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생활보장 비수급빈곤층 양산 주범 ‘부양의무자기준’
수급자에게 수치심 주는 가족관계 해체 증명… 수급 포기로 이어져

시민사회단체가 오는 8월에 발표될 제2차 기초생활종합계획(2021~2023)에 부양의무자기준 완전 폐지 계획을 밝히고, 이에 따른 특별예산을 편성하라고 촉구했다. 빈곤사회연대는 25일 오전 11시 30분 청와대 사랑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실에 부양의무자기준 완전 폐지에 따른 특별예산 편성 요구안을 전달했다.
- 시기마다 입장 달라진 문재인정부의 부양의무자기준 폐지
문재인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를 약속했다.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는 100대 국정과제에도 담겼다. 지난 2017년 박능후 보건복지부(아래 복지부) 장관은 광화문 농성장을 직접 찾아와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문재인대통령 임기 3년 동안 주거급여에서만 부양의무자기준이 폐지되고, 생계급여와 의료급여에서는 완화 조치만 이뤄졌다. 올해 생계급여에서는 중증장애인이 수급가구에 포함되지 않을 경우에 한해서만 부양의무자 기준을 완화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부양의무자의 재산이 9억 원, 연소득 1억 원 미만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의료급여는 지난 2019년부터 부양의무자가구에 소득 하위 70% 이하 중증장애인이 포함된 경우, 부양의무자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 2022년부터는 여기에 노인을 포함할 예정이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시기마다 입장을 달리했다. 계획대로라면 제2차 기초생활종합계획에 부양의무자 기준 완전 폐지가 담겨야 한다. 박능후 장관은 지난 2019년 4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를 공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에는 ‘복지 위기가구 발굴대책 보완조치’에서 제2차 기초생활종합계획에 ‘생계급여 단계적 폐지’ 계획을 담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최초 계획에서 매우 후퇴한 내용이다.
정성철 빈곤사회연대 활동가는 “정부의 발표는 관악구 탈북모자 사망 사건, 강서구 가족 사망 사건의 대책이라는 점에서 매우 기만적이다”라며 “이후 청와대는 질의서 답변에서 부양의무자기준 폐지의 ‘사회적 합의’를 운운했다. 정부가 빈곤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해결의지가 없음을 표명한 것과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 수급자에게 수치심 주는 가족관계 해체 증명… 수급 포기로 이어져
제도의 취지에서 볼 때 부양의무자기준 폐지의 타당성은 충분하다. 박영아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부양의무자기준이 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의 비수급빈곤층이라는 사각지대를 형성하는 주요한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박 변호사는 “부양의무자기준의 핵심은 다른 가구에 속한 가구원의 수급자격을 따지고 부양의무자의 재산과 소득이 일정 규모 이상이면 재산과 소득을 향유할 잠재적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요건으로 한다”며 “따라서 이러한 부양의무자와 그러한 재산과 소득을 향유할 잠재적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증명해야 하는 부담을 준다. 당장 생계가 급한 사람들은 증명책임의 부담으로 권리행사를 포기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부양의무자기준에 따른 가족관계 해체 소명은 수급신청자에게 수치심을 준다. 한 여성 홈리스는 10대에 가출해 20대를 거리에서 보냈다. 생계가 너무 힘든 나머지 쪽방에 겨우 주소지를 만들어 수급신청을 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오래전 재가한 어머니와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다. 그러나 부양의무자기준으로 수급자가 되지 못 했다. 3개월 동안 어머니 집에서 살았다는 게 이유였다. 노숙인자활시설에서 살았던 이력을 내밀었지만, 행정기관은 가족관계 단절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안형진 홈리스행동 상임활동가는 “행정기관에서는 왜 이 여성이 어머니 집에서 3개월밖에 살지 못 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영화관, 찜질방, PC방을 전전하며 살았지만 가족관계 단절이 거짓말이라고 했다”라며 “부양의무자기준은 빈곤을 가족의 책임으로 떠넘기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 여성 홈리스처럼 가족 중에서도 취약한 개인의 몫으로 돌아온다. (정부는) 가장 취약하고 착취적 관계에 놓인 사람에게 사회적 합의를 운운하지 말라”고 비판했다.

- “가족을 보지 말고, 나를 보라” 촉구
이미 중증장애인 수급자 가구에 부양의무자기준이 폐지되었지만, 장애인들에게 피부로 와닿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지호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권익옹호활동가는 지난 3월 생계급여를 신청했지만, 행정기관은 코로나19를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며 수급자로 선정하지 않았다. 기자회견을 열어 부당함을 밝히겠다고 하자 그제야 ‘특례적용’을 해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엄연히 제도 개선에 따른 권리행사임에도 특례적용이라는 말로 시혜성을 강조한 것이다.
박지호 활동가는 “복지부는 부양의무자 기준 완화로 ‘소득이 적어 생계급여를 받지 못한 중증장애인 2만여 가구’가 혜택을 본다고 했으나, 나와 같이 적용받지 못한 장애인이 많다”며 “올해 1월부터 도대체 몇 명의 중증장애인이 부양의무제에서 해방되었는지 묻고 싶다”고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그는 정부를 향해 “가족을 보지 말고 나, 박지호를 봐달라”고 거듭 촉구했다.
이 밖에도 정기적으로 병원을 찾아야 하는 장애인의 경우 의료급여 수급이 무엇보다 중요하나, 정부는 지난 9월 제2차 기초생활종합계획의 의료급여에서 부양의무자기준 폐지가 아닌, 완화를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최용기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은 “자립생활센터 소장이지만 급여를 받지 않는다. 마약성 약을 먹지 않으면 힘들어서 살 수 없고, 욕창으로 의료기관을 자주 찾아야 하기 때문에 수급권을 포기할 수 없다”며 “많은 장애인들이 나처럼 의료급여에서 탈락할까 봐 일을 하려고 해도 망설이는 것이 현실이다. 생계급여와 의료급여 기준에 미달해 사각지대에서 죽는 사람들이 없도록, 장애인도 인간답게 살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부양의무자기준 폐지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