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아플 시간
‘질병권(疾病權)’은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중 조한진희의 글1)에서 처음 등장하고, 이는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동녘, 2019)로 이어진다. 기본적으로는 문자 그대로 ‘아플 권리’를 의미한다. 단순해 보이지만 자연스럽게 이해되지는 않는 단어다.
우선은 조금 더 익숙한 ‘건강권’부터 생각해보자. ‘건강권’은 건강할 권리라는 뜻인데, 사람이 모두 당연히 건강하다면 건강‘할’ 권리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건강권은 지금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 건강해질 권리와 지금 건강한 사람이 앞으로도 건강할 권리를 포함한다. 즉 건강의 성취와 유지를 위한 권리가 건강권이다. 여기서 ‘건강’을 ‘질병’으로 바꿔 보자. 그러면 질병권은 ‘질병의 성취와 유지를 위한 권리’가 되는데, 이것이 적절할까?
질병권이 처음 다루어진 원문의 맥락을 보면, 질병은 사람의 몸을 해치는 노동조건의 결과물로 등장한다. “아플 권리도, 아프지 않을 권리도 없는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원문이 강조하는 것은 노동조건의 개선과 더불어 성차별과 페미사이드(femicide)를 포함하는 혐오범죄가 없는 사회 환경의 구성이다.2)
“아픈 사람도 원하면 적정한 시간과 강도로 노동할 수 있는 권리를 원한다. 적절하게 아플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 버스 정류장 가로수의 싹이 움트는 모습을 음미할 수 있고, 퇴근 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고요 속에서 온전히 휴식을 취해도 불안하지 않기를 원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아플 수 있는 권리를 원한다. 질병권을 허하라!”3)
이어지는 선언에는 질병권이 실현되는 구체적인 모습들이 열거되어 있다. 나는 여기서 ‘시간’에 주목한다. 발열, 콧물, 설사, 기침과 같은 증상은 몸이 가진 면역력이 나쁜 균을 몸에서 몰아는 데 필요한 과정이지만, 우리는 종종 그러한 증상들이 일상에 불편하고 아프다는 이유로 약을 먹어서 바로 가라앉히려고 한다. 조한진희는 그 원인을 건강과 능력을 동일시하는 사회에서 찾는다. 그는 건강이 곧 능력인 사회에서 어떤 아픔이든 바로 제거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 ‘조급한 환자들’을 보며, 감기에 걸렸을 때 병원에 가기보다 집에서 쉬는 게 더 흔한 풍경이었던 어린 시절의 ‘아플 시간’을 떠올린다.4)
그렇다면 몸이 아플 시간은 어떻게 몸이 아플 권리로 이어지는가? 아픈 사람에게 아플 시간이 없다면 아픔은 사회적으로 드러날 수 없고, 말해질 수 없고, 고려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플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사회에서 아픈 몸은 일터나 지역사회가 아닌 집이나 병원에만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아플 권리는 아플 시간의 보장 혹은 요구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이때 ‘아플 시간’은 앨리슨 케이퍼가 언급하는 ‘불구의 시간(crip time)’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불구의 시간은 “장애와 관련된 사건들이 항상 늦게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장애인들이 어디에든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을 이야기하는데, 케이퍼는 불구의 시간이 단지 “확장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폭발해버린” 시간이라고 말한다. 불구의 시간은 그저 ‘더 많은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시간이나 ‘제때’의 개념이 어떤 몸을 전제하고 있는지 따져 물음으로써 시간 자체를 재고하게 만든다는 것이다.5)
이러한 맥락에서, 충분한 아플 시간과 쉴 시간을 보장해 달라는 요구, 즉 질병권의 요구는 기존에 일터의 몸이 어떤 방식으로만 상상되었는지 지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건강이 노동의 자격으로 규정되는 사회에서 건강한 몸은 어떤 몸인가?’라는 물음인 동시에, 누구나 노동할 수 있는 사회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여기서 노동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조건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질병권은 아픈 사람의 성원권이다.
때로 질병을 정체성으로 수용한다고 이야기할 때 완치할 방법이 생긴다면 그것을 거절하겠냐고 묻거나, 질병이나 통증을 긍정할 수 있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이 물음들이 질병을 치료 대상으로만 전제하기에 문제라고 지적하기는 쉽다. 나에게 어려운 건 실제로 질병이 나를 힘들게 하는 기억들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의 문제였다. ‘아플 시간’을 생각하면서, 나는 질병이 바랄 만한 것인지, 긍정할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하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질병을 직면할 기회라고 생각하게 됐다. 질병을 직면할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아플 시간이다.
그래서 나는 질병권을 아픈 사람의 성원권이자, 아픈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직면할 기회 혹은 그 기회를 주장하는 권리라고 정의한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완치를 생각하기 전에, 지금 당장 자신이 살아가는 몸에 대한 존중, 그리고 자신의 몸을 충분히 느낄 시간을 위한 권리.
미래를 위한 현재가 아닌, 현재를 위한 미래
요컨대, 건강권이 아직 없거나 언제나 잃을 수 있는, 따라서 계속해서 (신년 계획 같은) ‘목표’로 설정되는 건강을 위한 권리, 즉 미래를 위한 권리라면 질병권은 지금 당장 내 몸과 함께 살아갈 때 필요한 권리, 즉 현재를 위한 권리다. 그렇게 현재를 직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질병과 통증이 긍정되고 정체성으로 수용될 수 있는지 고민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질병권은 건강권의 ‘건강’을 단지 ‘질병’으로 바꾼, 건강권의 대칭으로서의 ‘질병의 성취와 유지’를 위한 권리가 아니라, 질병이 “죽음이 아닌 삶의 조건”6)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권리일 것이다. 조한진희는 최근 한국문화인류학회의 발표에서 질병권이 “건강권을 포함하지만 초점이 다르고 좀 더 확장된 개념”이라고 언급하며, “질병을 중심에 배치하고, 아픈 몸을 사회의 기본 몸으로 설정하며, 질병을 겪는 상태도 삶의 ‘정상적’ 시기로”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7) 즉, 건강권과 질병권은 초점이 다르다.
이처럼 ‘현재’를 중심으로 두는 질병권은 비단 정체성으로서의 질병을 상상할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지금 우리가 마주한 코로나19라는 현재를 잘 겪어내는 데에도 하나의 중요한 열쇳말이 될 수 있다.
나는 코로나19와 이를 둘러싼 사회의 모습을 ‘참사’로 규정하면서, 모두가 살아남으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건강이 아닌 난치를 새로운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8) 코로나19의 확산은 자본주의와 산업화를 중심으로 복잡하게 얽힌 현대 사회의 위험들이 사회의 주변부에서부터 현실화된 하나의 참사이며, 그 속에서 드러난 건 건강한 사람만을 시민으로 상상하는 사회에서는 건강한 사람조차 좋은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한편, 내가 인터뷰한 어느 아픈 사람은 코로나19 때문에 건강한 사람들이 위험해지니 그제야 아픈 사람들에게 항상 필요했던 편의가 실현되고 있다며 아픈 사람들에게 성원권이 없었던 현실을 지적하기도 했다. 나는 이에 공감하면서, 동시에 바로 이러한 상황이 낫지 않는 아픈 사람들의 몸으로 코로나라는 현재를 살아내기 위한 질병권에 더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질병과 함께 살고 싶은지의 여부는 개개인의 맥락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질병과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이 이미 도래한 현실이다.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의 특징 중 하나로 치료될 수 없는 만성질환의 극적인 증가를 꼽는다.9) 질병권은 그러한 현실에서 지금 당장 사람들이 살아가는 환경을 바꾸어 위험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한 도구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손에 잡히지 않는 ‘건강’ 대신 명백히 느껴지는 아픈 몸이라는 현재를 통해 미래를 계획하고 건설해 나가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건강중심주의는 언제나 건강을 잃을 수 있는 위험사회, 그리고 좋은 삶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정의된 ‘건강’을 모두의 몸에 기입하려는 생명정치의 결합이다. 건강중심주의는 건강한 사람을 살게 하고, 아픈 사람을 치료하려 하며, 치료되지 않는 사람에게서는 좋은 삶의 기회를 빼앗는다. 건강권과 질병권은 모두 누구나 좋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전제한다는 점에서 같지만, 건강권이 ‘건강’과 ‘좋은 삶’을 누릴 기회의 분배에 집중한다면 질병권은 지금 정의된 ‘건강’과 ‘좋은 삶’이라는 개념 자체를 따져 물으며, 더 많은 사람이 좋은 삶을 누리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들을 고민한다.
질병권은 치료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치료와 더불어 치료 바깥의 삶을 상상함으로써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기획한다. 그러므로 질병권은 단순히 건강권의 ‘건강’을 ‘질병’으로 바꾼 것이 아니며, 건강권과 반대되는 개념도 아니다. 질병권과 건강권은 서로 보완하며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지금보다 나은 삶을 누리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한다. 더 많은 아픈 몸의 이야기가 세상에 나와서 질병권이 실현되는 더욱 구체적인 장면들을 함께 그려볼 수 있게 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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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플 권리를 보장하라: 질병권을 말하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2016.10.12
2) 조한진희,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동녘, 2019, 331~332쪽
3) 조한진희, 같은 책, 332쪽
4) 조한진희, 같은 책, 325~326쪽
5) Alison Kafer, Feminist, Queer, Crip.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2013, pp. 26~27
6) 안희제, 『난치의 상상력』, 동녘, 2020, 210쪽
7) 조한진희, “우리 시대 건강권을 넘어, 질병권(疾病權)을 제안하다 - 질병권을 통한 상상력”, 《2020 한국문화인류학회 추계 학술대회 자료집》, 173쪽
8) 안희제, 앞의 책, 243쪽
9) 울리히 벡, 『위험사회』, 홍성태, 새물결, 1997, 3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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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관해기(증상이 일정 정도 가라앉아 통증이 거의 없는 시기)의 만성질환자. 장애인권동아리에서 활동하고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수업을 들으며 질병과 통증을 새로운 시좌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몸의 경험과 장애학, 문화인류학에 관심이 많고, 앞으로도 그것들을 공부하려 한다. 책 『난치의 상상력』을 썼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