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 ‘발견’ 시점과 ‘발병’ 시점 다른 망막색소변성증
독일·캐나다 등, 장애 확정 시기에 기준 두고 ‘국민연금 기여도’로 수급 자격 판단
국민연금 가입 중 장애가 발생하면 국민연금 대신 장애연금을 받게 된다. 그런데 진행성·유전적 질환의 발병 시기는 대체 언제로 판단해야 할까? 발병 시기에 대한 판단은 장애연금 수급 자격 판단 기준과 직결되기에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법원의 판단도 매번 엇갈리고 있어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망막색소변성증은 대표적인 진행성·유전적 질환으로, 이에 대한 국민연금공단의 장애연금 지급과 관련된 발병 시기 판단은 매번 혼선을 빚어왔다. 이에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장애연금을 미지급에 대한 수차례의 소송을 진행해 왔다. 이들은 그간의 소송 경험을 토대로 23일,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국민연금 장애연금 제도 개선 토론회를 열었다.
- “국민연금에 강제 가입시키고는 인제 와서 나보고 증명하라니…” 억울

전아무개 씨는 20세 전후로 야맹증 증상이 발생했으며, 그 무렵 시력이 저하되어 안경을 쓰게 됐으나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할 정도로 시력에 큰 문제는 없었다. 이후 백내장 진단을 받고 1992년엔 오른쪽 눈을, 1997년엔 왼쪽 눈에 대한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이후 1999년 4월 1일 국민연금에 가입한 뒤 그는 최근까지도 국민연금 가입자였다.
2011년 1월경, 시야가 좁아지는 느낌을 받은 전 씨는 그해 6월 망막색소변성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그러나 이후에도 큰 불편함 없이 승용차, 오토바이 운전을 하고, 등산, 자전거, 복싱 등 운동을 하며 평소처럼 지냈다.
그러나 2012년 12월,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위해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았다가 안압이 급격히 높아지면서 실명했고, 더는 전처럼 지낼 수 없게 됐다. 결국 2014년 10월에 국민연금공단에 장애연금을 신청했다. 그러나 공단은 지급을 거절했고, 결국 이는 소송으로 이어졌다. 그는 1심 패소 후 2심에서 승소하였으나 공단 측이 항고하면서 현재 대법원 소송 중이다.
“국가는 과거 국민연금에 강제 가입시키고는 이제 와서는 ‘당신이 실명할 것임을 알고 가입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한다. 장애연금 타려면 내가 티끌만큼의 하자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하는데 시각장애인이 돼서 20년도 넘은 병원 기록들을 찾아다니려니 정말 포기하고 싶다. 그런데 이건 내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중도 실명되어 어려움을 겪을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개선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락으로 떨어진 국민을 국가는 제발 더는 내몰지 말라.” (전 아무개 씨)
- 질병 ‘발견’ 시점과 ‘발병’ 시점 다른 망막색소변성증
‘망막색소변성증’은 유전 질환이자 진행성 질환이다. 보통 10세 전후 야맹증이 나타나고 수십 년에 걸쳐 주변 시야가 손실되면서 시력 저하가 진행되어 마침내 실명에 이르게 된다. 과거 개그맨이었던 이동우 씨가 앓으면서 널리 알려졌다. 이처럼 유전 질환이면서 진행성 질환인 경우엔 ‘질병 발견 시점’과 ‘발병 시점’이 다를 수 있기에 ‘언제를 연금 지급 기준일로 삼을지’가 다툼이 된다.-
장애연금 수급권에 대해 구 국민연금법 제67조 1항(2016.5.29. 일부 개정, 전 씨는 개정 전에 소를 제기했기에 ‘구법’ 적용받음)은 “가입 중에 생긴 질병(당해 질병의 초진일이 가입 중에 있는 경우로서 가입자가 가입 당시 발병 사실을 알지 못한 경우를 포함한다)이나 부상으로 완치된 후에도 신체상 또는 정신상의 장애가 있는 자에 대하여는 그 장애가 계속되는 동안 장애 정도에 따라 장애연금을 지급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장애연금 수급권을 인정받으려면 질병 ‘발생일’과 ‘초진일’이 국민연금 가입 이후여야 한다.
1심 재판부는 ‘발생일’이 국민연금 ‘가입 전’이라고 판단하여 기각했으며, ‘초진일’ 시기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발생 시기에 대해 재판부는 망막색소변성증의 가장 큰 증상인 시야 협착과 시력 저하 증상이 동시에 나타날 때를 의학적·객관적 발병 시기라고 볼 수 있다고 판단했는데 이것이 국민연금 가입 전에 나타났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항소심은 오히려 ‘발생일’에 대해선 판단을 유보하고, 구 국민연금법 제67조 1항 ‘괄호 부분’을 적용하여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전 씨의 초진일이 국민연금 가입 이후이고 그가 가입 당시 발병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인정한 것이다.
이제까지 망막색소변성증을 둘러싼 국민연금공단과의 소송 쟁점은 ‘진행성 질환의 발병 기준일은 언제인가’였다. 이에 대해 2006년 대법원은 “‘가입 중에 발생한’ 질병 또는 부상의 의미는 장애의 원인이 된 질병 또는 부상이 의학적·객관적으로 판단할 때 국민연금 가입기간 중에 발생하여야 한다는 뜻”이라면서 “신체적·정신적인 고통이나 기능 저하로 일상생활을 방해받을 정도로 장애가 구체화된 경우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 국민연금법 개정으로 기준점 ‘초진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다툼의 가능성 커”
그러나 이러한 기준을 담고 있던 구 국민연금법 제67조 1항은 지난 2016년 5월 29일 일부 개정됐다. 이에 따라 장애연금 수급요건도 크게 변했다. 개정법은 기존의 ‘가입 중 질병 발생 요건’과 ‘가입자가 가입 당시 발병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라는 괄호 속 요건까지 삭제하고는 모든 기준점을 ‘초진일’에 두었다. 개정법에 따르면 △초진일 당시 국민연금 보험료를 낸 기간이 가입대상 기간의 1/3 이상일 것 △초진일 5년 전부터 초진일까지의 기간 중 연금보험료를 낸 기간이 3년 이상일 것 △초진일 당시 가입 기간이 10년 이상일 것, 이 셋 중 한 가지 요건을 충족해야만 장애연금을 받을 수 있다. 여기서 초진일이란 “장애의 주된 원인이 되는 질병이나 부상에 대하여 처음으로 의사 진찰을 받은 날”이다.

초진일을 판단하기 위해선 ‘질병에 대한 의사 진단이 있었는지’ 여부와 ‘진단받은 질병이 장애를 초래한 직접적 질병인지’를 가려야 한다. 따라서 여러 질병이 경합하는 경우 장애를 초래한 직접적인 질병은 무엇이고 그 질병에 대한 진단이 있는지, 그 진단이 최초로 이뤄진 때는 언제이고, 직접적인 진단이 있었다면 처치가 있었는지 등에 대한 다툼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배 변호사는 “초진일은 일반적으로 질병 발생일보다 앞서게 되어 초진일 기준으로 가입 이력과 보험료 납부 이력을 따지면 장애연금 신청자 입장에선 더욱 불리한 셈”이라면서 “나아가 의학 및 유전자 기술의 발달로 진행성·유전성 질환뿐만 아니라 다른 질병의 최초 진단 시기는 더욱 앞당겨질 것이기에 결과적으로 장애연금 인정 범위를 축소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밝혔다.
- 독일·캐나다 등, 장애 확정 시기에 기준 두고 ‘국민연금 기여도’로 수급 자격 판단
외국의 경우엔 초진일 기준으로 수급요건을 따지기보다는 장애 발생이나 장애 확정 시기에 최소한의 가입 이력 및 보험료 납부 이력을 통한 기여도로 장애연금 수급자격을 판단하고 있다.
독일의 경우, 장애가 최소 1년 이상 가입 후에 발생할 것, 그리고 최근 5년간 3년 이상 보험료를 납부하고, 최소 총 5년 이상의 생애기여기록이 있는지 여부가 장애연금 수령 요건이 된다. 만약 장애 발생 시, 최소 5년 이상 연금에 가입하여 3년 이상 보험료를 냈다면 장애연금을 받을 수 있다. 독일은 선천성 장애인에 대한 특례조항도 두고 있다. 한국의 경우, 선천성 장애인도 국민연금에 당연 가입되지만 ‘가입 중에 장애가 발생한 것이 아니기에’ 장애연금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독일은 선천성 장애인도 20년 이상 가입했다면 장애연금을 받을 수 있다.
캐나다는 장애 발생 시점을 ‘가입 중’ 혹은 ‘보험료 납부 중’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폭넓게 18세 이상 65세 사이로 열어둔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일정 소득 활동을 하고 이에 기초해 보험료를 성실히 납부했는지 여부다.
일본은 20세 전에 초진일이 있었더라도 20세에 달한 때 장애 1급 또는 2급이거나, 노령연금 수급연령인 65세 이전에 장애 1급 또는 2급 판정을 받으면 장해기초연금을 받을 수 있다. 또한, 국민연금 도입 초기 강제 적용하지 않은 점을 고려해 이후 장애를 입었음에도 장해연금을 받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특례 조항도 두고 있다. 장애 등급과 소득 기준 제한 등의 한계가 있지만 진행성·유전성 질환자에 대한 최소한의 구제 요건은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보다는 개선되어 있다. 전 씨의 경우라면 충분히 수급 요건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배 변호사는 한국도 “초진일 기준으로 수급요건을 엄격히하기 보다는 외국과 같이 국민연금 가입자의 가입 이력, 납부 이력을 통한 기여도 중심으로 판단해야 한다”면서 “선천적 장애인이나 장애 발생이 예상되는 사람도 국민연금에 당연 가입되는 이상 가입 기간 및 기여도에 따른 특례조항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