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의 비속(卑屬) 살인을 멈추라. 가족을 살인자로 만들지 마라.
장애인 존·비속 살인 사건, 인권과 법의 언어가 필요하다

- ‘광주 발달장애인 가족 죽음’ 청와대 청원, 인권의 관점에서 동의할 수 없는 이유
최근 발달장애인 비속 살인에 대한 세 가지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전남 광주 성인발달장애인 질식사 후 부모 자살 사건, 또 하나는 제주도의 18세 장애학생의 죽음과 부모 자살 사건, 나머지 하나는 자폐성장애 9세 딸 살해 사건에 울산지법이 징역 4년을 선고한 사건이다. 광주의 경우에는 코로나19로 인한 국가 개입의 부재가 부른 범죄임이 분명해 보이고, 제주도 사건은 양육 부담 이외에 다른 원인도 있으리라 여겨지지만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마지막 울산 사건의 경우는 부모 한쪽도 자살을 시도했지만 미수에 그쳐서 처벌을 받은 사건이다.
지난 3일 발생한 광주 사건의 경우, 코로나19로 사회적 지원과 협력이 모두 중단된 나머지 장애인의 돌봄이 모조리 가족에게 전가되어 모두가 최악의 상황에 몰려가는 중에 일어난 것이라 더욱 충격이 크다. 따라서 광주 지역 부모들은 “광주의 발달장애인 부모 일동”이라는 이름으로 참담한 사연을 담아 국가적 지원과 사회적 관심을 촉구하는 청와대 청원까지 제기하였다. 그리고 필자는 ‘청와대 청원 글은 인권의 관점에서 문제가 있다’면서 공식적으로 SNS를 통해 반대했다. 아래는 청와대 청원 글의 일부이다.
| 이어지는 희망 없는 삶을 이어가다 어느 날 엄마는 결정합니다. 발달장애청년과 이사를 하기로... 6월의 어느 날 새벽 발달장애청년과 그 엄마는 차 안에서 연탄가스를 교통편 삼아 그렇게 이 세상과 안녕을 고했습니다. (중략) 저희도 모두 같은 생각을 한 번쯤 했었기에 이 소식을 듣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내 새끼의 숨을 끊고자 연탄을 피우는 상상이 들어 몸서리쳐지게 무섭고 또 무서웠습니다. 차가운 새벽 운전석 뒷자리에서 넘어가는 숨을 부여잡고, 열리지 않는 문을 열려고 애쓰는 내 자녀의 모습이 상상돼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하겠지요, 세상 어느 미친 부모가 제 새끼 숨을 끊고자 하느냐고, 그게 정상적인 사람이냐고. 하지만 그 미친 상상을 수시로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저희입니다. - “발달장애인 청년과 그 엄마의 죽음에 대해 대통령님 응답해주시기 바랍니다” 청와대 청원 글 중에서 (▷바로가기) |
분명히 밝히건대, 필자는 이 청원의 취지나 목적에는 절대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청원을 제기하는 표현 방식과 논리에는 인권의 관점에서 동의할 수 없다. 발달장애인 부모 개인의 절절한 청원이었다면 댓글 한 줄 남기고 찬성하겠으나, 이 글은 ‘발달장애인 부모 일동’이란 집단의 이름으로 작성됐다. 그 ‘일동’의 인권 감수성 제고를 요청한다.
집단의 표현은 다른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준다. 당신들의 위치가, 발언 당사자들로서의 당신들의 힘이 문화적으로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풀어낸 감성적인 표현들은 보다 높은 인권 감수성으로 정제되지 않으면 오히려 차별과 혐오의 인식을 견고하게 하는 반작용이 있다.
장애인의 돌봄에 ‘여성(어머니)’을 강조하는 이유는 온전히 그 여성에게만 덧씌워진 돌봄 문제를 나타내고자 한 것이겠지만, 밖으로 이를 드러냈을 때 오히려 장애인의 돌봄은 당연히 어머니가 지는 것이란 인식을 재생산할 위험이 있다. 부모 개인이 아닌 여럿이 함께 올린 청원이라면, 이런 가부장적 표현에 대해 점검하며 어머니란 이름으로 떠넘겨지는 돌봄의 기울기를 바로잡을 성평등적 표현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 일동 중에 단 한 명이라도 ‘돌봄을 여성에게만 책임지우지 말라, 같은 무게로 사건마다 아버지들은 무엇을 했는가? 다른 가족은 어머니를 방치한 것에 대한 책임은 없는지 살피자’라고 할 수는 없었을까?
부모단체에서만이라도 표현 하나하나에 가부장적인 억압과 표현에 도전하길 기대한다. 그래서 장애인 자녀는 엄마의 “소중한 분신”이 될 수 없으며, 아무리 상황이 어렵더라도 발달장애인의 정신병원 강제입원은 부모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살이 10kg이나 빠지게 간호를 못 한 정신병원의 잘못을 한 번쯤은 언급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 중증장애인에 대한 ‘자비 살인’, 부모의 권력
무엇보다 ‘부모님 고통을 모른다’며 비난이 밀려들 것을 알면서도 이번 청원을 공개 비판한 이유는 바로 “6월의 어느 날 새벽 발달장애청년과 그 엄마는 차 안에서 연탄가스를 교통편 삼아”로 이어지는 묘사 때문이다. 청원을 설득하기 위한 전략이었겠지만 청원에 동참하러 온 장애인 부모는 되레 이 상황에 심리적으로 전염될 위험이 있다. 청원과 관련한 많은 댓글에서 장애인 부모들이 심정적으로 여기에 동일시하는 것은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지점이다. 이런 입장의 동일함은 전염성이 강하다. 해당 사건 기사 댓글만 보아도 이미 많은 발달 장애인 부모님들이 여기에 공감한다고 의견을 달았다. 이것은 무엇에 대한 공감인가? 돌봄 노동의 과중함, 부당함에 대한 공감인가, 아니면 이와 같은 ‘살인의 실행’에 공감한다는 것인가?
공감을 표한 수많은 댓글에 필자는 온갖 비판과 비난에도 시급히 이 글을 쓴다. 이 청원이 이와 같은 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한 것이라면 사람들이 청원 요청 글을 보고 생각으로라도 ‘그런 것을 상상하면 안 되겠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인식이 먼저 들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번 글을 통해 대중은 청원 의도와 달리 발달장애인의 존재 부정의 메시지에 노출된다.

이번 사건은 법적으로 사회적 안전망의 허점으로 촉발된 부모 폭력이며 극단적 장애인 학대 후 부모가 자살한 사건이다. 정책적으로 국가가 방조·방기한 살인 사건이며 정부는 그 살인 사건에서 미필적 종범이다. 역사적으로 일부는 이것을 ‘자비로운 살인(자비 살인, mercy killing)’이라고 부른다. 자비 살인은 중증환자나 중증장애인 등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한 살인 행위를 칭하는데 명백한 범죄로 취급되고 있다.
아무리 부모가 힘들고 고통스럽다 한들, 공동의 이름으로 살의와 살인을 표현하고 집행하는 것을 정서적으로라도 용인하면 안 된다. 상처와 이해라는 이름으로 그러한 행위를 상상하는 것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부모’라는 권력과 관계가 분명 살인을 쉽게 도모할 수 있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부모-자식이란 특수관계이기에 우리는 이 사건을 달리 보아야 하는가? 그런 특수관계가 아니라 제3자였다면 태도와 관점은 달라지는가?
- 사회적 지원이 늘어도 계속되는 장애인 살인,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방법과 다른 길이 있음을 외쳐야 한다. 그러한 살해 행위를 상상으로라도 절대 해서 안 되는 이유는 죽임을 당한 장애인 당사자가 선택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장애인 학대일 뿐이다. 비극과 안타까움의 이름으로 이 폭력과 범죄의 현실을 피해서는 안 된다.
이번 사건을 여전히 안타까운 사건이라고 말하는 언론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온정주의적인 대중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부모단체와 인권단체들이 보다 민감하게 인권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사회적 지원이 많아지고 풍부해지더라도 이런 사건은 늘 반복될 것이다. 실제 1990년대부터 그나마 늘어난 사회적 지원에도 장애인 가족의 존·비속 살인은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이 문제를 복지의 문제로만 환원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2017년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살인죄의 34%가 가족살인이라고 한다. 그중 가족에 의한 장애인의 죽음은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고, 이를 어떠한 정책과 지원으로 막을지 논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 해결과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복지의 관점도 필요하나 범죄로서의 접근과 가족의 정신건강과 성평등, 인권문제로의 접근도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야 복지부뿐만 아니라 법무부도 움직일 것이고 여성가족부도 고민하며 국가인권위원회도 책임을 질 것이다.
"장애인의 비속 살인을 멈추라. 가족을 살인자로 만들지 마라." 인권단체라면 이처럼 얼마든지 다른 언어로 더 강하게 정부를 규탄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더 높은 인권감수성으로 더 많은 대중에게 해결을 위한 강한 정치력과 연대를 끌어낼 수 있다. 대중들이 발달장애인에 대한 높은 인권감수성을 갖추기를 바란다면 부모단체가 이를 이끌어주면 좋지 않겠는가?
이번 사건과 청원을 접한 대중들과 다른 부모들이 장애와 장애인을 고통과 부담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기를, 장애인 당사자들이 살인의 공포에 놓이지 않기를, 가족의 우울 앞에 당사자가 죄책감을 갖지 않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부모의 삶과 장애인 당사자의 삶이 온전히 정서적으로, 감정적으로, 법적으로 개별 주체로 인식되어 지원되고, 발달장애라는 존재 자체가 부정되지 않길 바란다.
필자 같은 사람 한 명 정도는 온전히 피해 장애인 당사자의 편에서 목소리 내는 것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가 과연 부모의 자살을 보고서 ‘죄의 대가를 충분히 치렀으니 용서해 드릴게요’라고 했을까? 혹은 ‘나의 장애로 인해 부모님마저 세상을 등지는구나’라고 죄책감을 느낄까? 한 명 정도는 이름도, 이니셜도, 응당 얻어야 할 피해자의 지위도 없는 그를 위해 이토록 불편한,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 이 글을 남긴다.
두 죽음 모두 애도하지만 위로와 이해로는 이러한 죽음을 막을 수 없다. 누군가는 이 슬픔과 애도의 시간에도 윤리적으로 인간적으로 비판받더라도, 그러한 행위는 상념으로라도 시행하지 말아야 할 범죄라고 이야기해야 한다. 앞으로 국가와 사회 공동체가 이런 범죄를 예방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촉구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