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아동보육원에 유기되어 계속 장애인거주시설에서 살아
유품은 의료기구가 대부분… 여행 가고 싶어 했던 민희 씨

96년 5월 19일, 20대 여성이 아동을 보육원 앞 놀이터에 유기 후 사라졌다. 유기된 아이는 95년 11월 10일생 한민희이다. 96년 5월 20일 인천 해성보육원에 입소하여 신장·지적장애 진단을 받았다. 

99년 2월 4일 명심원 전원입소
01년 1월 6일 동심원 전원입소
05년 8월 1일 명심원 전원입소
02년 3월, 인천연일학교(특수학교) 초등부에 입학하여 16년 2월 12일 인천연일학교 전공과 졸업.
 
시설 안에서 한민희는 궁금한 것이 많은 아이였다. 그는 질문이 많았다. 욕심이 많고 자존심이 강해서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을 때는 삐지기도 했다. 무엇이든 스스로 하려는 성격이 강하며, 칭찬과 자세한 설명이 있으면 이해가 가능했다. 신장장애로 인한 복막투석을 스스로 처리했고, 소변백을 항상 차고 다니는 것에 대해 예민하고 다소 위축되어 있었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관심받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컸다.

여기까지가 시설에서 작성된 자료로 볼 수 있는 민희 씨의 모습이다.

댄스발표회를 앞둔 한민희 씨(가운데)를 응원하며. 왼쪽은 박길연 민들레장애인야학 교장, 오른쪽은 전혜정 활동가.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
댄스발표회를 앞둔 한민희 씨(가운데)를 응원하며. 왼쪽은 박길연 민들레장애인야학 교장, 오른쪽은 전혜정 활동가.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

- “금방 죽을 건데…”하면서도 열심히 미래를 준비했던 사람

민희 씨가 살았던 장애인거주시설 명심원은 과거 인천에서 인권침해 문제가 불거졌던 문제시설 중 한 곳이었다. 이후 명심원은 이름만 ‘밝은마음’으로 바뀌어 현재까지 계속 운영되고 있다.

민희 씨는 스물한 살이 되던 16년도부터 자립을 위한 준비를 하며 인천의 한 장애인자립생활센터 체험홈을 알아보았지만 복막투석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자립에 대한 꿈을 계속 꾸고 있었던 민희 씨는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아래 민들레센터)를 만나 18년 7월 23일 계양구에 있는 민들레센터 체험홈에 입주하게 되었다.

선천적인 신장장애가 있는 민희 씨는 장기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해 키 120cm가량의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6시간마다 한 번에 20분씩, 하루 4번, 매일 투석을 해야 했다. 민희 씨는 한 달에 두 번 병원에 가야 했지만 누군가와 함께 가는 것을 때로 눈물을 보이며 거절할 만큼 무척 꺼렸다. 자신이 아픈 것을 다른 사람이 몰랐으면 하는 마음에서였을까. 그만큼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서는 “급사 가능성이 높다”고도 했다. 병원에서는 “평균 10년, 잘 살아도 20년 살 수 있다”고 했지만 그는 올해 스물다섯 해째를 살아내고 있었다.

처음 자립했을 때 민희 씨는 방이 있고, 핸드폰도 마음대로, 자는 시간도 마음대로, 티비보는 시간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면서도 어려워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체험홈과 야학 프로그램에도 적극 참여하고, 상근자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불안한 일상을 누구보다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리라. 그는 프로그램을 하면서 종종 “내가 이걸 배워서 뭐 해, 금방 죽을 건데”라는 말을 하곤 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중에 혼자 살려면 돈이 필요하다며 기초생활수급비와 장애인연금을 합해 월 90만 원정도 되는 돈의 대부분을 저축했다. 시설에서 가지고 온 돈은 7백만 원 정도였지만 2년 뒤 민희 씨는 천만 원 넘게 모으게 되었다. “금방 죽을 건데”라는 말을 하면서도 자립에 대한 꿈과 열망이 있었기에 민희 씨는 열심히 돈을 모으지 않았을까. 민희 씨는 돈을 모으기 위해 하루에 많아야 100원 모을 수 있는 만보기 앱도 깔고, 음식 먹는 것도 아껴가며, 미래를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민희 씨는 센터 프로그램 중 하나인 댄스수업을 특히 좋아했다. 2년 동안 함께했는데, 수업의 막내였지만 가장 열심히 잘 따라 했다. 오빠들에게 동작을 알려주기도 하고, 격려의 말도 자주 했다. 마지막 수업 발표회에서 민희 씨는 지인이 준 꽃을 강사님에게 다시 선물하기도 했다. “꽃을 받아서 기분 좋아요. 강사님 수고하셨으니깐 드리고 싶어요”라는 말과 함께.

댄스 연습을 하는 한민희 씨.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
댄스 연습을 하는 한민희 씨.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

- 가족 없는 민희 씨, 민들레센터가 ‘연고자’가 되었다

지난 2월 20일 오후 1시 30분경, 갑자기 체험홈 담당자에게 다급한 전화가 왔다. 민희 씨가 이상하다고, 지금 119를 불렀다는 소식이었다. 센터 활동가들도 놀라서 체험홈으로 달려갔다. 체험홈은 센터에서 걸어서 15~20분가량 되는 곳에 있다. 도착하니 119는 “사망한 사람에 대해선 조치해줄 수 있는 게 없다”며 돌아간 상황이었고, 경찰-감식반-형사 순서로 집을 방문했다.

후에 알게 된 정황은 이러했다. 활동지원사는 낮 12시 45분경에 출근을 했고, 민희 씨가 방에서 아무 말도 없길래 자는 줄 알고 깰까 봐 계속 거실에 있었다고 한다. 체험홈 담당자는 오늘 수업이 있는데 민희 씨가 오지 않아 전화를 계속했고, 활동지원사에게도 전화했지만 둘 다 전화를 받지 않아 13시 20분경 체험홈으로 방문했다고 한다. 담당자가 체험홈에 도착했을 때 활동지원사는 거실에 있었고, 민희 씨가 있는 방문을 열려고 하니 잠겨 있었다. 민희 씨가 작은 소리를 잘 듣지 못해서 큰소리로 “민희 씨 일어나세요. 문 좀 열어봐요.”라고 했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119가 도착하기 전 어렵게 방문을 열었지만 민희 씨는 이미 사망한 후였다. 갑작스러운 이별은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

민희 씨는 가족이 없는 ‘무연고자’였다. 그러나 민들레센터 체험홈 거주자여서 ‘장사법 제2조 16호 사목’에 따라 민들레센터는 민희 씨의 ‘연고자’가 될 수 있었고 그의 장례를 치를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22일, 계양청기와 장례식장에 민희 씨 빈소를 마련하고 저녁에는 민들레센터 사람들과 함께 추모제를 열었다. 코로나19로 인해 장례는 2일장으로 진행되었다. 생의 대부분을 장애인거주시설 명심원에서 보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시설에 있는 민희 씨 친구는 단 한 명도 올 수 없었다. 대신 시설에서는 화환과 함께 직원 한 분이 장례식에 참석하셨다. 민희 씨 후견인에 따르면, 돌아오는 월요일에 민희 씨는 시설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그는 그 만남을 무척 기다렸다. 시설 친구들은 민희 씨 삶의 시간 대부분을 함께한 사람들이었으나, 복막투석으로 이동에 제약이 있던 그는 늘 충분한 시간을 친구들과 보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부검 결과, 외력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되며 복막투석시 장기에 물이 차는 현상이 발생하여 신부전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이야길 들었다. 

지난 2월 20일, 민들레센터 체험홈에 살던 한민희 씨가 사망했다. 탈시설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은 때였다. 계양청기와 장례식장에 마련된 한민희 씨 빈소.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
지난 2월 20일, 민들레센터 체험홈에 살던 한민희 씨가 사망했다. 탈시설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은 때였다. 계양청기와 장례식장에 마련된 한민희 씨 빈소.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
 

- 유품은 의료기구가 대부분… 여행 가고 싶어 했던 민희 씨

장례식 이후에도 여러 절차가 남아있었다. 민희 씨의 유품을 정리해야 했다. 유품은 의료용품이 대부분이었고 요리책, 옷 몇 개가 전부였다. 돈을 모으기 위해 딱 필요한 것만 구입해서 지냈던 것 같다.

3월 4일에는 사망신고를 위해 구청에 갔는데 담당자가 처리 방법을 잘 모르고 있었다. 결국 사망신고를 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돌아와야 했다. 다음날인 5일, 사망신고 할 수 있다며 다시 연락이 와서 민희 씨 사망신고를 했다. 장제비 80만 원이 입금되었다. 민희 씨 통장에는 천만 원 넘는 돈이 있었지만 자신의 장례비로는 단 한 푼도 쓸 수 없었다. 국고로 전부 환수된다고 했다. 결국 700만 원가량의 장례식 비용은 소식을 들은 수많은 동지들이 모아주신 돈으로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민희 씨는 여행을 무척 가보고 싶어 하였으나 6시간마다 집에서 복막투석을 해야 했기에 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런 민희 씨에게 복막투석 당사자모임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해볼 계획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2년도 꽉 채우지 못한 민희 씨의 자립생활. 좀 더 일찍 자립했더라면 두려움을 이겨내고 여행 한 번쯤은 훌쩍 떠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더 많은 활동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댄스 연습하던 민희 씨. 댄스 선생님께 꽃을 선물하던 민희 씨. 피자를 좋아하던 민희 씨. 체험홈에서 요리프로그램을 하던 민희 씨. 우쿨렐레를 배우던 민희 씨. 댄스발표회를 앞두고 빨간 꽃을 머리에 꽂고서 함께 사진 찍던 민희 씨. 그리고 종종 옆에 와서 포인트 적립하는 방법을 알려주던 민희 씨. 수많은 민희 씨의 모습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 모습이 여전히 생생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은데, 이젠 만날 수 없다.

봉안당에 모신 한민희 씨 유골함. 옆에는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놓여있다.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
봉안당에 모신 한민희 씨 유골함. 옆에는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놓여있다.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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