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영, 『몸과 말』, 허클베리북스

의심과 배신

수영은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의 시민 배우다.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와 그의 경험에는 겹치는 지점이 있었기에, 각자의 연극에서 강조점을 다르게 두었다. 그 결과, 나는 진료과들 사이를 헤매야 하는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의료 권력에 질문을 던지고자 했고, 수영은 관계들 안에서 경험하는 차별과 아픈 말들, 거기서 생기는 상처와 이를 관통해 나가는 삶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의 무대 위에서 펼쳐진 의심받는, 사람들과 서서히 멀어지는 경험들은 내가 경험한 소외와 단절들을 상기했다.

그의 더 깊은 이야기들을 기다리던 나는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들었을 때 너무 추상적이라고 생각했다. ‘몸’이든 ‘말’이든 너무나도 많은 의미를 담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이 안에 담긴 사건들, 경험들, 감정들을 포괄하기에 ‘몸과 말’만큼 적절한 표현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몸을 둘러싼 말들,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말들에 관한 그의 이야기는 연극에서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몸과 말』 책 표지 이미지. 빨간갈색의 바탕에 하얀색 글씨로 상단에 책 제목 ‘몸과 말’이 쓰여 있다. 가운데에는 일러스트가 있는데 멀리 언덕 위에 나무 한 그루가 있고 앞에는 한 여성이 왼손으로는 얼굴을 감싸고 오른손으로는 입을 가리고 있는 그림이다. 그사이에는 다소 거친 질감으로 초원이 그려져 있다. 일러스트 왼쪽에는 ‘홍수영 에세이’, 오른쪽에는 ‘아픈 몸과 말의 기록’이라는 하얀색 글씨가 쓰여 있다. 아래 책 띠지에는 “가장 내밀한 고통은 결국 우리 모두의 고통이다. 바디에세이스트 홍수영의 질병서사. 허클베리북스”라고 적혀 있다. ⓒ허클베리북스
『몸과 말』 책 표지 이미지. 빨간갈색의 바탕에 하얀색 글씨로 상단에 책 제목 ‘몸과 말’이 쓰여 있다. 가운데에는 일러스트가 있는데 멀리 언덕 위에 나무 한 그루가 있고 앞에는 한 여성이 왼손으로는 얼굴을 감싸고 오른손으로는 입을 가리고 있는 그림이다. 그사이에는 다소 거친 질감으로 초원이 그려져 있다. 일러스트 왼쪽에는 ‘홍수영 에세이’, 오른쪽에는 ‘아픈 몸과 말의 기록’이라는 하얀색 글씨가 쓰여 있다. 아래 책 띠지에는 “가장 내밀한 고통은 결국 우리 모두의 고통이다. 바디에세이스트 홍수영의 질병서사. 허클베리북스”라고 적혀 있다. ⓒ허클베리북스

『몸과 말』의 문장들은 대부분 쉬운 말로 쓰여 있고 간결하지만, 읽는 데에 드는 시간은 수업시간에 읽던 전공 도서보다 더 길었던 것 같다. 아니, 정확히는 읽고 나서 드는 시간이 길었다고 해야 할까. 서평을 쓰려고 마음을 먹은 후에도 글이 더디게 나왔다. 밀도가 높은 책을 읽으면 손가락을 망설이게 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나의 기억을 되짚고, 그때의 통증을 떠올리게 된다. 6년 전, 내가 아침부터 밤까지 지내던 학원에서 아플 시간은 없었다. 담임선생님과 친구들의 배려로도 해결할 수 없는 몸의 현상들이 있었다. 나는 수업시간에 뛰쳐나가 건물 측면의 외부 계단에 앉아서 두통과 마주해야 했다. 아플 시간을 주지 않는 사회에서는 삶을 쪼개어 아플 시간을 만들어내야 한다.

“시간 혹은 순간의 몸. 균형은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진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던 사람이 지금은 조립한 장난감처럼 넘어져 있다. […] 나는 대개 컨디션을 ‘잘’ 조절하지 못한다. 잘 먹고도 아프고 잘 자고도 아프고 아프지 않다가도 아프기 때문이다. 몸의 변덕에 치인 일상은 몸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하지만 어림도 없는 일. 몸은 일상을 놔주지 않는다. 일상은 반복되는 산란한 몸에 묶여 몸이 가는 곳으로 쓸려 다닌다.”(45쪽)

몸이 언제 아프고, 언제 안 아플지 알 수 없다면, 나는 어떻게 ‘아플 시간’을 마련할 수 있을까? 아플 때를 대비해 혼자 쉴 시간을 마련해두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갑자기 아프면? 제도를 아무리 완비하더라도 해결할 수 없는 지점들은 존재한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서로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저자가 “배려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 말고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일은 없다.”(128쪽)라고 말한 것은 그렇게 사적일 수밖에 없는 장면들에 대한 것일 테다.

“‘보기 좋은’ 세계로 결코 가 닿을 수 없었다. 그 세계는 서서히 나를 밀어냈다. 까슬까슬하고 완강한 손길이 아닌 그야말로 보드랍고 차분한 손길로. 친구가 되어주겠다는 말을 하면서, 우리는 네 편이라는 말을 하면서, 모임에 함께하지 않겠냐는 권유를 하면서. 그리고 사랑을 말하면서. 말은 지워졌다. 말이 지워지는 순간은 얼마나 아픈가. 말을 잃을 때마다 한 사람을 잃는 고통을 느낀다.”(197쪽)

하지만 그런 순간들에 그에게 가해진 시선과 말들은 많은 경우 환대가 아닌 배제였다. 그의 아픈 몸을 이해하려 노력하거나 그와 함께할 방법을 고민하기보다, 사람들은 그를 밀어내고 그와 멀어지려 했다. 그와 가까운, 그와 함께한다고 믿었던 이들이 ‘아닌 척’ 그를 밀어내는 순간들은 사람과 공동체에 대한 그의 믿음을 흔들어 놓기도 했다.

기도가 운동이 될 때

아픈 사람들, 장애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종교, 특히 교회와 관련된 나쁜 경험들이 한 번씩은 있다. 성당에 가지 않은 지 오래된 ‘냉담자’인 나 또한 명절마다, 혹은 가끔 전화로 ‘기도를 해야 낫는다’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듣곤 한다. 그런 말들이 아무리 나를 위한다는 의도에서 나왔을지언정, 거기에는 나의 몸이나 현실에 대한 어떠한 고려도 없다는 점이 나를 가장 힘 빠지게 했다.

『몸과 말』에서는 수영의 아픈 몸과 장애가 교회 공동체라는 맥락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여겨지는지 잘 드러난다. 그런데 그가 풀어낸 경험과 감정들은 내가 이전까지 들어온 것들보다 더 복잡했다. 그는 아픈 기독교인이었고,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전도사 활동도 자신이 원하는 만큼 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믿음을 지켜내는 일에는 어떤 노력과 고민이 필요했을까.

“그리하여 내가 사용하는 ‘우리’라는 표현은 발길을 조심스럽게 밀어 넣은 자리에서 환대받지 못한 사람들, 이웃에게 책임을 다하기를 꿈꾸고 참된 예수 공동체를 사무치게 그리워했을 사람들을 감각하며 펼쳐졌다.”(135쪽)

기도하는 사람의 손 ⓒ픽사베이
기도하는 사람의 손 ⓒ픽사베이

그의 고민은 나와 주변 사람들이 겪은 ‘기도해야 낫는다’, ‘교회에 다녀야 낫는다’와는 전혀 다른 길로 나아갔다. 질병을 저주처럼 취급하고 사실상 현실에는 그 해결책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질병과 장애를 개인화하는 말들과는 달리, 그의 고민은 ‘우리’의 경계와 환대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향했다. 공동체에서 끊임없이 배제되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들을 생각하며, 더 넓은 ‘우리’를 상상했다.

“우리의 거부당함과 버려짐을

송두리째 내어주게 하소서.

그리하여 항상 실패할지라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서로에게 주기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문학동네, 2016)에서는 예수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었던 사람들에게 보내져서 그들과 고통을 함께하는 존재였다고 말한다. 바울은 그러한 예수의 모습을 보며 “공동체의 거룩함”을 유지하겠다며 행해지는 배제와 차별을 거부하고 억압받는 존재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공동체”로 향한다.1) 헨리 나우웬은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3)에서 이를 ‘하향성’이라고 부른다. 권력을 내려놓고, 성공하기보다는 실패하고, 강해지기보다는 연약해지면서 점점 더 낮은 곳에서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그가 말하는 기독교의 방향이었다.2)

헨리 나우웬의 책을 나에게 선물한 친구는 평화와 행복, 기쁨이 종교가 주는 전부가 아니라고 했다. 그가 나에게 전하고 싶었던 건 지금 우리가 함께 차별과 배제에 맞서 싸우는 바로 그 순간들이 어쩌면 가장 종교적인 순간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반드시 어떤 장소에 가서 손을 모으고 기도하지 않더라도 삶의 방향을 통해 믿음을 실천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그는 나에게 해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항상 ‘(보수 우파) 기독교’인 것처럼 느껴진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누군가의 축제에 나와서 사랑의 이름으로 혐오를 저지르는 이들의 모습은 너무도 강렬해서, 광장 한복판에서 함께 싸우는 신자들과 성직자들의 존재를 감추곤 한다. 『몸과 말』을 읽으면서 나는 차별과 배제에 함께 저항하는 종교인들의 마음을 조금은 상상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몸과 말』은 아프지만 아파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의심받고,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관계들에서 배제당한 수영의 시간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질병과 장애의 경험을 통해 다른 차별받는 사람들을 향하도록 이끈 기도문들을 담고 있다. 그가 직접 쓴 기도문들은 기도가 운동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혹은 기도가 나와 나의 주변을, 나아가 세상을 바꾸는 하향성의 운동이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듯했다. 그의 기도문 중 한 구절을 인용하며 종교와 운동의 접점에서 더 넓은 연대를 모색한다. 약해지기 위한 기도는 세상을 바꿀 수 있으니까.

“각 지체들이 의존 안에서

아무도 홀로 가지 못하는 그런 날에

닫힌 마음은 기꺼이 부수어지리라

간혹 우리가 이해하기를 꺼려 하고

서로를 위한 책임을 멀리했을지라도

우리는 다시 닿아지리라”

*                    *                    *

1) 김학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 문학동네, 2016, 65~67쪽

2) 헨리 나우웬,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3, 20~26쪽

필자 소개 _ 안희제. 관해기(증상이 일정 정도 가라앉아 통증이 거의 없는 시기)의 만성질환자. 장애인권동아리에서 활동하고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수업을 들으며 질병과 통증을 새로운 시좌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몸의 경험과 장애학, 문화인류학에 관심이 많고, 앞으로도 그것들을 공부하려 한다. 책 『난치의 상상력』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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