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적 관점으로 시설화 비판하기] ⑮
| /기획의도/ * 필자의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습니다. |
2009년 시설비리를 폭로하며 마로니에 공원 노숙농성으로 서울시에 탈시설 자립생활 정책을 요구한 ‘마로니에 8인’부터 현재 ‘장애인과가난한사람들의3대적폐폐지공동행동’에 이르기까지, 탈시설 운동은 진보 장애계의 중요한 의제였다. 진보 장애계는 셀 수 없는 농성과 행진, 치열하고 처절한 투쟁으로 ‘서울시 장애인 거주시설 탈시설화 추진계획’을 이루어냈다.
‘장애인자립생활센터와 장애인거주시설 연계 장애인자립지원사업(아래 거주시설 연계사업)’은 서울시가 진보 장애계의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 2013년부터 추진해 온 사업 중 하나로 장애인 거주시설에 거주하는 중증장애인의 다양한 사회참여활동 및 자립생활 역량강화를 목적으로 한다. 2013년~2015년, 2016년~2018년까지, 6년간 총 두 차례에 걸쳐 공모사업으로 운영되었던 거주시설 연계사업이 올해부터 기본사업으로 전환되면서 서울시 지원을 받는 모든 장애인자립생활센터(아래 IL센터)들은 거주시설 1개소와 연계하여 탈시설 사업을 수행해야 한다.

‘비협조’만으로 설명했을 때 생기는 공백
거주시설 연계사업을 통해 마주하게 된 시설의 실재는 또 다른 과제와 국면으로 다가오고 있다. 예상대로 거주시설의 반발은 거셌고, 거주시설과 종사자는 거주시설 연계사업에 대한 반감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많은 거주시설이 시설 내 자체 일정이 많다는 이유로 IL센터의 제안을 거부하며 IL센터가 거주인을 만나는 것을 차단해 IL센터는 거주인과 일정 하나 잡는 것조차 녹록하지 않다. 이에 문제를 제기하면 ‘거주시설 연계사업은 IL센터의 사업이지 시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로 정당성을 주장한다. 거주시설은 이제 그치지 않고 ‘탈시설이 아니라 커뮤니티 리빙(Community Living)으로 불러야 한다’, ‘거주시설 연계사업의 목적은 탈시설이 아니라 자립’, ‘탈시설보다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선택과 결정’이라는 언뜻 들으면 ‘민주적인’ 말들로 탈시설의 가치와 의미를 훼손하고 있다.
지금의 상황은 서울시가 탈시설의 목적과 위상을 분명하게 하지 않음으로써 거주시설에 빌미를 제공했기에 가능했다. 서울시는 탈시설화를 정책 기조로 삼으며 탈시설이 권리임을 선언하겠다고 했지만, 실제 입장은 어떠한지 알 수 없다. 그 예로 서울시는 자립생활주택을 확대하는 것을 IL센터에는 탈시설 지원 정책으로, 거주시설에는 시설 운영 안정화로 이야기하고 있다. 자립생활주택은 탈시설을 희망하는 장애인이 일정 기간 거주하면서 지역사회를 체험하는 주거공간으로 탈시설과 독립을 지원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지만 현재 많은 시설 법인들이 거주시설과 함께 자립생활주택을 운영하고 있다. 자립생활주택의 운영 주체에 제한을 두지 않는 제도의 공백은 시설의 뿌리를 촘촘하게 만드는 일에 크게 일조하고 있다. 이 모순이 의도된 것이든, 고민 없음 혹은 무지에서 비롯한 것이든 서울시는 물음을 피해갈 수 없다.
많은 IL센터들이 현재 당면한 문제와 어려움을 거주시설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설명하고 있지만 협조와 비협조, 원만함과 갈등처럼 IL센터와 거주시설의 개별적인 관계 문제로 접근하는 방식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서울시가 ‘IL센터와 거주시설이 서로 협력하시라’며 분명한 입장도 없이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현재 상황에서는 개별 IL센터의 ‘호소’ 혹은 ‘역량 부족’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크다. 더불어 문제 제기의 방향 역시 개별 시설에 그칠 수밖에 없다. 시설의 총체적 구조가 아니라 ‘그런 시설, 그런 종사자’만이 문제가 된다. ‘비협조 프레임’의 가장 큰 문제는 탈시설에 대한 책임은 지워진 채 서울시가 관리와 평가의 주체로만 기능한다는 것이다.
탈시설 지원 현장의 문제를 다시 규정할 때
탈시설 현장의 문제를 다시 규정하는 것은 탈시설 운동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거주시설이 사라져야 하는 이유는 단지 ‘그곳에서 금품착취나 폭행이 일어나서’가 아니라 ‘특정 존재를 무능하고, 문제가 있는 대상으로 규정하는 논리’가 시설의 비민주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시설의 민주화를 대안으로 내놓는다. 그러나 시설의 비민주성은 투명한 운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설이 존재하는 근거부터 이미 반인권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거주시설로부터 소위 ‘인정’을 받는 거주인은 필요에 따라 엘리트와 미성숙한 존재 사이를 오고 간다. 거주시설을 돋보여야 하는 순간에는 ‘엘리트’, ‘대표거주인’이었다가 독립을 이야기할 때는 ‘생활적인 면에서는 미성숙’한 존재가 된다. 거주시설과 종사자가 원하는 순간에만 주체됨을 허락/강요받는다. 누군가가 호명하는 대로 나의 정체성이 규정되는 곳, 즉 거주시설에서 거주인은 객체로만 존재할 수 있다. 이 물음을 따라가면 현재 탈시설 지원 현장의 문제는 ‘거주시설이 협조하지 않아서’, ‘일정 잡기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주체가 되어야 할 당사자가 탈시설 과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거주시설이 탈시설 운동을 어떤 식으로 저지하든 간에 우리는 이미 담장 안으로 들어갔고, 이는 절대 돌이킬 수 없는 현상이다. 거주인과 당장 담장 밖으로 나갈 수는 없어도 그 안에서 사례는 축적할 수 있다. 거주시설과 종사자가 거주인을 어떻게 대하는지 목격할 수 있고, 거주인의 삶과 목소리를 만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거주시설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언어를 찾을 수 있고, 사례는 이미 쌓이고 있다.
그렇기에 시설의 비민주성을 포착할 수 있는 민감성을 갖추는 일은 탈시설 운동에 있어 우리의 중요한 투쟁 과제가 될 것이다. 탈시설 지원 현장의 진짜 문제를 규정하는 것은 인권이 무엇인지 다시 해석하는 작업인 동시에 ‘○○판 도가니’, ‘제2의 도가니 사건’으로 이름 짓지 않고서 시설을 무너뜨리는 방법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물음을 우리 안으로 가져오기
김지혜는 “사회복지제도는 주류의 기준에서 기획된 것이 아닌, 당사자가 가시화되어 참여해 만드는 과정이자 결과이어야 하며, 탈시설 운동은 분리된 세계를 ‘없애는’ 것을 넘어,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운동”이라고 말한 바 있다. (탈시설 운동은 ‘없애는 것’ 넘어 ‘만드는 것’, 비마이너, 2019.4.3) 우리의 투쟁은 ‘몇 년 동안 몇 명의 거주인이 시설 밖으로 나오는지’에 그치지 않고, ‘당사자가 탈시설 과정에서 얼마나 주체로써 참여할 수 있는지’를 묻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탈시설 과정을 거치며 거주인 당사자가 새로운 관계 맺기를 경험할 수 있는지, 시설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체득할 수 있는지를 우리 스스로 계속 물어야 한다.
지난 4월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20일간의 농성 끝에 서울시 2차 탈시설 계획 목표를 ‘5년 내 300명’에서 ‘5년 내 800명’으로 수정하는 데 성공했다. 탈시설, 근본적으로는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삶’에 대한 투쟁 의지를 표명했던 중요한 사건이다. 하지만 압축된 시간, 늘어난 목표 인원 자체가 탈시설 운동의 완성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정부와 제도, 거주시설이 운동의 언어를 어떻게 오용하는지를 지적하고, 이를 다시 넘어서기 위해서는 외부로 향했던 물음을 우리 안으로 계속 가져와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