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치의 상상력』, 안희제
- “기억하고 있는지, 한 번 춰 볼까요?”
당신은 내게 물었어요. “기억하고 있는지, 한 번 춰 볼까요?” 탱고를 배우다가 몸 상태 때문에 3개월 만에 그만둬야 했다는 나의 말을 당신은 잊지 않았던 거지요. 당신이 내민 손을 망설임 없이 잡자 일순 몸이 아파왔습니다. 통증과는 다른 아픔이었어요. 몸 전체가 반응했던 건 경계가 허물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몸, 경계선의 몸. 그 몸이 바람처럼 기울어 당신이 움직이는 쪽으로 미끄러졌을 때, 나는 가슴뼈 안쪽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어요. 긴 세월 통증을 그렇게도 깊게 느꼈던 까닭은 통증의 깊음만이 아니라 내 몸의 깊음 때문이기도 했음을 처음으로 깨달았던 날이었어요.
어릴 적 나는 춤추는 걸 몹시 좋아하는 아이였어요. 그렇다고 춤에 남다른 소질이 있는 건 아니었고, 어떤 음악이든지 흘러나오기만 하면 흥에 겨워 내키는 대로 사방팔방 손발을 움직이기 바빴어요. 눈에 띄게 활기차고 언제나 반장 자리를 꿰찼던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운동장 한가운데 자리한 구령대 위로 불쑥 올라가 체조나 댄스 스포츠 시범을 보였답니다. 나의 엉성하고 삐걱거리는 몸짓은 친구들의 재미난 이야깃거리였어요. 고학년에 접어들수록 춤을 향한 열정은 배가되어 누가 배를 움키고 웃건 말건 씩씩하게 학예회 무대를 선점했지요.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쇼팽의 선율에 기대어 어머니의 몸은 아름다운 곡선을 만들었어요. 무용을 하셨던 어머니는 삭힌 흐느낌들을 손끝으로 흘려보내곤 하셨는데, 말수가 적은 분이셨으나 춤을 추는 시간만큼은 언제나 많은 말들을 하고 계셨어요. 어머니의 손발과 표정 위를 어른거리는 감정들을 빨려 들어갈 듯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혀 눈두덩을 누르던 순간들이 있었어요. 내가 춤을 사랑했던 건 순전히 어머니의 몸짓 하나하나를 향한 동경 때문이었습니다. 18년 전 어머니를 따라서 췄던 춤동작이 아직도 기억나요. 애써 떠올리지 않아도 첫발을 떼면 주루룩, 자전거 바퀴처럼 굴러 나오는 동작들이에요.
나의 친구 희제는 버스에 올라 봉 모양의 손잡이를 잡기만 해도 배드민턴 그립을 쥐는 느낌이 살아난다고 해요. 그의 손바닥 안에는 ‘하루 세 시간씩 학교 체육관에서 친구들과 배드민턴을 치던’ 고등학교 시절이 간직되어 있는 거예요.
“배드민턴은 나의 몸에 너무나 깊이 각인되어 있어서 여전히 무언가를 손에 쥘 때 내 엄지는 중지와 검지 사이에 있다.”
당신에게 희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그의 몸에 서려 있는 기억과 그의 몸이 세상을 향해 던진 물음들을요. 크론병을 진단받기 전, 희제의 몸은 배드민턴과 아주 밀접한 사이였어요. 아마추어 배드민턴 선수로 서울시 대표까지 할 만큼 뛰어난 실력과 체력을 겸비한 학생이었죠. 그는 그때의 몸을 가볍고 빠른 셔틀콕에 비유했어요.
염증과 통증에 시달리는 현재의 몸과는 다른, 아무리 먹어도 탈이 나지 않고 땀이 뒤범벅이 될 만큼 운동을 해도 지치지 않았던 그때의 몸. 지금과 완연히 다른 그 몸을 떠올리는 건 희제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그의 몸이 바로 기억의 창고니까. 그의 몸은 잃어버린 삶의 반경을 따뜻한 꿈처럼 생생히 품고 있어요. 그는 거울 앞에 서서 아프기 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봐요.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거울을 봐도, 몸을 만져 봐도 크게 달라진 건 없다. …거울 속 변함없는 내 모습이 내가 내 몸에 대한 이미지를 제대로 갱신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변함없는 겉모습으로 인해 그는 많은 오해를 사야 했어요. ‘겉보기에 멀쩡한데’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시선은 뾰족한 화살이 되어 희제의 몸을 겨눴어요. 그가 만성질환자이기는 하지만 언제나 아픈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암묵적으로든지 직접적으로든지 그에게 요구했던 거예요. 아파 보이는 모습과 진단명에 합당한 증상들을요. 그 시선들은 그의 몸에 고스란히 축적되어 급기야는 아무도 병에 관해 묻지 않는 자리에서조차, 그는 아파 보이지 않는 자신의 몸을 설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짓눌리기에 이르렀어요. 사람들이 장애라는 단어에 부여한 고정관념과 난치질환에 입힌 연약하기만 한 외양을 깨기 위해서 그가 할 수 있었던 건 ‘그게 아니라…’라는 말로 시작되는 해명과도 같은 호소뿐이었어요. 어떤 상황이든 몸을 정당화하는 건 늘 그의 몫이었습니다.
“20대 초반 한창 입대하는 친구들이 많았던 시기에는 부러워하는 친구들도 여럿 있었다. ‘겉보기에 멀쩡한데’ 군대는 안 가니까.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상황을 어떻게든 설명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다. 아파서 결석한 수업의 교수님께 메일을 쓰듯이 나는 병의 원인과 증상부터 지금 상태까지 의료 기록을 읊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항상 고민했다. 나는 왜 그렇게 구구절절 설명을 덧붙였을까?”
사람들은 곧잘 그의 몸을 정상과 비정상, 장애와 비장애 사이에서 저울질했어요. 그 저울질 사이에서 신음하고 있는 그의 목소리가 책장 너머로 들려오는 듯했어요.
“나는 장애와 비장애 사이에서 줄을 타는 것만 같은 느낌을 자주 받았다. …장애인 공동체에서는 나를 시혜적인 봉사 정신으로 무장한 열혈 비장애인으로 오해하곤 했고, 비장애인 공동체에서는 나를 어딘가 불편하고 걸리적거리는 존재로 여기곤 했다.”
“세상과 주변인들뿐 아니라 나에게도 내 몸은 잘못이었다. 그래서 어딘가 심각하고 불행해 보이는 말을 꼭 덧붙이며, ‘멀쩡해 보이는’ 나도 사실은 아픈 사람이라고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픈 나는 죄인이었고, 안 아파 보이는 나도 죄인이었다.”
- 당신은 상상할 수 있나요, 나의 일상을
근육병이 내게 찾아온 이후, 목보호대 없이는 책을 읽을 수도, 강의를 들을 수도 없는 몇 년을 보냈어요. 고개를 똑바로 지탱할 수 없기 때문에요. 요즘도 그래요. 긴 시간 앉아있거나 며칠 무리해서 원고 작업을 하고 나면 상체 축이 무너지고 허리가 구부정해져요. 올해 초 용기를 내어 탱고 레슨을 등록한 뒤 처음 맞닥뜨린 장벽은 높은 구두였는데요. 한 발만 떼도 휘청거리는 몸은 스텝 사이에서 균형을 잃고 모래성처럼 부스러졌어요. 컨디션이 좋은 날을 제외하고는 바를 움켜잡고 고개를 바로 세우기 위해 갖은 몸부림을 쳐 봐도 시선이 금세 아래로 흘러내렸지요. 갈수록 떨어지는 기억력 탓에 바로 좀 전에 배운 동작도 잊어버리는 내가 여러 사람들이 함께 하는 레슨에 방해가 되는 건 어쩌면 당연했어요. 여러 차례 레슨 선생님에게 사과를 건네야 했지만 그래도 포기하고 싶진 않았어요. 떨리는 다리로 더듬더듬 움직였어요. 찰나라도 좋았습니다. 내가 춤을 추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싶었어요.
탱고를 배운 지 3개월에 접어들 무렵, 레슨 선생님과 충돌이 있었어요. 집에서 레슨실까지 이동시간을 잘 계산하지 못 하는 바람에 그날을 포함해 서너 번 정도 일찍 레슨실에 도착했는데, 선생님은 그걸 탐탁지 않게 여겼어요. 몇 분 미리 가 있는 게 뭐가 문제인지를 묻는 내게 그녀는 위계질서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더니 이내 물었어요. 수영 씨, 아파서 사회생활 안 해봤죠? 나는 할 말을 잃고 아연해졌어요. 그녀는 레슨을 하는 동안 자신이 편의를 봐준 걸 고맙게 생각하라고 했어요. 그러고는 덧붙이기를, 나가 달라고, 다시는 여기 오지 말라고 했죠.
당신은 혹시 상상할 수 있나요. 편의라는 단어 안에 실린 폭력성에 대하여. 그 순간, 나로서는 무언가 논박하고 싶은 심정으로 줄줄이 어떤 말들을 늘어놨지만 여지없이 발음이 새 나갔어요. 복부의 통증으로 새벽 내내 한숨도 못 잔 날이었어요. 내뱉었던 말의 절반이라도 그녀가 알아들었다면 다행이었을 텐데요. 그녀는 그저 냉소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어눌한 말투는 언제나 무시와 조롱의 이유가 됐어요. 당신은 상상할 수 있나요. 허무한 마음을. 이제 언제 다시 춤을 출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 라며 못내 서성거리던 혼잣말을. 쫓기듯 나오느라 가방 안에 미처 담지도 못한 베이지색 구두가 손끝에서 창백하게 흔들리던 장면을.
나도 가끔은 희제처럼 아프기 전의 나와 마주칠 때가 있어요. 한강 공원을 대략 한 시간 정도 빠르게 돌고 난 뒤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집으로 돌아오면, 거울 속에는 뜨거운 볕 아래 손차양을 하며 초등학교 운동장을 뛰놀던 불그죽죽한 얼굴의 어린 내가 서 있는 거예요.
희제는 자신을 빗대어 ‘아픈 청춘’이 아니라 ‘앞은 청춘’이라고 말해요. 대충 보기에는 아무 문제없고 괜찮아 보이지만 사랑의 신열이 아니라 통증으로 밤낮없이 뒤척이는 몸. 젊고 건강한 청춘들과 다름없어 보이지만 언제 어떻게 아플지 몰라 사소한 여행 계획조차 세울 수 없는 몸.
- 당신이 나를 안으면, 우리는 춤을 출 거예요
“나의 몸은 아무도 해치지 않았다.”
‘수없이 몸에 굴복하고, 애원하다가 반격하면서, 또 쓰러지는’ 시간이 지속됐어요. 일상의 투쟁을 이어가는 동안 희제는 최소한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받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 같아요. 이 책은 그가 자신의 언어습관이나 자기 내부에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를 잘못된 판단들을 낱낱이 검열하며 의도치 않게 누군가를 다치게 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구석구석 다듬어간 과정의 기록이기도 해요. 그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아픈 몸을 향한 은밀한 의심과 편견 어린 시선이 얼마나 쉽게 한 사람의 삶을 좌절시킬 수 있는가를 세밀하게 써 내려갔습니다.
희제의 책을 받아들었던 오후, 내가 그의 책을 읽지 않고 얼마간 만지고만 있었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어요. 나는 그 책을 쓰다듬어주고 싶었어요.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충만한, 누구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온몸을 옹송그렸을 이 친구의 고된 시간을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희제의 문장들은 고통 안에서의 연대가 필히 의존을 수반하는 일임을 가르쳐줘요. 의존은 연약한 개념이 아니지요. 어떤 몸이든 다른 몸의 힘을 빌려 살아가게 마련이에요. 난치의 상상력은 ‘질병을 삶의 조건이 아닌 소외의 조건으로 만든’ 사회의 전복을 꾀하는, 조금 더 나은 세상과 타인을 향한 빛나는 상상력이에요. 인간은 서로의 안팎을 채워주고, 가슴을 맞대어 서로의 고통에 몰입하고, 안아주고 안기면서 살아가야 해요. 일체감을 느끼며. 마치 탱고를 추는 순간처럼 말입니다.
길눈이 어두운 나는 같은 경로도 몇 번이고 다녀야 익숙해져요.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할 때는 곧잘 목적지가 아닌 엉뚱한 곳에 내리기도 하고요. 당신을 두 번째 만났던 날도 역 근처를 조금 헤맸어요. 그러다 당신을 만났고 당신과 함께 걷듯이 춤을 췄어요. 스텝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지만 상관없었어요. 그 순간 내가 잊어버렸다고 느낀 건 스텝이 아니라 경계선이었어요. 희제는 어떤 기준이나 공동체에도 속할 수 없었던 자신의 ‘애매한’ 위치를 묘사하며 경계 밖으로 밀려났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나도 그랬지요. 어떻게 해야 소속감을 느낄 수 있을지, 아주 잠시라도 사람들의 온기를 내 안으로 들일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며 살아왔어요. 당신이 나의 오른팔을 끌어당긴 순간, 내게로 닿아 왔던 동사들은 이런 것들이었어요. 나타나다, 좁히다, 포개다, 받아들이다, 사랑하다, 넘치다……. 물론 그 근처에는 부딪히다, 어긋나다, 엉키다로 이루어진 감각들도 있었지만. 중요한 건 두 몸이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다는 사실이었어요.
언젠가 당신을 다시 만나면 그날도 춤을 추고 싶어요. 내가 먼저 다가가 두 팔을 뻗고 싶어요. 힘이 빠진 내 몸이 이윽고 중심을 잃고 무너져 내려도, 당신의 품이 나를 받아 안아줄 것을 믿으며. 당신의 몸의 기억이 나를 덮어줄 것을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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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_ 홍수영. 기다리고, 듣고, 느리게 대답하는 사람. 약을 복용하면 근육의 수축과 떨림이 경감되는 ‘경증’의 근육병 환자로 살고 있다. 근육을 쥐어짜는 통증과 휴지기가 반복적으로 오기 때문에 몸 상태가 급작스럽게 바뀌며, 하루에도 몇 번씩 다른 몸과 만난다. 사랑을 주장하는 곳에 있는 배제, 다양성을 외치는 곳에 있는 선긋기를 마주하는 순간들을 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