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장애여성들과 노래방에 갔다. 요즘 가요를 모르는 나는 젊은 20대 장애여성들이 노래방에 가자고 하면 망설여진다. 그녀들은 요즘 유행하는 랩에 춤이 있는 빠른 노래들을 부를 텐데, 내가 부르는 처지고 늘어지는 옛날노래가 분위기를 깰까봐 조심스럽다. 이러한 나의 고백에 그녀들은 자기들도 옛날노래를 잘 안다고, 나에게 맞춰줄 수 있다며 기어코 끌고 간다.
역시 젊은 그녀들은 거침없다. 뇌병변장애가 있는 여성은 온몸을 다해서 가사를 전달한다고 하지만 언어장애 때문에 노래가 괴성처럼 들려지기도 한다. 또 다른 뇌병변장애여성의 노래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음만 크게 들리는데도 중도 하차란 없다. 그 누구도 포기하는 사람 없이 마이크는 순서대로 돌고 다들 열심히 부른다. 아마 누군가가 노래방에서의 우리 모습을 본다면 참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 순간 우리는 충분히 신나고 충분히 자유롭다. 그녀들의 ‘혈기왕성’에 나는 이내 지쳐 버리지만, 그녀들의 활기에 몸은 지쳐도 가슴은 꽉 채워진 느낌이다.
문득 나의 20대가 떠오른다. 나의 삶을 돌아보면 도전의 연속이었고 그 도전은 20대부터 시작되었다. 지금의 저 발랄하고 자유로운 젊은 장애여성들과는 달리 나의 20대는 처절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가장 최근 새로운 세계로의 도전은 2년 전 정치활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제 진보신당 부대표로서 임무를 마치면서 진보정당 활동 2년 동안을 돌아보게 된다. 여러 가지 좋았던 것, 괴로웠던 것, 행복했던 것, 안타까웠던 것, 충만했던 것, 외로웠던 것, 서러웠던 것, 할 말 없음과 할 말 많음, 참 생각이 많다.
장애인운동도 허덕거리던 내가, 정당 활동이라는 너무나 큰 제안 앞에서 수없이 질문한 것은 ‘과연 해낼 수 있을까?’였다. 나에게 중증장애여성이라는 현실은 정치란 꿈도 꿀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내가 정치를 상상하게 되었다. 장애를 가진 여성의 삶에서 선택이나 기회란 드문 일일 수밖에 없는데 오히려 정치입문의 과정에서 장애여성이라는 것이 가산점이 되었다. 결국 많은 고민 속에서 정치활동을 해보기로 선택했고 덕분에 많은 것을 경험했고 배웠다.
정치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어떻게 정치활동을 하겠다고 감히 나설 수 있었는지 지금 와 생각해보면 무모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다양한 투쟁현장을 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농성장에서 그들의 처절한 투쟁을 잊을 수 없다. 반면 용역 깡패들의 잔인한 행패도 볼 수 있었다. 울산에서 미포조선 노동자들이 엄청나게 높은 굴뚝에서 단식농성을 하고 있었다. 농성을 지원하기 위해 굴뚝 아래에서 추위에 떨면서 단식농성을 같이 했던 일도 잊을 수 없다. 또한 당원들의 지지가 가장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말 한마디, 행동 하나까지도 조심해야 하는 공인으로서의 자세를 배울 수가 있었다. 예리하게 정세를 분석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판단을 내려야 했던 경험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물론 아쉬움도 많다. 내게 더 많은 경험과 더 깊은 고민이 있었더라면 더 좋은 지도부로서 책임을 다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부분에 안타까움이 남는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렇듯 나는 도전하지 않았던 것보다는 도전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이라는 생각한다.
나의 첫 번째 도전은 실패였다
아마 1985년인가 1986년이었을 것이다. 나 스스로 이런저런 정보를 알아본 결과 나 같은 장애인이 일도 하고 살 수도 있는 시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할머니의 뇌출혈. 그런 와중에 집안에서 나만이라도 없어져야 한다는 절박함이 그때는 있었다. 많은 장애인들이 시설에 들어가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선택은 없다. 가족들에게 자신이 짐스러운 존재라고 느낄 때 다른 선택은 없다. 시설을 이리저리 알아보다 가족들의 부담이 가장 적다고 생각되는 곳에 편지를 보냈더니 언제든지 짐을 싸서 오라고 했다.
충북 제천 어디쯤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와 먼저 의논했고, 아버지의 반대는 어머니가 설득하셨다. 눈이 내린 겨울날, 이불 짐은 소포로 보내고 어머니와 남동생과 집을 나섰다. 기차에 내려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에는 하얀 눈이 덮인 논두렁 가운데 비닐하우스 두 동이 있었다. 비닐하우스 한 동은 평상이 길게 깔린 채 연탄난로 한 개가 놓여 있는 숙소였고, 또 다른 한 동은 작업장인데 전자부품이 널려 있었다. 몇 명의 장애인 가운데 여성은 세 명뿐이었고 나 정도로 중증인 사람은 없었다. 그곳에 내가 있으려면 먹고, 입고, 씻고 하는 것을 누군가의 손을 빌려야 했다. 애써 어떻게든 버텨보자는 결심을 단단히 하고 있는데, 어머니와 남동생이 안 된다고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나의 장애정도와 가정형편으로 선택할 수 있는 수용시설은 미인가시설로 매우 열악한 곳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해야만 했지만, 특히 남동생이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어머니도 나도 남동생도 말이 없었다. 기차가 어두운 터널 안을 지날 때 내 얼굴이 창에 비쳤다. 그때 나는 창에 비친 내 얼굴에게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수 없이 묻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첫 도전은 상처투성이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1986년 가을이었을 것이다. 가톨릭의 장애여성수도공동체 ‘사랑의 고리’란 곳이 있었다. 벌써 창립된 지 32년 된 곳으로, 그곳은 나를 사회화시켜내는 탯줄 같은 역할을 한 곳이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집안에서 미래가 없이 살아야 했던 내게 매년 가을이면 집 베란다에서 내려다보이던 넓은 코스모스 밭. 지는 석양에 내일도 모래도 이 그림을 똑같이 봐야 하고, 이렇게 세월이 가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괴로워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 어느 여성잡지에서 사랑의 고리를 알게 되어 회원이 되고 싶다고 편지를 보냈다. 그때는 사랑의 고리 공동체가 있는 곳이 전국에 서울, 부산, 광주, 인천, 제주 다섯 곳이었다. 나는 부산의 사랑의 고리를 알게 되어 매월 한 번, 일상생활을 적어 편지를 보내는 활동을 일 년 정도 했다.
어느 날, 부산 사랑의 고리 언니들이 강원도 동해까지 찾아왔다. 부산 사랑의 고리에 가서 며칠 지내보자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엄청난 제안이었다. 단 한 번 친척집에 가서 자 본 적도 없었던 내가 낯선 곳에 혼자 간다는 것이 두렵기도 했지만, 나는 어느덧 짐을 싸고 있었다. 생각도 복잡하고 걱정도 되었지만 ‘그래, 한 번 해보는 거야’ 하는 오기도 생겼다. 또다시 어머니를 설득하고, 아버지에게는 어머니가 나서서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한 뒤에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아마 일곱 시간 정도 버스를 탔던 것 같다. 부산에 도착하니 늦은 밤이었고 비가 내리고 있어 나의 두려움 가득한 눈동자를 가려주고 있었다. 광안리 바다가 가까운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또 수녀원 정문 옆에 작은 집 한 채. 장애여성 세 명이 공동체로 살고 있는 바로 그곳이 사랑의 고리였다. 새벽미사 시간, 여러 기도시간, 나는 지난 25년간 만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만나게 되었다. 회원들, 봉사자들, 후원회 사람들, 수녀님과 수사님, 신부님. 그리고 수사님들과 같이 가난한 동네를 방문하면 노인들, 환자들까지 만나게 되어 나의 이야깃거리는 풍부해지고 있었다.
정신없이 바쁘던 일주일이 지나자 언니들이 나에게 “혼자 갈 수 있지?”라고 한다. 덜컹 가슴이 내려앉았지만 “네, 갈 수 있어요.”라고 대답을 했다. ‘맙소사, 정말 그럴 수 있어?’ 자신에게 되물어보지만 ‘그래, 해 보는 거야’라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다.
난생처음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버스를 탔다. 기사님은 장애인 혼자 덩그러니 남기고 차에서 내리는 언니들의 뒷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신다. 그리고 걱정스럽게 내 얼굴을 보시다가 체념하신 듯 운전대에 앉았다. 그래도 간간이 나의 행동을 주시한다. 이후 나는 이렇게 혼자인 것이 좋아서 버스여행을 즐겼다. 나중에는 걱정스러워 하는 버스기사에게 괜찮다고 안심시켜 드리는 여유까지 생겼다. 물론 장거리 버스를 혼자 타려면 이틀 전부터 몸만들기 작업을 해야 한다.
뭣보다 화장실을 안 가기 위해 물을 최소한으로 마셔야 하는데 친절한 기사님들은 자꾸 커피를 사 주시니, 참……. 아무튼 그날 혼자 버스를 타고 동해에 도착했다. 남동생 얼굴이 보이자 내 몸의 모든 기운이 썰물처럼 빠지는 것이 그만큼 집을 떠나 너무 많은 것을 경험하면서 많이 긴장했고 그래서 심한 몸살을 앓았던 것 같다.
![]() ▲국가인권위원회 현병철 위원장 사퇴를 촉구하는 야 5당과 인권사회단체의 공동결의대회에 참석한 박김영희 활동가. |
장애극복기가 아닌 여럿이 함께하는 도전기가 되길
집회 현장에서 갑자기 발언할 사람이 없어 펑크가 나거나 돌발 상황이 벌어질 때 실무자는 급히 나에게 마이크를 건넨다. 나는 아무 준비도 못하고 마이크를 잡고 발언도 하고, 선동도 하고, 어떤 때는 심지어 노래도 한다. 내가 ‘마이크 울렁증’이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코웃음을 친다. 나도 대인 공포증이 있었다고 하면 역시 코웃음이다.
나를 가까이서 봐온 사람들은 내가 사람들과 얘기를 잘하고, 잘 웃고, 가끔은 사람들을 웃기기까지 하고, 내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도 하니 나를 원래 사회성이 뛰어난 사람으로 안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려면 입술이 떨리고, 얼굴이 빨개져서 놀림도 많이 받았다. 말을 하려면 목소리도 점점 작아지고, 너무 힘들 때는 눈물까지 그렁그렁해지고는 했다. 그런데 사랑의 고리 활동을 하면서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할 일들이 자꾸 생겼다. 또 내가 책임지고 해내야 할 일이 생기는데 그럴 때마다 너무 힘들었다.
수줍음 많은 나의 성격이 본성인지, 사회적인 훈련이 없어서인지 고민을 많이 했다. 같은 회원 언니들에게 상담도 하고 여러 가지 도움도 청했다. 언니들은 나에게 자신감을 많이 주었고, 실수해도 격려를 하였고, 상처가 되지 않게 잘 보듬어 주고 언제나 도와주겠다고 지지해 주었다.
그 중 한 분은 테레사 언니였다. 올케가 시집을 와서 장애여성인 언니와 갈등이 생겼다고 한다. 왜 시설에라도 들어가지 않는지 하는 눈치였단다. 한 번 큰 다툼이 있는 후에 더 이상 가족과 같이 식사를 안하게 되었다고 했다. 가족들로부터 소외를 당하며 사셨던 언니였지만 항상 죽기 전에 올케와 꼭 풀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는데, 결국 그러지 못하고 갑자기 돌아가셔서 우리 모두를 안타깝게 했다. 지금처럼 자립생활운동이 있었다면 가족에게도 자신에게도 서로 상처를 주며 살지 않아도 될 것을.
나는 일찍이 이 언니를 보며 가족에게 기대할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을 배웠다. 가족들이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삶을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테레사 언니는 중증장애를 가진 나에게 사랑을 많이 주셨다. 자주 잔소리는 하셨지만 늘 잘했다, 그만하면 대단하다, 넌 잘할 수 있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외부 사람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에서 그룹 토론을 진행하고 거기서 나온 내용을 요약, 정리해야 하고, 또 그것을 발표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때마다 언니는 이것저것 챙기면서 격려해주셨다. 무엇보다 네가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떠맡겨진다고 하며, 네가 힘들면 다른 사람에게도 힘들다며 격려를 했다. 밤잠을 설치면서 생각하고 연습하고, 자신감을 갖기 위해 스스로 주문을 외우면 울렁증이 한결 나아졌다.
얼마쯤 세월이 지나자 점점 나아지는 내가 보였다. 이 모든 것이 사회화하는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 힘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자신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지금 사회로 나오는 장애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두려워할 것은 자기 자신이고, 좀 틀리면 미안하다고 하면 되고, 실수하면 다시 하면 되고, 부족하면 채워줄 사람, 도와줄 사람을 찾으면 되고, 그렇게 서로서로 자신감을 갖자고 말하고 싶다. 물론 모두가 이렇게 할 필요는 없다. 또한 여전히 나도 마이크가 무섭고 부담되는 자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한다. 이렇게 치열하게 도전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암반 오르기처럼 아슬아슬 조마조마하며 위태로운 생존의 도전을 하면서 이렇게 기를 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일까? 이런 삶이 가끔은 지치고 벅차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치열한 생존현장을 달리고 있고 끊임없이 도전하도록 만들어진 사회다. 그런데 장애를 가진 사람은 기본적인 출발점도 다르고, 뭔가를 시작하려고 하면 장애를 극복하라고 한다. 내가 해야 했던 도전들이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그렇게 보면 그렇게도 보인다. 그렇지만 나는 사회의 제도가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그들의 지원과 지지로 여기까지 왔다.
나의 도전기가 장애극복으로 읽히길 바라지 않는다. 다만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었던 많은 분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또 하나, 정치 활동이라는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무엇이든지 도전하면 어떤 것이든지 얻는다는 것이다. 하지 않은 것보다 하는 것이 낫다. 시간은 절대 공짜가 없다.
“죽을 때까지 배운다”는 말처럼 무서운 것이 없다. 요즘 장애여성 소모임 두 개를 진행하는데 시니어모임은 50대 중반부터 60대 중반까지다. 너무 오래간만에 막내가 되어본다. 새내기 젊은 장애여성 세상을 향한 꿈 모임(세꿈모임)에서는 내가 왕언니다. 시니어모임 언니들은 장애를 가진 여성으로서 어떤 경험을 하면서 살아왔는지, 그 살아온 힘은 무엇이었는지 후배들에게 알려준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계신다. 또 중도 장애를 가지게 되면서 갖게 되는 절망감과 그것을 인정하는 과정도 얼마나 커다란 고통인지를 이야기하는 분도 있다.
세꿈은 의욕이 넘친다. 하고 싶은 계획도 많다. 그리고 모두 할 것이 많아 바쁘다. 그 와중에 놀고 싶어 한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도 많다. 무엇이든지 도전해야 하는 것은 알겠는데 어떤 방법으로 시작해야 할지 헤매는 중이다. 이들과 함께하면 즐겁다. 소진되었던 나의 에너지가 다시 충전된다.
우리는 혼자일 수 없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줘야만 어떤 도전도 가능해진다. 여기서 받은 에너지로 나는 또 다른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장애운동에서 이젠 실무자로서 일을 시작할 것이다. 나는 실무력이 부족하다. 그러나 해보려고 한다. 많이 깨지고 그만큼 아플 것이다. 언제 또 다른 도전이 가능할 시간이 있을지 모르지만 주어진 시간 동안에 여러 생각과 고민과 두려움을 일단 접고 ‘그래. 해 보는 거야’ 하고 시작한다.
*이 글은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2010년 11·12월호에도 실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