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결산 ②] 일본 쓰구이야마유리엔 참사와 한국 장애인 자녀 존속살해
장애인이 살해당했다. 이유는 명백했다. '장애인이기 때문'이었다. 2016년 7월 26일 새벽 2시 30분경, 일본 가나가와 현 사가미하라 시의 장애인 시설 '쓰구이야마유리엔'에 난입한 우에마쓰 사토시(植松聖)는 준비해간 식칼로 40분간 39명을 찔렀다. 1분에 한 명꼴로, 망설임 없이 그는 장애인의 목에 칼을 꽂았다. 그 결과, 총 19명이 사망했고 26명이 부상을 당했다. 현대 일본 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사망한 사건이었다.
사토시는 자신의 행위에 후회하지 않으며, 자신은 중증장애인을 '구원했다'는 취지의 진술을 했다고 알려졌다. 또한, 그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노렸다. 그의 범행은 오래전부터 구상한 것이었고, 계획을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지인에게 "장애인은 차라리 죽는 편이 가족에게도 편하고 좋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도쿄 중의원에게는 "일본을 위해 장애인 470명을 말살하겠다. 나의 목표는 중증장애인이 안락사할 수 있는 세계"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는 이 시설에서 3년간 근무했던 직원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시설에 갇혀 살아가는 중증장애인들의 삶을, 인간의 존엄성 없이 살아가는 그 삶을 목도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삶은 "끝나는 게 더 나은"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중증장애인이 계속해서 살아있는 것은 장애인 자신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 나아가 일본에도 '불행'만을 안겨준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범행 직후 자신의 SNS에 "beautiful Japan! (아름다운 일본!)"이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중증장애인의 소멸이 일본을 아름답게 만든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사건을 분석하면서 그 원인을 가해자의 ‘정신이상’에 돌렸다. 그의 정신질환으로 인한 입원 경력이나, 대마초 등 마약류를 사용하여 환각을 봤다는 등의 보도가 쏟아졌다. 또한, 사토시가 올해 2월 조치 입원(한국의 '행정입원'과 유사한 제도로, 2명 이상의 정신 보건 지정 의사가 환자가 ‘자해·기타 피해의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는 경우 행정기관에서 강제로 입원시키는 제도)되었으나 곧 퇴원조치 되었다며 당국의 안이한 대처가 이번 참극을 불러왔다는 비판도 나왔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번 살상사건의 공범은 바로 '사회'라고 지적했다. 죠슈신문은 “이번 사건을 단순히 ‘대마초에 빠진 정신질환자가 일으킨 사건’으로 보고 끝낼 수 없다. 끝없이 약자를 배척하고, 개인의 책임과 노력만을 강요하는 사회구조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즉, 장애인이나 노인 또는 빈민을 짐짝으로 치부해버리는 지배적 사상에 기인”한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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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많은 사람이 일본에서 일어난 장애인 살상 사건에 경악과 충격을 금치 못했지만, 안타깝게도 장애인 살해는 한국에서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일본 사건과 다른 점이 있다면, 대부분 '가족'에 의한 살해라는 것이다. 가해자들 자신도 죽었거나 죽으려고 시도했던 것이 일관된 사건의 패턴이다. 장애인을 살해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의 '부모'라는 점도 일관된다. '더는 나 혼자 이 아이를 돌보기 힘들다' 혹은 '내가 죽고 나면 이 아이는 누가 돌봐주겠는가'였다. 2016년에 알려진 사건만 해도 적지 않다. 3월에는 천안에서 엄마가 지적장애인 딸의 목을 졸라 죽였고, 바로 다음달인 4월에는 부산에서 한 경찰관이 다운증후군 아들을 죽인 후 자신도 목을 매 숨졌다. 11월 한 달에만 부모가 장애 자녀를 죽인 사건이 전주와 여주에서 두 건이나 발생했다. 이 사건들에서도 자녀들은 모두 지적장애인이었다.
'일면식 없는 사람에게 죽임을 당한 것'과 '부모 손에 죽은 것'을 나란히 비교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부모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제 손으로 제 자식을 죽였겠는가하는 감정적 안타까움에서 오는 불편함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장애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누구의 손에 죽든 생명의 존속과 박탈이 타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은 같다.
물론, 사토시의 범행 동기와 한국 부모들의 존속살해의 동기가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근원을 따라가다 보면 ‘장애인은 생산적이지 못한 존재, 이 사회에서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의존적인 존재, 비참한 존재’라는 동일한 인식을 만나게 된다. 이는 장애인은 죽음이 외부에 의해 결정되어도 '어쩔 수 없는 존재'라는 암묵적 동의로 이어진다.
사이슈 사토루 와코대 명예교수는 도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사회를 경계했다. 사토루 교수는 일본의 사건을 보며 "출산을 포함한 생산능력이 없는 자는 사회의 일원이 될 가치가 없다고 보는 풍조가 있다. 국가는 전쟁의 적이나 공동체를 해칠 사형수를 합법적으로 죽인다. 사회자원을 쏟아도 경제적 효과가 없는 고령자나, 중증의 장애인도 ‘사회의 적’으로 간주될 수가 있다. 이런 수면 아래에 존재하던 흐름의 거품이 밖으로 터져 나온 게 이번 사건이 아닐까?”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일본에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과학적 판단과 무관하게 사회적으로 일정한 상태를 죽음으로 ‘합의’하여 종말 단계의 환자에게 죽음을 허락하는 '여사(与死)'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여사'의 대상에는 특정 상태의 고령자나 장애인이 포함된다.
사이슈 사토루 와코대 명예교수는 도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사회를 경계했다. 사토루 교수는 일본의 사건을 보며 "출산을 포함한 생산능력이 없는 자는 사회의 일원이 될 가치가 없다고 보는 풍조가 있다. 국가는 전쟁의 적이나 공동체를 해칠 사형수를 합법적으로 죽인다. 사회자원을 쏟아도 경제적 효과가 없는 고령자나, 중증의 장애인도 ‘사회의 적’으로 간주될 수가 있다. 이런 수면 아래에 존재하던 흐름의 거품이 밖으로 터져 나온 게 이번 사건이 아닐까?”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일본에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과학적 판단과 무관하게 사회적으로 일정한 상태를 죽음으로 ‘합의’하여 종말 단계의 환자에게 죽음을 허락하는 '여사(与死)'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여사'의 대상에는 특정 상태의 고령자나 장애인이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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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사회의 철저한 외면 속에서 장애인이 죽어갔다. 그렇기에 한국의 장애인들에게는 일본에서 일어난 대규모 살상극이 그리 특이한 사건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쓰구이야마유리엔 참극'은 한국의 장애인들이 처한 위치를 확인하는 거울에 불과하다. 오늘로 1581일을 맞은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광화문 농성장'에 놓인 영정사진은 열여섯 개. 여기에 끝없이 이어지는 삶의 벼랑 끝으로 몰린 장애인 가족의 존속살해 사건. 이처럼 한국의 장애인은 사회적 죽음에 내몰려 서서히 꺼져가고 있다.
수년간 계속되어 온 한국판 '쓰구이야마유리엔 참극'은 진행되는 시간만 길 뿐,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다.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를 강조하는 자본의 속도와 동떨어진 장애인은 사회에서 배제되어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장애인 자녀와 그 부모의 죽음을 단발성의 '안타까운 사건'으로만 소비하고 흘려보내고 있지는 않은지, 한꺼번에 여러 명이 죽어야만 '예방책'을 강구할 수 있는 것인지 되묻게 된다. 우에마쓰 사토시가, 한국의 부모들이 그런 선택을 하게 되기까지의 경로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무관심하게 바라봐왔던 우리가 과연 '공범'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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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별 기자
hbchoi1216@bemino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