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과 자긍심』, 전혜은·제이 옮김, 일라이 클레어, 현실문화
[연재] 노들장애학궁리소 ‘마이너의 서재’
| 노들장애학궁리소는 장애인운동단체의 진지인 ‘대항로’에 있으며, 장애 문제를 연구하고 토론하는 곳이다. ‘궁리’를 통해 장애를 규정하는 근거에 대해 바닥까지 따져 묻고, 장애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억압하는 온갖 삶의 형식을 부수어나갈 운동의 지혜와 전략을 모색하고자 한다. 강좌, 세미나, 차담회 형태로 해 오던 궁리 외 또 다른 방식을 궁리하다가 연구자들이 매달 돌아가며 장애와 관련한 책을 읽고 서평을 쓰기로 했다. 장애인뿐만 아니라 정상성 권력에 의해 억압받고 차별받는 다양한 소수자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도 담으려 한다. |
예전에 친했던 뇌병변장애가 있는 형에게 들은 말이 있다. 나는 형에게 시위에 나가는 게 좋냐고, 뭐가 좋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형은 다른 건 몰라도 시위에 나가고 나서부터 ‘차별’이라는 것을 알게 돼서 좋다고 했다. 그때부터 술맛이 확 바뀌었다고도 했다. 사회가 잘못되었다는 데 형은 뭐가 기뻤던 것일까? 아마도 형 몸에 붙어있던 ‘책임’이나 ‘탓’ 같은 것들을 비로소 덜 수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평소 그토록 한이라고 말했던 학교에 가지 못한 것이 형의 뇌병변장애 때문이 아니라 뇌병변장애인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학교 제도와 ‘장애인은 공부해도 소용없다’는 당시 사회의 잘못된 인식 때문이라는 것을 입증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차별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것이 자기 몸을 긍정하는 것인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자기 몸을 긍정하려면 사회와 떨어져 질문을 던져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망명이란 말과 자긍심이라는 말은 사회적 차별과 편견에 고통받는 이들에게는 별개의 말이 아니다. 일라이 클레어의 책 『망명과 자긍심』은 이처럼 누군가에게는 사회에 거리를 두고 질문을 던지는 행위가 자기 긍정과 연결되어 있음을 말한다.
- 공공연함, 공동체
저자 일라이 클레어는 ‘자신의 몸을 도둑맞았다’고 표현한다. 어릴 적 아버지의 강간과 어머니의 강간 묵인으로부터. 자신의 뇌병변장애에 불구자, 지진아, 원숭이, 모자란 애 같은 단어들과 함께 쏟아지는 응시 속에서. 지인들이 선의로 뇌병변장애가 치료될 거라고 제안할 때. 이분법적이고 경직된 젠더 체계에 의해서. 클레어는 그로부터 도망치려 했다. 주머니 속 돌들과 나무, 강가의 연어들로 피신하여 은둔자로 살아가려 했다. 그러나 그는 몸을 되찾았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 것은 공공연함과 퀴어 공동체였다.
클레어는 ‘서커스, 카니발, 싸구려 구경거리’였던 프릭쇼에 주목한다. 프릭쇼가 비단 정상과 타자 사이의 차이를 과장하여 구경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상성과 우월함에 안주하도록 한 것. 즉 비장애중심주의와 인종차별주의에 기대어 돈을 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으나, 한편으로 장애인들이 자신의 몸을 과시한다는 점에서는 저항적인 면도 있다고 보았다. 클레어는 이러한 공공연함에 대해 주목하는데 그것은 언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퀴어(queer)라는 단어가 갖는 저항성을 불구(crip)라는 단어에도 적용시켜본다. 퀴어(queer)라는 단어는 사람들이 성소수자들을 얕잡아 부를 때 쓰는 언어였다. 성소수자들은 그 언어를 재전유하여 사용했다. “그래, 나 퀴어다!” “그래, 우린 달라. 우린 아웃사이더야. 우린 지배 문화가 정의하는 정상에 맞지 않아.”라고 말하며 차이를 숨기거나 부인하는 대신 찬양했다. 클레어는 장애인을 비하하는 말인 불구(crip)도 재전유 해본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나 불구야. 그래서 뭐?” 그는 혐오와 폭력의 말들을 자긍심의 말로 변환한다. 이때 자긍심은 어떤 우월함에 따른 것이 아니다. 공공연한 자기긍정에서 오는 저항과 같은 것이다. 고정관념, 편견, 낙인에 따라 수치심과 침묵과 고립에 빠져 있어야 했던 몸이 가시화하겠다는 결심에 따라 기쁨과 연결된다. 공공연함. 몸을 되찾은 첫 번째 길이다.
문득 글 초입에 소개했던 뇌병변장애를 갖고 있던 형이 나에게 해주었던 말이 떠오른다. 그 형은 가끔씩 아이들이 자기 몸을 가지고 놀릴 때마다 “내 몸 잘났다”하며 살아왔다고 했다. 여기서 “잘났다” 역시 클레어가 말한 것처럼 아무리 나의 몸이(혹은 특성이) 사회적으로 열등한 것이라 치부된다 할지라도 나는 나의 장애를 하나의 특성으로 긍정하며 살아갈 것이며 (타인이 혹은 자신 스스로) 그것을 잘못되었거나 열등한 것으로 놓는다면 그것은 그렇게밖에 보지 못하는 시선과 무지가 잘못된 것이라고 외치며 살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몸을 되찾는데 두 번째 길은 공동체였다. 그는 퀴어 공동체에서 성폭력에 관한 페미니즘 활동인 정치행동, 이론 분석, 정서적 회복을 통해 성적 학대와 신체적 고문을 겪은 과거의 경험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이를 두고 클레어는 욕망을 표면으로 끌어올려 숨 쉴 공간을 내어주게 됐다고 표현한다.
“다이크 행사에 참가하고, 다이크 관련 서적을 읽고, 다이크 음악을 듣고, 처음으로 다이크 바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다이크 댄스클럽에도 처음으로 가봤다. 나는 다이크 여성들이 이야기하고 웃고 서로 손잡고 춤추고 키스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정말 좋았다. (…) 스포츠머리에 이두박근이 뚜렷이 보이고 빛바랜 부드러운 청바지를 입던 그 여성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던 그 여성들. 그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가 좋아하는 돌을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는 기분이었다.” (268쪽)
퀴어 공동체에서 다시 생각하고, 만나고, 행동하고, 느끼며 돌과 나무에게서가 아니라 피부와 몸에서 체온을 되찾는다. 그렇게 새로운 언어와 관계 속에서 그는 다른 체험들로 나아간다.
“나는 마침내 사랑하는 이의 살갗에 내 손을 올려놓길 원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사랑하는 이의 몸이 내 몸 위에 체중을 실어주길 원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오랫동안 부러져 있던 뼈가 이제야 붙는다.” (271쪽)
퀴어 공동체에서 시선의 전환, 관계의 전환, 세계의 전환을 만들어냈다.
- 복잡성
클레어는 뇌병변장애인이자 남성적 특징이 강한 레즈비언인 부치 다이크다. 클레어에게 장애와 퀴어는 따로 떨어져서 이야기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니다. 흔히 장애와 퀴어는 각각의 문제로 치부될 수도 있고 건강함과 정상성의 척도에 따라 서로를 배척할 수도 있다. 하지만 클레어는 그 두 실존과 함께했다. 그로써 그는 자기 안에서 장애인운동과 퀴어운동의 연대를 만들어낸다. 앞서 말했던 언어를 통한 저항에서 보여주듯 퀴어운동의 전략을 장애인운동의 전략에 끌어오기도 하고 장애인운동 안에서 섹슈얼리티의 문제에 예리한 감각을 가지고 접근하기도 한다.
그는 장애여성이 포르노 잡지 모델로 등장하는 것에 대한 비장애인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에 ‘좀 더 복잡하게 사유할 것’을 제시한다. 그는 비장애인 페미니스트들에게 “포르노적인 성적 재현이 야기할 수 있는 피해에 대해선 유창하게 말했지만, 장애인의 성적 쾌락을 말하는 것을 포용하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반대로 잡지의 모델이 된 것을 지지하는 이들에게는 비장애인, 이성애자, 백인, 부자 남성들이 독점적으로 정의한 아름다움과 섹슈얼리티를 수용하는 것의 위험함을 상기시킨다. 그는 한쪽으로 장애여성에 대한 성폭력과 성적 대상화에 대해 날카로운 인식을 촉구하면서도 다른 한쪽으로 장애인이 성적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하는 방식과 장애인의 성적 쾌락에 대한 고민을 덧붙인다. 그는 사람들이 잡지 모델에게 양가감정을 갖길 원한다. 그렇게 복잡한 다중 쟁점을 제기하며 그는 장애인의 몸에 대해 “정직하고, 견고하고, 반짝반짝 빛나고, 강력하고, 유쾌한” 더 많은 이미지들이 나타나길 기대한다. 물론 그것이 장애인을 무성애적 존재로 여기는 현실적, 제도적 한계들이 극복될 때 가능한 일이라는 것도 언급하면서 말이다.
그의 복잡함은 시골에서 떠났지만 도시 문화에만 안주하지 않는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분명히 시골집의 성폭력에서 벗어나 도시의 퀴어 공동체에서 새로운 집을 찾았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시골 혼합계급이라 칭하며, 시골의 어떤 면들을 여전히 그리워한다. 그는 퀴어운동이 중산층과 상류층만의 도시 퀴어 문화에 안주하길 바라지 않는다. 퀴어 활동가들이 지방에서도 동성애 혐오 폭력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길 바란다. 지방을 떠났으면서도 쉽게 도시와 지방을 구분 짓지 않고 지방에 대한 애착과 ‘함께’의 가능성을 남겨놓는다. 그래서 그는 전형적인 백인 남성우월주의자처럼 보이지만 지역민들이 존경하는 지역민이면서 동성애 혐오 폭력은 막으려 했던 지역 보안관에게도 말 걸기를 주저하지 않을 수 있다. 그는 묻는다. ‘집을 잃고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지? 망명과 상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지?’ 집을 확실히 떠났으면서도, 성폭력의 문화로부터 망명했으면서도, 함께의 가능성은 저버리지 않는 것. 날카로울 것. 또한 연대할 것. 두 가지 복잡함을 말한다.
- 범주의 발명
안드로진, 팬젠더, 바이젠더, 폴리젠더, 젠더가 없는 사람까지. 그는 이분법적 젠더 구분을 넘어 새로운 정체성들을 받아들인다. 이는 존재의 다양한 욕망과 경험과 감각들을 볼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그때 생겨나는 자긍심에 대해서 클레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저 어깨를 으쓱한다. 우리는 웃는다. 우리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자와 남자에 대한 너희 정의는 썩었어. 너희 그 이분법은 엄청 구려. 여기 이 모든 찬란함 속에 우리가 있어-남성, 여성, 인터섹스, 트랜스, 부치, 넬리, 근육질, 펨, 킹, 안드로진 퀸. 우리 중 어떤 이들은 여성으로 존재할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고, 다른 이들은 남성으로 존재할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아가고 있어. 그리고 또 다른 이들은 완전히 다른 무언가로 존재할 새로운 길을 내고 있어. 너희에겐 우릴 부를 대명사조차 없잖아.”“ (258)
장애에 대한 행정상의 이름 대신 고유한 특성들을 볼 줄 알고 자기 몸을 긍정할 수 있는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것, 채식을 다양화하는 수많은 이름들 속에서 여러 시도들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 독특하고 유동적인 성적 욕망들에 알맞은 이름을 붙이는 것. 이러한 시도들은 비단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 의료적 관점, 행정편의, 손쉬운 이분법적 범주화를 떠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몸의 특성과 경험과 감각들에 대한 새로운 범주들을 발명하는 것이야말로 몸을 고정관념, 거짓말, 잘못된 이미지, 억압으로부터 도둑맞지 않을 수 있게 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따라서 범주의 발명은 나의 몸과 욕망과 시도가 긍정될 수 있도록 하는 또 하나의 방법과 전략이 된다.
* 필자 소개 _ 노규호 장애학궁리소 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