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의 역사』와 함께하는 미국 탐방기⑤

10여 년 전 헬렌 켈러의 정치연설을 우연히 접하면서, 장애의 역사 연구에 뛰어들게 되었다. 당시 나는 여성과 정치의 역사를 연구하는 훈련을 받았고 여성이 공적인 영역에서 계속해서 배제당하는 동안 여성이 스스로를 참여하는 시민으로서 어떻게 정당화했는지를 탐구하고 있었다. 그런 내게 헬렌 켈러의 정치적 삶 자체도 매혹적이었지만, 그 활동들이 일반적인 역사 기록에서 누락되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장애의 역사』 31~32쪽)

 『장애의 역사』 저자 킴 닐슨은 헬렌 켈러의 연설문을 접하고 나서, 미국의 역사를 장애와 여성을 중심에 두고 재배치하는 작업에 뛰어들었다고 고백한다. 1880년 태어난 헬렌 켈러는 생후 19개월 성홍열이나 뇌막염으로 추정되는 감염병에 걸려 농과 맹을 가지게 되었다. 익히 알려진 바대로 헬렌 켈러는 7살 때 인생의 스승이자 친구가 된 앤 설리번을 만나 퍼킨스맹인학교에서 공부하게 된다. 이후 하버드대에 진학했고, 수많은 기고문을 쓰고 연설을 하며 열혈 사회주의자, 반전운동가, 인권운동가로 살아갔다. 헬렌 켈러는 1999년 갤럽이 선정한 가장 존경받는 20세기 인물 18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킴 닐슨의 저서 『헬렌 켈러의 급진적 삶』 표지 속의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
킴 닐슨의 저서 『헬렌 켈러의 급진적 삶』 표지 속의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사람들은 헬렌 켈러의 삶을 두고서 ‘장애를 극복한 감동적 인간 승리’라고 묘사한다. 그러나 헬렌 켈러 저작선집을 편집하고 『헬렌 켈러의 급진적 삶(The Radical Lives of Helen Keller)』이라는 평전을 쓴 킴 닐슨은 그녀의 삶을 두고 ‘감동적’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런 묘사는 그녀의 삶에 새겨진 구체적인 시대의 풍경과 모순을 거세하고 대중의 구미에 맞도록 변형시켜 박제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런 헬렌 켈러의 삶은 논쟁의 여지없는 과거의 사건으로 남아 더 이상 우리에게 어떤 뜨거운 질문도 던지지 못하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1915년, 신생아 볼린저 사건

1915년 11월, 시카고의 저명한 의사였던 해리 하이젤든 박사(Dr. Harry Haiselden)는 전국적인 논란의 주인공이 된다. 그가 볼린저 가문(Bollinger Family)에서 태어난 신생아의 구명 수술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하이젤든 박사는 아이가 죽어가도록 방치한 자신의 결정을 대중에게 적극적으로 알렸으며,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자신과 미래 세대를 정신지체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라고 말했다.

‘신생아 볼린저(Bollinger Baby)’로 불리게 된 그 아기는 명백한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있었고, 수술 이후 살아남더라도 뇌 관련 장애를 갖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이젤든 박사는 두 가지 이유에서 그 아기가 죽는 게 더 좋은 일이라고 주장했다. 첫째, 심각한 장애를 가진 신생아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인간적인 선택이다. 둘째, 그런 장애를 가진 사람은 범죄자가 될 수 있어 위험하고 그를 부양하는 일은 사회에 짐이 된다.

하이젤든 박사는 자신의 결정을 옹호하면서 이러한 기준에 따라 이미 지난 10년 동안 장애유아에 대한 선택적 안락사를 해왔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당대의 여러 변호사, 의사 조직들이 하이젤든 박사의 선택을 옹호하는 성명서를 발표했고, ‘신생아 볼린저’ 사건을 둘러싼 논란은 점점 더 커져갔다.

이런 상황에서 훗날 빈민 복지 활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되는 제인 애덤스(Jane Addams)가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에 기고한 칼럼에서 하이젤든 박사를 비판했다. 제인 애덤스는 헬렌 켈러를 예로 들며 과거 ‘결함 있는(defective)’ 존재로 여겨졌던 많은 이들이 실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헬렌 켈러의 의견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당시 헬렌 켈러는 1903년 베스트셀러가 된 자서전을 출간한 저명한 작가였으며, 1909년 사회당에 입당한 이후 여러 연설과 기고문으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활발히 밝혀온 정치인이기도 했다.

헬렌 켈러, 우생학을 지지하다

마침내 헬렌 켈러는 1915년 12월 18일 『뉴 리퍼블릭(The New Republic)』에 「결함 있는 아기를 위한 의사 배심원단(Physician’s Juries For Defective Babies)」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한다(원문 바로가기). 총 네 문단으로 이루어진 헬렌 켈러의 기고 글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하이젤든 박사가 신생아 볼린저가 죽도록 허락했던 것을 두고 삶의 신성함에 대한 여러 논쟁이 진행 중이다. 박사의 결정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삶(life)’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분석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삶은 단순히 숨 쉬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물론 그 결정에 반대하는 이들도 그런 삶이 가치가 없다는 점은 인정할 것이다. 삶을 신성하게 만드는 것은 행복, 지성, 능력의 존재 가능성이다. 열등하고, 기형이며, 마비되고, 생각할 수 없는 생명체에게는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헬렌 켈러는 이 글에서 인간의 경계를 나눈다. ‘가치’가 있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이 존재한다. 기형이고 마비된, 특히 지적 능력이 낮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생명체는 존엄한 인간의 경계 바깥에 있다. 그렇다면 그런 판단은 누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신적 결함을 가진 사람은 잠재적인 범죄자가 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 누군가가 천치인지 여부를 판단할 때, 의사 배심원들이 고려하는 증거들은 정확하고 과학적일 것이다. 그들이 확인한 내용은 편견이 없고,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이 관찰해서 생겨나는 부정확성으로부터도 자유로울 것이다. 그들은 누군가가 진정으로 천치인 경우, 그러니까 정신적으로 발달할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는 경우에만 그렇게 판단할 것이다.

그 판단은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훈련받은 전문가이자 과학자인 의사가 한다. 이런 사안은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의사들도 다른 전문가들처럼 자신의 지식을 남용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아이가 사망하기 전에 그 판단의 근거를 대중에게 공개한다면, 실수나 남용의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녀의 기고문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우리는 하이젤든 박사가 보여준 뛰어난 인간애와 비겁한 감상주의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당황스러운 글이다. 본인이 장애인이었던 헬렌 켈러는 장애 인권 운동에 참여하며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체제와 맞서 싸웠던 인물이다. 1944년 헬렌 켈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농인과 맹인에게서 삶의 기회를 박탈하는 주 정부의 예산 집행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미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초라한 건물의 학교들을 방문했다. 그들은 빈곤 속에서 힘겨운 투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적절한 교육과 의료서비스를 찾을 수 없었고, 사람들은 차별 때문에 구직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충격이었다. 이 부유한 나라에서, 다른 인종[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성과 여성이 그처럼 부당하게 고통받고 있는데 국가가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이 막강한 방해물을 넘어서 맹인인 유색인종들이 자신들의 존엄과 용기를 지킬 수 있도록 재정적인 지원이 절실하다. (『장애의 역사』 248~249쪽)

우리가 놓치는 세 가지 지점

이제 질문을 해야 하는 시점이다. 인종주의와 비장애중심주의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소외된 흑인 맹인의 삶에 가슴 아파하고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헬렌 켈러와, 중증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기를 의사의 판단에 따라 안락사시키는 일을 두고 ‘뛰어난 인간애’라고 말했던 헬렌 켈러는 다른 인물인가. 후자를 헬렌 켈러가 젊은 날 저지른 실수로 치부하거나 혹은 짐짓 무시하며 헬렌 켈러의 삶에서 지우려 하는 것은 위험하다. 앞서 말했듯, 그것은 헬렌 켈러를 구미에 맞게 탈색하고 박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렇게 질문해 볼 수는 없을까. 1915년은 어떤 시기였기에 헬렌 켈러조차도 하이젤든 박사의 행동을 옹호하는 글을 썼을까? 어려운 질문이지만, 『장애의 역사』를 번역하며 나는 그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꼭 감안해야 하는 세 가지 지점을 알게 되었다.

첫째, 당시는 우생학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결함 있는 몸을 가진 퇴행적’ 인간이 늘어나는 것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독재 정권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었다. 또한 그런 인간들이 더 늘어나지 않도록 하는 데 ‘객관적 판단을 하는’ 과학이 기여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 많았다. 1922년 시카고 지방법원장으로서 수많은 ‘퇴행적’ 인간에게 강제 단종수술을 하도록 결정했던 해리 올슨(Harry Olso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주의의 성공은 그 구성원들의 질에 달려 있다. (…) 인종적 퇴행이 계속되고 또 그러한 퇴행이 가속화된다면 국민의 자치는 불가능해지고 혼란이 생겨나게 된다. 결국 독재정권으로 귀결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196쪽)

‘행복할 수 없는’ 당사자의 삶과 불필요하고 부당한 비용을 치러야 하는 사회 모두를 위해서, 어떤 유형의 인간들은 재생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인간적인 선택이고 진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렇게 ‘장애’를 가진 이들은 사회에서 지워져야할 존재로 취급받았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그런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1927년 미국 대법원은 강제 단종수술이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벅 대 벨 사건’ 판결문에서 다수 의견으로 다음과 같이 답했다.

1927년 미국 대법원은 벅 대 벨(Buck v. Bell) 대법원 판결을 내렸다. 다수 의견으로, 올리버 웬들 홈스 판사는 국가의 “최고의 시민”들은 “공공복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한 번 이상” 포기하는 희생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미 국가의 힘을 약화시킨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보다 덜한 희생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우리가 무능력함에 잠식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퇴행한 자손들이 범죄자로 처벌받거나 저능아로서 고통받는 것을 방치하는 대신 명백히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 재생산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모든 세계를 위해 더 나은 일”이라고 홈스 판사는 말했다. 그는 원고 캐리 벅(Carrie Buck)과 그녀의 어머니와 그녀의 딸을 두고서 “저능아는 삼대로 충분하다”라고 판결 내렸다. (219쪽)

둘째, 당시 농과 맹을 지니고 있던 헬렌 켈러는 ‘신생아 볼린저’와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인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김도현은 『장애학의 도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 20세기 초반만 해도 ‘장애인’은 적어도 대중들 사이에서 사회적으로 확립된 범주나 정체성이 아니었다. 따라서 ‘농인’, ‘맹인’, 다양한 형태의 ‘지체 손상자’, ‘정신적 결함자’들은 서로를 어떤 동일성을 지닌 집단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유럽에서 ‘the disable-bodied’라는 (현재의 ‘장애인’에 해당하는) 범주가 처음 나타난 것이 1830년대 이후의 일이며, 20세기 초반의 문헌들에서도 다양한 신체적‧정신적 손상을 지닌 이들은 장애인이라는 통합적 범주보다는 각각 나열되는 형태로 언급된다. (『장애학의 도전』 106쪽)

이러한 인식은 『장애의 역사』에서도 여러 차례 확인된다. 예를 들어 1930년대 대공황 시기, 장애인은 미국 정부가 실직 노동자들을 위해 마련한 일자리 구제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장애인이 ‘고용될 수 없는(unemployable)’ 이들로 분류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배제 규정으로 인해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던 당시 농인들은 이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들은 장애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대다수 농인 노동자들과 농인 단체들은 장애인이 “고용될 수 없는” 범주로 분류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농인은 장애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미국에서 농인들이 직접 자신들을 위한 조직을 만들기 시작한 이래, 농인들은 자신들이 다른 언어를 쓰는 공동체라고 주장했으며, 온전한 시민으로서 자신들이 가진 잠재력과 자신들의 정상성을 강조했다. 농인들도 사회적으로 소외된 존재였지만, 진짜 장애인이라고 여기는 이들과 스스로를 구분하고자 했다. 어떤 이들은 장애 간 동맹이 이루어진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더 큰 장애인 공동체에서 청인인 장애인들이 주도권을 가지게 될 거라고 우려했다. 역사학자 수전 버치(Susan Burch)가 썼듯, 몇몇 농인 지도자들은 “장애 활동가들이 자신들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면” “장애라는 낙인으로부터 자신들이 자유로워질 거라 생각했다. (『장애의 역사』 247쪽)

다양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스스로를 장애인이라는 이름으로 규정하고 함께 연대하며 싸우게 된 것은 1970년대 이후, 미국의 장애 인권 운동을 통해 법적·제도적 변화를 만들어내며 일군 일련의 성과 덕분이었다.

이 시기의 획기적인 판결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민권을 확장시켰다. 그 과정에서 장애인과 그 동료들의 활동과 불만이 모두 커져갔고, 일련의 법적인 승리는 장애 인권 운동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점차 자부심을 가진 장애 인권 운동과 장애 공동체가 성장하며, 장애 간 공동체가 성장할 수 있었다. 점차 신체적·정신적·인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인종·계급·성적 지향·젠더 차이에 관계없이 장애인들은 점차 공동의 경험과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312~314쪽)

마지막으로 셋째, 헬렌 켈러는 신체적 손상(impairment)이 사회적 관계와 맥락 속에서 장애(disability)가 된다고 보는 현대 장애학의 관점, 몸의 차이를 긍정하고 장애를 정체성과 자부심으로 여기는 장애 인권 운동의 감수성을 접할 수 없는 시대를 살다 갔다.

더구나 1887년 헬렌 켈러를 퍼킨스맹인학교와 연결시켜준 인물은 다름 아닌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이었다. 전화기 발명에 기여한 과학자이자 농인 교육 이론가였던 그는 수어 사용을 금지해야 한다고 말했던 확고한 구어주의자였다. 벨은 독순술과 결합된 구화법이 “가장 위대한 길”이라고 말했고, 평생 동안 벨을 따르고 의지했던 헬렌 켈러는 이러한 구어주의를 “19세기의 가장 신성한 기적 중 하나”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수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수어 사용을 주장하는 농인 공동체의 주장에 반대했다.

킴 닐슨은 『헬렌 켈러의 급진적 삶』에서 앤 설리번을 포함해 헬렌 켈러와 가까이 지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가 다른 장애인들과 함께 분류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녀 역시 농인 단체나 다른 장애인 단체의 연설 요구를 반복적으로 거절했다고 서술한다. 그것은 헬렌 켈러를 ‘기적의 존재’가 아닌 장애인 중 한 명으로, 그 집단에 속한 사람으로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헬렌 켈러는 농과 맹을 가진 개인이었지만, 스스로를 억압된 소수자 집단의 일원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여성 투표권, 인종 불평등, 전쟁, 자본주의에 대해 냉철한 정치적 분석을 하던 헬렌 켈러는 장애를 두고서는 비슷한 수준의 분석을 하지 않았다. 혹은 하지 못했다. 그녀는 맹인의 교육과 인권을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지만, 비장애중심주의/장애차별주의의 구조와 모순을 파고들어 변화를 모색하기보다는 개인의 적응과 노력에 초점을 맞춰 대안을 찾았다. 헬렌 켈러가 ‘선택한’ 이러한 전략은 결과적으로 당대의 인권 활동가들이 장애의 정치적 함의를 논하고 장애 인권을 주장하는 데 방해물이 되기도 했다.

퍼킨스맹학교에 전시되어 있는 헬렌 켈러의 68세 때 모습. 점자책을 읽으며 사색에 잠겨있다. ⓒ김승섭
퍼킨스맹학교에 전시되어 있는 헬렌 켈러의 68세 때 모습. 점자책을 읽으며 사색에 잠겨있다. ⓒ김승섭

다시 헬렌 켈러로 돌아가자. 퍼킨스맹인학교를 방문했을 때,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헬렌 켈러의 사진을 만났다. 2004년 기증된 이 사진은 1948년 작품으로, 68세의 헬렌 켈러가 점자책을 읽으며 사색에 잠겨 있다.

당대의 시간을 누구보다 뜨겁게 살아냈던 헬렌 켈러의 삶에는, 많은 사람이 경이롭게 생각하는 성과만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한계와 모순이 함께 새겨져 있다. 그 모든 점을 함께 바라본다고 해서 헬렌 켈러라는 놀라운 인간이 폄하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나는 ‘장애를 극복한’ 박제된 영웅보다, 오류와 모순을 품고 당대를 살아낸 한 인간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길 원한다.

[참고 자료]
John Gerdtz, “Disability and Euthanasia: The Case of Helen Keller and the Bollinger baby”, Life and Learning 16(15), 2006.
Kim E. Nielsen, The Radical Lives of Helen Keller, NYU Press, 2004.

필자 소개

김승섭 고려대학교 보건과학대학 교수, 『장애의 역사』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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