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학에서는 장애를 개인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로 봐
어떤 사회이냐에 따라 장애인 정의 달라져

편집국회의에서 장애인운동 담론을 기획물로 다뤄보자는 아이디어가 거론되고 있을 때 설마 내가 장애학을 맡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장애인운동 판, 소위 '장판'에 들어온 지 이제 7개월. 지난 해 가을에 장애해방학교를 수강한 게 전부인, 그것도 저질체력으로 후반부엔 거의 강의를 듣지 못한 초보 기자가, 듣기에도 어마어마한 장애학 담론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두둥~ 장애학 담론 기사를 맡게 되었다. 하늘이 깜깜해오고 숨이 턱턱 막혔다. 장애해방학교 교재였던 김도현 님이 쓴 장애학 함께 읽기를 다시 읽자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제목을 '장애학 톺아보기'로 정한 것은 '장애학'이란 학문을 기자와 독자가 함께 공부해나가고 싶다는 바람을 담은 것이다. '톺다'는 뜻은 '힘들여 더듬다'는 뜻의 순 우리말이다

 

 

뭔 사설이 이렇게 기냐고? '기사 못 쓴다'는 욕을 조금이라도 덜 먹으려고 꼼수 부리는 것 아니냐고? 여러분 말이 맞다. 아는 게 없는 사람이 장애학 담론에 관한 기사를 써야 한다니, 무섭다. 사실 장애학에 대해 깊이 있는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려면 장애학을 연구한 학자의 기고를 받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기자가 연재를 하는 것은, '장애학은 이런 것이다'라는 정제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신 독자와 '장애학'을 함께 알아나가는 데 더 의미를 두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꼼수만은 아니고 여러분과 함께 장애학을 같이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글을 써나가겠다는 것을 미리 밝히는 바다.

 

그래서 제목도 [초보 박기자와 좌충우돌 장애학 톺아보기]로 정했다. '톺다'는 순 우리말로 '가파른 곳을 오르려고 매우 힘들여 더듬다', '틈이 있는 곳마다 모조리 더듬어 뒤지면서 찾다'라는 뜻이다. 장애인 문제에 아직 많이 서툰 초보기자가 여러분과 함께 '장애학'이라는 고개를 함께 더듬고 뒤지고 깨져보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며 공부해나가면, 장애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깨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제목에 담았다. 글을 읽으면서 혹시 기자의 실수를 발견한다면 댓글로 과감하게 지적해주고 함께 토론해보아도 좋겠다.

 

일단 앞으로 연재되는 내용은 대부분 김도현 님의 장애학 함께 읽기당신은 장애를 아는가라는 책을 토대로 전개해 나갈 것임을 밝혀두는 바다.

 

▲국립중앙박물관 수화도슨트 정순희씨가 청각장애인들에게 전시회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 그럼 일단 장애학이 뭔지부터 알아야 하는 것이 순서일 터. 일단 인터넷 포털사이트 사전 검색창에서 '장애학'을 쳐보니 검색결과가 없다고 나온다. 장애학이라는 학문은 사전에도 등록되지 않은, 아직 한국에서는 공식화된 학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장애학'이란 독자적인 학문은 없었지만, 장애를 주제로 한 연구들은 많이 있었다. 기존의 사회복지학, 재활학, 의학 등에서 장애는 빈번하게 다루어져 왔다. 그렇다면 장애학이란 장애를 주제로 한 연구들의 모음일까? 그런데 모아놓기만 한다고 하나의 '()'이 성립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학과 기존의 '장애'에 관한 연구들에 대한 차이부터 일단 짚고 넘어가 보자.

 

 

'장애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장애를 개인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문제로 보는 것이다. 자 여기에 밑줄을 팍팍 그어보자. 뭔가 그럴듯해 보이기도 하고 알쏭달쏭해 보이기도 한 이 문장. 일단 이 문장만 알면 오늘의 숙제는 해결된 셈이다.

 

이 얘기를 하기 전에 다른 얘기부터 살짝 해보자. 얼마 전 기자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하는 수화통역사를 취재했다. 박물관으로는 유일하게 전시 내용을 수화로 설명해준다기에 한국농아대학생연합회 소속 청각장애인들과 함께 잉카전을 구경하러 갔었다. 수화통역사 분이 수화로 열심히 잉카 유물들을 설명해주고 기자는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수화통역사의 얘기를 알아들을 수 없기에 음성안내기를 빌려 들어갔으나 사진을 찍느라 음성안내를 들으며 수화통역사의 수화를 따라갈 여유가 없었다. 통 알아듣지 못한 채 한 시간 넘게 그들을 졸졸 쫓아만 다녔다. 고작 한 시간 정도였을 뿐인데, 그들이 웃을 때 같이 웃을 수 없고 그들이 의사소통 할 때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소외감이 들었다. 나만 세상에서 멀리 밀려나는 느낌. 그래 평소에 청각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이야기할 때 이런 느낌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몸으로 확 느껴졌다. 반면 그 한 시간여 동안 청각장애인들은 자신의 장애 때문에 불편하지도 소외감을 느끼지도 않았을 것이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

 

여기서 장애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라는 위의 얘기를 다시 상기해보자. 시각장애인들이 언제 어디서나 점자나 음성지원 같은 편의를 받고, 청각장애인들이 어딜 가나 수화통역이 이뤄진다면, 그리고 지체장애인이 마음껏 이동할 수 있게 저상버스가 충분히 다니고 활동보조인서비스가 24시간 지원된다면, 그들은 장애를 장애로 인식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마치 외국의 대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들이 한국어를 못하는 것을 장애로 인식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장애학을 이른바 사회-정치적 장애이론이라고 말한다. 이 점이 장애를 개인의 문제로 보는 기존의 의학·재활학·심리학·사회복지학·특수교육학과 장애학의 가장 큰 차이이다.

 

여기서 또 사회적이라는 것의 의미를 잠깐 짚고 가자. 좀 어려운 이야기일 수도 있으니 머리아픈 분들은 그냥 넘어가도 된다. 사실 기자도 짧은 지식으로 이 부분을 이야기하자니 좀 거시기하다. 이 세상이 구성됨에 있어 물질이 우선이냐 의식이 우선이냐에 따라 유물론과 관념론으로 나뉜다. 이 유물론은 다시 기계적 유물론과 역사 유물론 등으로 나뉘고 이걸 제대로 설명하려면 철학의 역사를 다 알아야 하므로 넘어가고. 그냥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철학 개념에서 물질이란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물질과 구분된다. 철학에서의 물질이란 의식 밖에서 독립해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로 자연·신체·사회적 관계 등이다. 유물론은 이러한 물질을 일차적인 것으로 본다. 물질은 감각 ·관념 ·의식의 근원이며 의식은 이차적이고 파생적인 것으로 본다. 이 유물론 중에서 사회적 장애이론의 토대는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이며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에서 물질이란 사회적 관계를 의미한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질을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말했는데, 각 시대 인간의 본질은 그 시대의 사회적 관계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설사 영구불변하는 인간의 본질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더라도 이러한 본질 규정은 구체적인 현실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먹고사는 방식 즉 생산방식이 달라지면 삶의 방식도 달라지며, 삶의 방식이 달라지게 되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도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장애학에서 장애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 즉 사회적 억압에 의해 장애가 규정된다고 본다. 사진은 2009년 7월 인천 계양구 둑실동 장애인 시설반대 결의대회 때 퍼포먼스.

 

 

뭔 이야기인지 어렵다면 잠깐 예를 들어보자. 3백 년 전 서구에서는 대다수 사람들이 여전히 땅을 일구고 살면서, 수 세기 동안 변하지 않은 기술을 가지고 식량을 생산했다. 그들의 생각의 범위는 그 지역 촌락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그들의 관념은 그 지역 교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대다수는 읽거나 쓸 필요가 없었고 배우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2백 년 전쯤에야 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수만 명이 공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생활이 철저하게 탈바꿈한다. 이제 그들은 조그만 촌락이 아니라 대도시에 살게 되었고, 글을 읽거나 쓸 줄 아는 것을 포함해 그들의 선조들이 꿈도 꾸지 못했던 기술들을 배워야 했다. 또 철도와 증기선의 발명으로 지구의 반을 횡단하며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성직자들이 머리에 주입한 고리타분한 관념들은 더 이상 어울리지 않았다. 생산에서 물질적 혁명이 생활양식과 관념에서도 혁명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생산하는 방식, 함께 일하는 방식이 바뀌면 사회가 조직되는 방식, 사회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도 바뀌게 된다. 이것이 물질이 의식에 선행한다는 이야기이며, 사회적 관계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을 사회적 장애이론에 접목시키면 결국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이냐에 따라 장애인을 규정하는 정의가 달라지며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어렵다고? 그렇다면 뒤의 마르크스 얘기는 제쳐놓고 일단 오늘은 하나만 기억하자. '장애학은 장애를 개인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문제, 사회의 억압문제로 본다'. 다음 편에는 '장애'에 대한 여러 정의에 대해 살펴볼 예정이다. 이 기사에 대한 독자 여러분들의 아낌없는 격려와 지적질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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