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인들의 삶에 대해 어떤 방책을 가지고 있는가?

장애인운동 진영에서 큰 몫을 하는 단체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이다. 장애인의 삶에 끼친 영향이나, 장애인 문제를 사회적인 이슈로 만들고 관심영역을 넓혀 간 것도 성과이고, 장애인 이용시설이나 시설환경 개선에도 단단히 한몫을 해 왔다. 장애인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개선하고, 온몸으로 저항하며 만들어 놓은 지금의 환경과 인식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큰 성과들을 이루어냈다.

 

타협하지 않고 오직 온몸으로 길바닥을 돌아다니며 만들어 놓은 성과들은 더 많은 장애인들에게 희망이 되고,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수립이 이제 전장연의 견제 때문에 엿장수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된 것도 그간의 투쟁이 만들어 놓은 성과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전장연에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장애인 문제를 풀어감에 있어서 과연 발달장애인들의 삶에 대해서는 어떤 방책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어진다. 장애인 문제에 장애유형이 따로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장애 정도가 따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장애인운동 진행을 보면 늘 발달장애와 관련한 내용에 대해서는 어딘지 모를 허전함을 느끼게 된다.

 

장애인운동을 하는 장애인당사자 활동가들에게 묻고 싶다. 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이야기하고, 장애인의 교육을 이야기하고, 장애인의 삶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과연 발달장애인들의 고민과 입장과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알고 싶다.

 

발달장애인의 자립생활은 지체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비해 신경 쓰고, 이해하고, 반영해야 할 것들이 많다. 장애인자립생활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무 자르듯이 발달장애인은 따로 하면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드는 생각은 오만가지에 달한다.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장애인의 자립생활운동을 함께하자는 것인가.

중증의 중복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립생활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장애인자립생활이라는 것이 자립 의지를 갖춘 사람이나, 자립이 가능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인가.

자기결정권을 이야기할 때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에 대해서는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지 준비는 돼 있는가.

발달장애인에게 부모의 존재는 어떻게 보고, 어디까지 인정해 줄 수 있는지 온통 궁금한 것투성이다.

 

연대를 말하고, 투쟁을 말하고, 동지라 말을 하면서도 총론에서 인정되는 것들이 각론에서 인정되지 않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여전히 혼란스럽다. 진정한 연대가 되기 위해서는 각 단위의 입장을 반영하고, 단위의 생각이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본다.

 

발달장애인의 자립생활이 가능한지 의문을 제기하거나 예산 문제를 들어 각자 진행하자고 할 것이 아니라, 평생교육이 시간이나 돈을 낭비하는 것이 아닌 평생교육의 목적을 제대로 세우고 그것을 어떻게 수행해 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것이 우선이라고 본다. 그것이 진정한 연대이고, 그렇게 할 때 부모를 당사자로 인정하고 함께할 수 있다고 본다.

 

장애인의 문제는 장애인의 힘으로 풀어가자는 것에 이견은 없다. 하지만 발달장애인에게 이 뜻이 어떻게 전달될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내용 전달이 안 된다면 부모의 역할에 대해서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연대’와 ‘단결’은 그렇게 각자의 생각과 입장이 서고, 그것을 서로 인정하면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당위성이나 필요성만 가지고 함께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변혁의 역사를 만들어가겠다고 한다면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에 대해서 좀 더 넓은 논의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장애인자립생활 조례를 만들자면서 발달장애인이 자립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고민을 하기보다는, 그렇게 판이 커지면 예산의 문제가 생기고 그렇게 되면 자립생활 조례를 만드는 것이 어려워진다는 말은, 운동이 조례에 초점을 맞춘 것인지 아니면 장애인의 자립생활에 맞춰진 것인지 쉽게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최소한 모든 장애인이 자립생활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는 것이 자립생활 운동의 목적이라면, 어떻게 하면 그런 환경을 만들어 갈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고, 다양한 의견과 생각이 모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예산의 문제를 들어 각 영역별로 따로 하자 한다면, 지체장애인을 위한 자립생활운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또한 장애인평생교육에 대해서도 발달장애인에게 평생교육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떻게 하면 그것들을 현실화시켜 갈 수 있을지, 어떤 내용으로 채워져야 하는지를 논의해 가는 자리가 필요하지만, 이 역시 방향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수반되지 않고 있다.

 

발달장애인에게 평생교육은 필요한가.

필요하다면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하는가.

장애인평생교육이 야학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은 올바른 방향인가.

장애인평생교육은 어떤 내용으로 채워져야 하고, 평생교육의 범주는 어디까지인가.

 

발달장애인에게 평생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자는 뜻에 공감한다면 내용의 범주를 야학에 한정하거나, 글자를 가르치거나, 학력취득을 목적으로 하는 것에서 벗어나 다양한 교육이 이루어질 방안을 강구하는데에 더 적극적이어야 할 것이다.

 

운동이 예산의 범주에 갇혀버린다면 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운동의 주체들이 예산을 걱정(?)하면서 내용을 축소하려는 생각을 한다면, 이미 운동의 중심을 잃은 것이다. 또한 자기 영역에 대한 중요성만 고집한다거나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운동의 한계를 스스로 설정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으니 대중운동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야학에 발달장애인이 있다고 해서 발달장애인의 평생교육에 적극적이라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또한 그렇게 단적인 사례를 가지고 발달장애인의 평생교육에 관심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 역시 잘못된 생각이라 본다. 발달장애인에게 평생교육이 왜 필요한지,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안고 접근해야 할 일이지, 작은 사례로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고 한다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전장연에서 장애인 전체의 삶을 놓고 운동을 펼쳐나간다고 이야기한다면, 이제 발달장애인의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에 대해 언급해야 하겠다. 단순하게 사안에 따른 연대를 중심으로 운영해나가겠다면 몰라도, 동지라고 여기고 장애인의 문제로 받아 안고 가겠다는 생각이라면 이에 대한 언급은 선결되어야 할 것이다.

 

엄밀하게 이야기한다면 ‘연대’는 선택이지 필수조건이 아니다. 진정으로 연대를 이야기한다면, 연대 단위에 그 필요성에 대해 충분한 사전설명이나 구체적인 계획에 대해서는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서 자립생활이나 평생교육에 대한 정리는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전장연’이 이 문제를 함께 하자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려 한다면, 내용의 공유와 공감대를 만들기 위한 언급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 이 글은 직책을 가지고 쓴 것이 아닌, 그동안 느껴 온 개인적인 생각을 언급하는 것인 만큼 단체 간 이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최석윤의 '늘 푸른 꿈을 가꾸는 사람들'

 

복합장애를 가진 아이와 복작거리며 살아가는 정신연령이 현저히 낮은 아비로 집안의 기둥을 모시고 살아가는 다소 불충한 머슴.  장애를 가진 아이와 살아가면서 꿈을 꾼다. 소외받고, 홀대 당하는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한 가운데로 모이는 그런 꿈을 매일 꾼다. 현실에 발목 잡힌 이상(理想)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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