자립생활을 지원할 수 있는 지역사회 인프라가 없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저는 아마 자녀보다 먼저 죽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제 목숨이 다할 때 자녀를 두고 두 눈 편하게 감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걱정을 덜 할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지는 걸 보고 눈 감고 싶습니다.” (정순경 부모연대 서울지부 부대표)

정순경 부모연대 서울지부 부대표가 릴레이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정 부대표는 ‘나 정순경은 탈시설 권리를 인정하고 법으로 명시할 것을 요구한다’라고 적힌 피켓을 목에 걸었다. 사진 하민지
정순경 부모연대 서울지부 부대표가 릴레이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정 부대표는 ‘나 정순경은 탈시설 권리를 인정하고 법으로 명시할 것을 요구한다’라고 적힌 피켓을 목에 걸었다. 사진 하민지

체감온도 33도였던 2일 오전 11시,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이 여의도 이룸센터 앞 컨테이너 농성장으로 모였다. 정부의 탈시설로드맵 발표를 약 5시간 앞두고 있었다.

탈시설로드맵 발표는 문재인 정부 국정과제 중 하나다. 문재인 대통령 임기 직후 탈시설 민관협의체가 구성됐지만 탈시설로드맵 발표는 지지부진했다. 문재인 정부는 임기를 1년 앞둔 지난 3월, ‘8월에 탈시설로드맵을 수립하겠다’고 발표했다.

탈시설로드맵 발표가 다가오자 발달장애인 부모들이 서로 다른 내용의 집회를 열기 시작했다. 전국장애인거주시설이용자부모회는 지난달 27일, 세종시 보건복지부 청사 앞에서 상복을 입고 시위했다. 시설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발달장애인에게 탈시설과 시설폐쇄는 살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컨테이너 농성장 앞으로 온 부모들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이들은 “탈시설이 사형선고라고 하는데 맞는 말이다. 지금 이 상태로선 그렇다”며 “그렇기에 더욱 강력한 탈시설·자립생활 정책이 필요하다. 내가 죽고 중년, 노년이 된 내 자녀가 잘 살 수 있어야 한다. 거주시설 내 벽만 보고 살게 할 순 없다”며 정부가 제대로 된 탈시설로드맵을 수립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옥상투쟁 모습. 2층 컨테이너 위에 부모연대 활동가들이 올라가 있다. ‘김부겸 국무총리는 탈시설을 권리로 인정하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현수막에는 ‘발달장애인 하루 최대 24시간 지원체계 구축하라’, ‘아버지를 아버지로, 탈시설을 탈시설로 부르지 못하는 장애인들의 분노와 설움의 목소리’라고 적혀 있다. 사진 하민지
옥상투쟁 모습. 2층 컨테이너 위에 부모연대 활동가들이 올라가 있다. ‘김부겸 국무총리는 탈시설을 권리로 인정하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현수막에는 ‘발달장애인 하루 최대 24시간 지원체계 구축하라’, ‘아버지를 아버지로, 탈시설을 탈시설로 부르지 못하는 장애인들의 분노와 설움의 목소리’라고 적혀 있다. 사진 하민지

- “자녀에게 탈시설 세상 만들어줄 때까지 죽을 수 없다”

탈시설정책에 찬성하는 부모들도, 반대하는 부모들도 공통으로 발달장애인 자녀를 가족이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현실에 문제를 제기한다.

탈시설로드맵 발표를 앞두고 릴레이 발언을 이어간 전국장애인부모연대(아래 부모연대) 활동가이자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은 제대로 된 탈시설 정책만이 가족의 돌봄부담을 덜고 장애자녀의 권리를 보장하는 길이라고 외쳤다.

윤종술 부모연대 회장이 컨테이너 아래를 내려다 보며 발언하고 있다. 컨테이너 아래에선 활동가들이 윤 회장의 발언을 경청하고 있고 사진기자들이 촬영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윤종술 부모연대 회장이 컨테이너 아래를 내려다 보며 발언하고 있다. 컨테이너 아래에선 활동가들이 윤 회장의 발언을 경청하고 있고 사진기자들이 촬영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장애인정책조정위원회에 참여해 탈시설로드맵을 먼저 받아보게 될 윤종술 부모연대 회장이 첫번째로 컨테이너 옥상에 올랐다. 윤 회장은 “현재로선 시설 밖은 죽음이다. 하지만 시설은 감옥이다. 제대로 된 탈시설 정책을 세우면 우리 자녀가 감옥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국민과 함께 살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가 탈시설로드맵을 꼼꼼히 만들어야 한다.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을 국가가 책임지는 로드맵이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김종옥 부모연대 이사가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김종옥 부모연대 이사가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김종옥 부모연대 이사는 탈시설 세상이 올 때까지 죽을 수 없다고 말했다. 김 이사는 “잠을 자다가도 문득 일어나 앉아서 ‘내 자녀가 나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걱정하며 새벽을 보낸 날이 많았다. 그러면서 결심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씩씩한 엄마가 돼서 내 자녀를 위해 탈시설 세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김 이사는 “시설에서 발달장애인이 괴롭힘을 당했다거나, 맞았다거나,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자녀에게 아직도 탈시설 세상을 만들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잠을 잘 수 없다. 국가는 발달장애인을 지원할 책임을 시설에 넘기고선 ‘시설만이 내 자녀의 살길’이라 생각하는 부모들을 조종하며 책임을 방기한다”며 시설 내 폭력과 정부의 무책임함을 규탄했다.

또한 김 이사는 “내 자녀가 시설 속에 멍하니 앉아 벽만 보고 시간을 보내다 삶을 마무리하는 걸 보고 싶지 않다. 자녀는 28년을 살면서 너무 많은 걸 포기하고 살았다. 세상이 포기하게 만들었다. 중년 이후의 삶을 또다시 포기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이 세상에 시설이 없어지는 그 날까지 투쟁할 것이다. 그 전엔 죽을 수 없다”고 말했다.

남인순 의원이 옥상 위에서 투쟁 중인 활동가들을 올려다 보며 인사를 건네고 있다. 사진 하민지
남인순 의원이 옥상 위에서 투쟁 중인 활동가들을 올려다 보며 인사를 건네고 있다. 사진 하민지

연대발언에 나선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으로서 탈시설운동에 깊이 공감한다. 작년 탈시설지원법이 발의됐고 국회의원으로서 이 법안을 통과시킬 책임자이기도 하다.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여러분이 더운 여름에 농성할 수밖에 없게 해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남 의원은 “정부에 여러분의 목소리가 전달될 수 있도록 하겠다. 탈시설지원법이 제정되게 하고 주거서비스 등 다양한 지원이 통합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약속했다.

탈시설로드맵은 2일 김부겸 국무총리 주재로 열리는 장애인정책조정위원회에서 발표될 예정이다. 지난달 29일부터 닷새간 진행된 컨테이너 농성장 옥상투쟁은 부모연대 릴레이 발언으로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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