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경이로운 소문」의 장애 ‘치료’ 서사가 얼떨결에 드러내는 비보호주의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OCN의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의 주인공 ‘소문’은 11살 때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되어 목발을 짚으며 7년째 살아가고 있었다. 드라마에서 소문의 장애는 부모님의 사망을 떠오르게 하는 매개이자 일진들로부터 괴롭힘당하는 빌미, 그리고 소문이 일진들에 대항해서 친구들을 구할 수 없게 방해하는 (문자 그대로의) ‘장애물’이다.
그런데 소문의 장애는 난데없이 하늘의 힘을 통해 ‘치료’되고, 그 힘을 통해 소문은 ‘보통 사람’보다 몇 배나 강해진다. 심지어는 하늘의 힘을 받은 동료 중 가장 높이 뛸 만큼 강해져서 모두의 감탄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는 이제 학교에서 일진들을 소탕하고, 결국 부모님의 원수도 갚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여기서 ‘치료’는 단지 신체 능력의 회복이나 강화를 넘어, 소문의 한풀이와 등치된다.
이처럼 소문의 장애인에서 비장애인으로의 전환은 그가 기쁘게 뛰어다니는 장면들뿐 아니라 친구들과 외조부모의 눈물, 나아가 그와 그의 친구들을 괴롭힌 일진들에 대한 응징을 통해 더욱 극적으로 그려진다. 즉, 「경이로운 소문」에서 장애는 그 자체로 결핍이나 무능, 혹은 불행을 상징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비장애인 혹은 건강한 사람만으로 노동을 상상하는 사회의 모습이다.
드라마에서 소문은 장애인에서 비장애인이 되었고, 다른 인물들은 코마 상태에서 의식을 되찾고 강한 신체까지 갖게 되었다. 이렇게 능력을 부여받은 이들은 ‘카운터’라고 불리고, 악귀가 들린 사람을 잡아서 악귀를 하늘로 보내는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하늘은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다’라는 설정 때문에, 하늘은 계단이나 턱을 없애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카운터들의 활동은 인간 사회의 비장애 중심적인 현재 상태에 맞추어 이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쪽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더라도 나쁜 놈을 잡는 방법은 많기에 다양한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다리를 고쳐주는 대신 날개를 달아줄 수도 있고, 컴퓨터를 잘 다루게 해서 해커로 활약하게 할 수도 있다. 카운터 중에는 재벌이 있다. 그는 차가 망가지면 커다란 외제 자동차를 사 오고, CCTV를 무력화하는 도구도 사다 준다. 필요한 도구가 있다면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 기억 지우는 능력도 있는 판에 다른 초능력을 더 구상해 볼 수도 있겠고.
이런 다양한 가능성이 분명 존재함에도, 「경이로운 소문」에서는 비장애인들만이 카운터로 등장했다. 게다가 하늘은 의식을 되찾아줄 수도 있으면서 카운터 후보를 고를 때 건강 상태도 기준으로 삼는다. 이렇게 건강한 비장애인으로만 구성된 카운터들은 굉장히 열악한 환경에서 일한다. 언제 어디서 악귀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으니 항상 대기 상태로 있느라 맘 놓고 쉬지도 못하고, 일하는 과정에서 인간사가 끼어들어 있어도 거기에 개입하지 않으려 애쓰느라 곤란해지거나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게다가 너무 강한 악귀가 등장하면 일하다가 사망하기도 한다. 때로 악귀와 싸우기에 조금 더 안전한 ‘융의 땅’이라는 환경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그건 운이나 개인의 역량에 달려 있다.
하늘은 카운터들이 일하는 환경도 전혀 개선해주지 않고, 현장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일하는 이들을 불러다 자격을 박탈하겠다고 윽박지른다. 이 드라마에서 카운터 자격 박탈은 곧 코마나 장애라는 상태로 돌아감을 의미하고, 이는 등장인물 모두가 피하고 싶은 징계다. 하늘은 건강한 비장애인의 몸을 볼모 삼아 카운터들이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도록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의 이러한 설정은 장애인에 대한 보호주의가 사실은 비장애인들도 위협한다는 사실을 얼떨결에 드러낸다. 장애인에게는 위험한 일을 맡길 수 없다는 보호주의는 동시에 비장애인을 전혀 보호가 필요하지 않은 존재로 착각하게 만든다. 보호주의는 기본적으로 약함과 의존을 열등하다고 전제하기에 그 집단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보호받을 필요도, 보호해 줄 이유도 없다고 여겨진다. 오히려 필요한 보호를 제공하는 것이 그들을 의존적으로 만들 것이라며 ‘혼자 알아서 잘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하거나 감시할 뿐이다. 보호-주의와 쌍으로 존재하는 비보호-주의다. 비장애인들은 이러한 비보호주의를 체화하게 된다.
비보호주의는 자본주의 사회 속 비장애인의 몸으로만 상상되는 노동에서 안전한 환경을 마련하지 않는 근거로도 활용되어 비용의 최소화와 위험의 극대화에 기여하면서 오직 자본의 이익에만 복무한다. 보호주의가 장애인을 시설에 가두고 일터에서 배제한다면, 비보호주의는 비장애인을 일터에서 아프게 하고 죽인다. 이렇게 만들어진 위험한 일터에서는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일할 수 없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안전 용품이나 휴식을 제공하지 않고, 어떤 유독 물질이 나오든 묵인하는 기업들에 비장애인의 ‘쓸모’는 바로 ‘비보호’에 있다. 「경이로운 소문」에서 카운터들이 일하는 환경은 비장애인에 대한 비보호주의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치료’는 구원이 될 수 없고, 새롭게 얻은 비장애인의 신체는 볼모이자 도구일 뿐이다.
그러니 완전한 치료가 구원이나 해결책이 되려면 비보호주의를 없애야 하고, 그러려면 보호주의가 사라져야만 한다. 그런데 장애인에 대한 보호주의가 없어진 세상에서 치료가 유일한 결론일 이유는 없다. 보호주의가 사라진 세상은 보호가 사라진 세상이 아니라 모두에게 어떤 보호와 지원이 필요한지 고민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황스럽게도 「경이로운 소문」은 장애의 ‘치료’를 감동적으로 다루면서도, 실은 그게 해결책일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몸을 ‘교정’하는 치료는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비장애 중심적 사회에서조차 그것 자체가 해결은 아니다. 보호주의에 대항하고, 보호하지 않아도 된다는 비장애인의 ‘쓸모’를 버리자. 그리고 일터가, 노동이 어떤 형태여야 모두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자.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관해기(증상이 일정 정도 가라앉아 통증이 거의 없는 시기)의 만성질환자. 장애인권동아리에서 활동하고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수업을 들으며 질병과 통증을 새로운 시좌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몸의 경험과 장애학, 문화인류학에 관심이 많고, 앞으로도 그것들을 공부하려 한다. 책 『난치의 상상력』을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