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글씨가 가득 쓰인 십여 권의 책들이 펼쳐져 있다. 사진 픽사베이
글씨가 가득 쓰인 십여 권의 책들이 펼쳐져 있다. 사진 픽사베이

나는 2020년 9월부터 12월까지 온라인 인류학 현장연구에 참여했다. <코로나19의 인류학적 탐색>이라는 큰 틀에서 나는 ‘기저질환자’ 연구를 사람들과 공동으로 진행했다. 나는 이 연구에서 생긴 고민들을 통해 ‘다른 사람의 이야기’, 그리고 ‘호혜성’이라는 연구윤리에 관한 고민을 나누고자 한다.

연구윤리의 문제는 내가 환우회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을 때 가장 먼저 제기되었다. 당시 나는 ‘기저질환’ 목록에 속하는 만성질환을 겪는 사람들의 커뮤니티를 통해 코로나19 참사 속에서 아픈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아보려 했다. 그래서 인터넷 환우회 커뮤니티들을 연구하려 했는데, ‘온라인’이라는 공간과 ‘환우회’라는 공간의 특성이 동시에 문제가 되었다.

연구자의 존재를 염두에 두지 않고 게시된 온라인상의 글들을 자료로 삼을 수 있는가, 가입 자격이 당사자성을 중심으로 제한되어 있기 마련인 환우회에 비당사자인 연구자들이 가입하여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가. 특히 환우회 카페들에는 때로 개인의 아주 상세한 의료적 정보가 올라오기도 하므로, 연구할 수 있는 자료의 범위를 정하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결국, 연구는 희망자들을 찾아서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공간의 특성에서 오는 고민은 해결되었지만, 질병과 장애, 병력(病歷)과 가족관계 등 민감한 개인정보를 다루는 연구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기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다. 연구는 연구자와 연구참여자 모두의 안전을 위해 비대면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이 때문에 서로 친분을 쌓으며 가까워질 기회도 더 적었다. 물론 연구에서는 연구참여자가 공개하겠다고 동의한 정보만을 사용했지만, 내내 하나의 고민을 놓을 수 없었다. ‘과연 이걸로 충분할까.’

연구를 준비하며 읽은 『인류학 민족지 연구 어떻게 할 것인가』(일조각, 2012)에서는 연구참여자들의 동의 여부는 물론이고, 동의가 이루어진 맥락과 동의 이후의 프라이버시, 비밀 유지, 익명성 등의 존중, 이러한 요소들을 존중하고자 노력하더라도 연구참여자가 특정될 수 있는 상황까지도 다루고 있다. 이는 일반적인 설문조사나 통계와는 달리, 한 사람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노력하는 인류학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구체적인 이야기와 삶을 연구한다는 점 때문에, 연구에서는 말할 준비가 된 사람을 찾거나, 누군가가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번에 진행한 온라인 연구에 참여해 준 사람들은 한편으로 이미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준비가 어느 정도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연구가 계기가 되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사람들도 많았지만, 이미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 본 경험이 있거나, 자신의 삶을 완결성 있는 서사로 풀어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이들에게 이 연구는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었을까?

노트 위에 펜이 놓여 있다. 사진 언스플래쉬
노트 위에 펜이 놓여 있다. 사진 언스플래쉬

이 고민은 ‘호혜성’의 문제였다. 호혜성은 말 그대로 서로 도움이 된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뚜렷한 기준이 없다. 책에서는 이야기를 나누어 준 연구참여자에게 연구자가 보답하는 방안으로 호의나 관심, 우정부터 전문적 정보나 도움, 물질적 보상까지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한 명당 한 번의 인터뷰로 진행된 이 연구에서 사람들과 정서적 유대를 쌓을 기회는 많지 않았다. 음료수나 책으로 감사를 표했지만, 받은 것에 비해서 드릴 수 있는 게 참 적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다른 학문들과 달리, 인류학의 연구윤리에는 ‘우정’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호혜성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연구자와 연구참여자 사이의 관계이고, 연구자가 종종 연구참여자들과 친구가 되어 가기에 우정은 인류학 연구에서 중요한 열쇳말일 수밖에 없다. 관계 중에서도 꽤 깊은 신뢰를 전제하는 우정이 연구에서 중요하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것이 인류학 연구방법론이라는 특정한 분야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의 삶을 기록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구술 작업 등에서도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탈시설 이후 장애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나, 함께 산다』(오월의봄, 2018)의 서문에서는 이 책에 “아주 오랜 시간과 많은 이들의 정이 담겨 있”다고 밝히고 있다. 책에 담긴 복잡한 감정들과 삶의 역동들도 내가 책을 못 놓게 했지만, 무엇보다도 저자가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가까워지고, 삶의 일부를 나누는 관계가 되어가는 과정이 나의 마음에 깊이 남았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나의 글이 될 때, 특히 연구자와 연구참여자 사이에 뚜렷한 위계가 존재할 때, 호혜성은 어떤 방식으로 구현될 수 있을까? 소위 전문가와 당사자 사이의 사회적 위계와 더불어, 연구가 연구자의 성과가 된다는 점에서도 연구는 종종 착취적일 수 있다. 나는 연구와 착취를 나누는 기준 중 하나가 ‘순서’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만큼 해줬으니 당신은 이야기를 줘야 한다’ 혹은 ‘내가 이만큼 해줬으니 당신의 이야기를 이 정도는 쓸 수 있다’라는 순서가 착취에 가깝다면, ‘이야기를 꺼내 준 당신에게 내가 보답하고 싶다’라는 순서는 우정에 가깝지 않을까.

그러니 나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는 연구의 윤리가 상대방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것도 넘어서고, 나아가 그 이야기를 나의 글에 사용할 수 있는지 없는지도 넘어서는 차원이라고 생각한다. 우정과 신뢰는 깊은 말이 오갈 수 있는 공간이다. 즉, 이것은 다른 사람과 있었으면 하지 않았을 이야기, 혼자였다면 쓰지 않았을 이야기가 연구자와의 관계를 통해 기록될 수 있는, 기록될 만한, 기록되고 싶은 이야기로 전환될 수 있는 조건이다. 『나, 함께 산다』에 담긴 “아주 오랜 시간과 많은 이들의 정”은 대화를 나눈 시간뿐 아니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시간과 믿음이 형성된 역사까지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참여한 연구에서 호혜성이 얼마나 잘 구현되었는지 아무도 확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몇 명에게 이 연구는 믿고 말할 수 있는 공간, 인터뷰가 끝난 후에도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지는 계기였던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나은 관계들 안에서 말과 글을 나눌 수 있을까? 아픈 사람들, 혹은 사회 운동에 참여하는 이들 사이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적고, 해석하는 아픈 사람인 한, 나는 아마 이 고민을 끝내지 못할 것 같다.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관해기(증상이 일정 정도 가라앉아 통증이 거의 없는 시기)의 만성질환자. 장애인권동아리에서 활동하고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수업을 들으며 질병과 통증을 새로운 시좌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몸의 경험과 장애학, 문화인류학에 관심이 많고, 앞으로도 그것들을 공부하려 한다. 책 『난치의 상상력』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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