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쫓겨나는 이들의 서울산책
경의선 숲길 - ② 마포에서 홍대까지

신계동을 떠나 본격적으로 숲길을 걷기 시작하면 효창공원역이 나온다. 이 인근에는 용문시장이 있어 늘상 동네가 북적인다. 공원에서 이어진 횡단보도 앞에는 전기구이 통닭이나 뻥튀기 같은 주전부리, 제철 나물을 파는 노점이 그때그때 종목을 달리하며 모여 있어 현금을 미리 챙기게 된다. 길을 건너 만나는 새창고개는 경의선 숲길의 유일한 언덕길이다. 언덕을 오르다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도원동 삼성래미안이 나타난다.

도원동 삼성래미안. 사진 김윤영
도원동 삼성래미안. 사진 김윤영

“저희는 용산구청 담벼락 아래서 5개월째 노숙생활을 하고 있는 철거민들입니다. 저희들은 원래 용산구 도원동 재개발 지역에 세 들어 살던 세입자 철탑 망루(일명 골리앗)를 지어 저항해 보았습니다만 적준 용역이라는 철거 깡패들에 의해 4월 23일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중략) 저희들의 요구가 무엇이길래 저들은 이토록 모질게 대한단 말입니까? 저희의 요구는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집을 거저 달라는 것도 아니고, 호화 주택을 지어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재개발로 거처를 잃은 저희들이 임시로 살 수 있는 가수용 시설을 지어 주고 일가족이 비좁게나마 살 수 있는 임대아파트에 적정한 비용으로 들어가 살 권리를 달라는 것입니다.”

_ 도원동 철거민이 드리는 호소문, 19981)

1998년 2월경부터 4월 23일까지 용산구 도원동에서는 도원동 재개발사업에 따른 세입자 대책을 요구하는 세입자들의 망루 농성이 이어졌다. 특히 98년 3월 27일부터 30일까지 4일 밤낮으로 망루를 향해 화학약품을 섞은 소방용 물대포를 살수2)하였는데, 여기에 고용된 용역업체는 당시 다원건설, 옛 ‘적준’이었다.

분쟁의 아웃소싱으로 부추겨진 폭력

재개발사업에서의 용역업체 동원은 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철거 반대운동에 대한 정부의 대응 변화와 관련이 있다. 공권력을 직접 개입하기보다 재개발사업에 따른 분쟁은 민간에서 해결해야 하는 것으로 미루면서 재개발 조합은 조직적인 폭력을 동원하게 된다.3) 철거용역업체는 90년대에 들어 대규모 아파트단지 건설과 함께 활황을 맞는다. 여러 철거용역업체 중 적준은 94년부터 재개발 현장을 거의 독점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폭력업체로 오명을 떨치게 된다. 이들의 이름은 ㈜적준개발용역, 적준개발, ㈜적준, 다원건설로 사회적 물의가 일어날 때마다 변화하였지만 철거 폭력의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1998년 도원동에서 일어난 철거 폭력 이후 사회단체들은 ‘다원건설(구 적준용역) 사법처리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4)하고, ‘다원건설(구 적준용역) 철거범죄 보고서’를 발간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다원건설이 97년 7월까지 서울시 내 수주한 철거용역 구역은 총 40개5)에 570억 원에 이른다. 그리고 97년 9월 당시 진행 중인 서울시 재개발 지역 및 철거 예정 지역 중 다원건설이 수주한 지역은 전체의 50%에 달한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계약을 성사시켰을까? 다원 측은 ‘현장을 깔끔하게 정리하기 때문’이라고 답하였다.

도원동의 ‘깔끔한 정리’는 이렇게 이뤄졌다. 도원동 세입자들 60여 명이 모여 세입자 대책을 논의할 때 철거반원 50명이 들이닥쳐 주민들을 폭행하고 모임을 해산시켰다(97.4.29). 철거민 대책위원회의 플래카드로 시비를 걸다 주민들을 폭행하고, 여성 주민을 성추행했다(97.6.10). 공가를 철거하며 사람이 살고 있는 집까지 철거하고, 이를 항의하는 주민을 폭행했다(97.12.16). 사람이 살고 있는 집 30여 세대를 철거해 120명이 쫓겨나고 20명이 부상을 입었다(98.2.7). 어린이만 남아 있는 집에 난입해 아이를 폭행하고, 이에 항의하는 주민을 향해 지프차를 돌진시켜 두 명이 중상을 입었다(98.3.19). 망루농성에 돌입한 철거민의 철탑을 철거하기 위해 물포를 살수하고, 식량과 옷가지를 전하러 간 철거민 두 명이 폭행 및 화상 상태로 발견되었다(98.3.27~30). 경찰병력 천여 명과 철거반원 3백 명, 특수진압대 40여 명, 구청과 재개발조합 건설회사 직원 등 1천 5백여 명이 행정대집행을 진행했다. 행진하던 학생 15명이 연행되고, 주민 30명을 포함해 총 86명이 연행됐다(98.4.23).6)

1998년 4월 1일 발행된 인권하루소식 “도원동 철거폭행 적준용역 확실”에 있는 삽화. 이미지 인권하루소식
1998년 4월 1일 발행된 인권하루소식 “도원동 철거폭행 적준용역 확실”에 있는 삽화. 이미지 인권하루소식

“이젠 사람이 무서워요. 그전에는 ‘이웃’하면 다정다감하게 느껴졌는데 이젠 무서워. 지금 다정하게 대해주는 사람들도 돌변하는 그때 그 사람들(건물주 이웃 등)처럼 나한테 그렇게 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 일단은 인간이 인간을 못 믿게 되더라구. 그게 싫어요. 나의 가장 순수했던 마음을 잃어버렸어요. 인간이 황폐해져 버렸어요.”

_ 도원동 주민 유○○7)

도원동 삼성래미안은 이제는 인근 아파트 중 낡은 편에 속하지만 신계동 철거민 강정희가 그랬듯 누군가에게는 이곳 역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일 것이다. 도원동 철거민들의 망루농성 현장에는 한 달 동안 연인원 3,000여 명의 철거용역, 10,000여 명의 공권력이 투입되었던 것으로 집계한다. 도원동 주민 유○○는 ‘몇 발짝만 내려가면 귀빈로가 보이는 이곳에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는지 세상 사람들은 알까’ 궁금해했다. 아침에 창문을 열면 도원동 망루가 보였던 강정희도 잘 몰랐다. 유○○ 역시 도화동 철거민(1988년)들을 보며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상전벽해 마포에서 쫓겨난 사람들

공덕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엄마는 마포대로를 ‘귀빈로’라고도 불렀다고 했다. 한국을 방문한 해외 인사들이 김포공항에서 여의도, 시청과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마포대로를 통해 지나다녔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서부지방법원이 위치한 자리에는 1963년까지 마포교도소가 있었다. 죄수복을 입고 똥지게를 나르는 사람들이 오갔다는 엄마의 기억과 현재의 마포는 꽤나 거리가 멀다. 말린 홍합이니 해삼을 꿰어 팔던 행상인도, 아랫집 윗집 모여 아이들이 놀았던 골목길도 사라진 세월이다. 79년도 YH무역 노동자 김경숙이 사망한 신민당사도 공덕동에 있었다. 지금은 SK건물이 들어선 자리가 신민당사의 자리였다는 역사의 기록은 작은 바닥 표지로만 확인할 수 있다.

공덕역 오거리 SK HUB건물 앞에 과거 신민당사 터였음을 알리는 바닥 표지석이 있다. 사진 김윤영
공덕역 오거리 SK HUB건물 앞에 과거 신민당사 터였음을 알리는 바닥 표지석이 있다. 사진 김윤영

그렇게 멀리 가지 않고 내 기억 안에서만 돌아보아도 마포의 모습은 부지런히 변했다. 공덕오거리 앞에 있던 마포우체국은 여의도까지 행진하는 시위대의 단골 집회 장소였다. 2005년 장애인 활동보조인 제도를 만들기 위해 여의도로 행진했던 ‘420장애인차별철폐의 날 공동투쟁단’이 ‘대한민국에 장애인 인권은 없다’는 까만색 대형 플래카드를 내려놓고 행진을 준비했던 장소도 그곳이었다. 시위대의 등 뒤에서 연갈색 타일을 덮고 있던 마포 우체국 건물은 사라졌고, 바로 옆 새로운 유리빌딩으로 이전했다. 마포 우체국 자리에는 회색 펜스가 둘러쳐진 채 몇 년째 그대로다. 숲길의 좌우로 펼쳐진 동네의 모습은 최근 십 년간 한층 더 상전벽해다.

공덕역에서 대흥역으로 이어지는 길은 한옥 같은 오래된 집이 드물지 않은 동네였다. 다세대주택이 빼곡해 동네는 좀 낡았지만 저렴하게 살 곳을 구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공항철도가 들어오고 경의선 숲길이 조성되면서 최근 십년간 이 일대는 그야말로 지도가 바뀌었다. 매일같이 아파트가 올랐고, 아찔한 아파트 높이보다 아파트값은 더 빠르게 올랐다. 그러니 마포구청 앞에는 철거민이 된 세입자들의 농성천막 없는 일이 드물 정도였다.

각 지역의 개발 방식은 달라도 떠나지 못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한결같다. 보상대책이 턱없어 갈 곳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덕동에서 50년을 살았던 노부부의 23평 단독주택은 지난 2017년 평당 1300만 원을 책정8)받았다. 작은 집 하나뿐인 가난한 부부는 새로운 아파트의 추가 분담금을 낼 여력도, 작은 보상금으로는 주변에 집을 얻을 수도 없었다. 이들의 집은 결국 강제 철거됐다. 이곳에서 실용음악학원을 하던 원장도, 자동차 공업소를 운영하던 사장님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시설비도 안 되는 보상금을 가지고 어딜 이동한다 하여도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수 없었다. 이들이 쫓겨난 동네에는 공덕SK리더스뷰 아파트가 들어섰다. 공덕동, 아현동, 신수동… 쉴 틈 없이 포크레인이 몰아쳤다.

경의선 공유지 시민행동, 공공부지의 쓸모를 묻다

이런 눈부신 ‘발전’에 어깃장을 놓은 이들이 있었으니 ‘경의선공유지시민행동’ 사람들이다. 경의선 공유지 시민행동은 2016년부터 공덕역 인근 경의선 철길 위 유보지를 ‘26번째 자치구’로 선언하고 공간을 점거했다. 이들이 이 공간을 점거한 이유는 하나다. 경의선 폐철로 위에 생긴 새로운 빈 땅을 한국철도시설공단이 기업에 내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싹쓸이 철거를 반복해 온 서울에서 ‘공간의 쓸모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여기에는 성동구에서 재개발로 쫓겨난 청년 희성 씨, 아현동 포장마차 철거로 쫓겨난 강타 이모와 작은 거인 이모네 포장마차가 있었다. 청계천 개발로 쫓겨난 이들의 ‘청계천 두꺼비’, 도시 공공성과 커먼즈를 고민하는 ‘연구자의 집’도 있었다.

‘스쾃(squat)’이라고 알려진 이 운동은 비어있는 건축물이나 공간을 점거한다. 빈 건물과 공간의 새로운 쓰임을 만들어내고, 비싼 월세나 부자들만을 위해 재편되는 도시공간에 대해 항의하는 행동이다. 지난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의 홈리스들은 ‘팬데믹 시기 안전을 위해 집을 보장하라’며 빈집을 점거했다. 한국에서는 2004년 서울 목동 예술인회관을 점거한 예술가들이 있었다. 국고를 지원받아 건축하던 예술인 회관이 임대 사업을 위한 공간으로 전락한 것을 폭로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비슷한 시기 철거 예정지였던 종로 삼일아파트를 점거한 홈리스들이 있었다. 이들은 쫓아내려는 구청에 맞서 싸우고, 건물이 철거되기 전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하지만 소유자의 명의로 복잡하게 얽힌 현대 도시의 정글에서 이들의 점거운동이 달갑게 받아들여질 리 없다. 2019년 11월 대한민국 정부는 경의선공유지시민행동이 36억 3525만 원의 토지 가치를 침해하고 있다고 소송을 걸었다. 소송의 끝에 경의선공유지 시민행동은 2020년 4월 자진 철거를 결정한다. 이곳에는 이제 회색 펜스뿐, 시민들이 모일 공간도 새로운 건물도 없다.

2021년 현재 경의선 공유지 터가 펜스로 가려져 있다. 사진 김윤영
2021년 현재 경의선 공유지 터가 펜스로 가려져 있다. 사진 김윤영

값없는 이들의 연합이 던지는 질문

자진 퇴거 5개월이 지나 경의선공유지시민행동은 기자회견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1. 경의선공유지시민행동의 방해가 없는 지금 상황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철도시설공단이 하고자 했던 부동산 개발 사업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2. 36억 원이 넘는 가치를 지닌 땅을 5개월 동안 펜스를 쳐서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런 행위를 통해서 과연 36억 원의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묻습니다. 이 땅에서 시민들을 몰아낸 대한민국 정부, 그러니까 철도시설공단은 이렇게 방치된 땅에 대해 ‘누구에게 책임을 지고 있습니까?’9)

경의선 공유지에서는 연간 평균 100회 이상의 공개 행사가 개최됐다. 물물교환 장터와 인근 주민들의 작은 텃밭, 놀이공간으로도 이용됐다. 아현 포차 이모들의 작은 포장마차에서는 오돌뼈나 국수 한 그릇에 소주 한잔을 나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 공간의 가장 중요한 쓸모는 이 사회에서 값나가지 않는 것으로 치부된 이들이 이곳에 남아 있다는 그 자체였다. 경의선 공유지는 그곳에 머무르는 것으로 가난한 이들을 축출해 값나가는 공간을 만드는 도시 개발의 ‘자연스러운 질서’에 도전했다.

시민을 채무자로 한 정부의 겁박에 결국 이들은 다시 밀려났지만, 경의선 숲길 중간에 둘러쳐진 펜스라든지 숲길을 끊고 우뚝 솟은 건물을 돌아갈 때면 경의선 공유지 시민행동의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도심의 주요한 땅 사용권을 기업에 내어주는 것은 괜찮은가? 기업들의 이윤 추구로 계속 오르는 월세는 누가 감당하는가? 왜 시민들은 그 가치를 함께 누리거나, 청구할 수 없는가?

경의선 공유지 철거를 조급히 요청한 배경에는 인근 아파트 거주민의 민원이 있었다. 아파트 주민들은 이들이 공유지를 멋대로 사용한다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이들이 바라는 이 땅의 쓸모는 무엇일까? 단연 다른 숲길처럼 공원으로 조성해달라는 취지가 크다. 아파트 주민들의 소망이 이루어질지는 모르겠다. 한국철도시설공단과 이랜드가 설립한 이랜드공덕㈜은 이 부지에 호텔 혹은 오피스텔을 짓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만약 높은 오피스텔이 지어진다면 아파트 주민들은 ‘경의선 공유지’ 시절을 차라리 그리워하지 않을까 점쳐본다. 경의선 공유지는 철거 이후 1년이 지나도록 빈터로 남아 있다.

개발방식은 달라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매한가지

이제 경의선은 공원 전체 구간 중 가장 ‘핫’한 곳이 남았다. 대흥역과 서강대역을 지나 구름다리를 건너면 신촌 기찻길에서 홍대, 연남동으로 이어지는 경의선 숲길의 대표 구간이 나온다. 홍대입구역 4번 출구 앞, 지금은 새로운 건물이 들어선 이곳에는 칼국숫집 두리반이 있었다. 2009년 12월 크리스마스이브, 두리반 사장 안종녀가 용역깡패들에 의해 쫓겨났다.

시작은 평당 8백만 원 하던 인근 땅값이 천정부지로 솟아 한 대기업 건설사에 평당 8천만 원에 팔린 것이다. 공항철도가 들어오고 경의선 철길이 철거돼서 홍대 인근 건물값이 들썩였다. 이 자리에서 2005년부터 칼국수 장사를 하던 안종녀는 건물이 팔린 것도 몰랐다. 마포구청에 의해 ‘지구단위 계획 지역’으로 지정된 것도, 이를 공람하는 절차에 대해서도 듣지 못했다. 시행사는 퇴거를 압박했다. 이사비용으로 제시된 금액은 3백만 원. 시설을 만드는 데만 1억 300만 원이 들어간 가게가 아니었던가. 주택청약통장에 빚을 얹고 찜질방 알바를 해가며 만든 돈이었다. 이대로 나갈 수 없었다. 끝까지 남아있던 두리반을 철거하러 삼십여 명 용역이 들이닥쳤다. 열댓 인부들이 주방 집기를 들어내고, 나머지 인부들은 안종녀 사장 내외와 주방장을 꼼짝 못 하게 가두어놨다. 단 세 시간여 만에 철거는 완료되고, 굳게 닫힌 펜스 바깥으로 이들은 모두 나동그라졌다.

다음날인 크리스마스 아침, 집에서 사라진 안종녀는 가게 앞을 서성이며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나 없는 거로 쳐, 회사 잘 다니면서 애들 뒷바라지 잘해. 난 죽었어’10) 라고 말하던 안종녀는 결심했다. 다시 가게에 들어가기로. 절단기로 문을 따고 다시 연 가게 안에서 531일을 보냈다. 그 기간 두리반 농성장은 한국 역사상 가장 특이한 철거농성장이었다. 매일 인디밴드와 청년들이 북적였고, 민중가수부터 종교인들이 두리반을 채웠다. 노동절인 5월 1일에 열었던 51+ 문화제는 51개의 밴드로 구성하려던 것이 62개 팀이 참여를 신청해 51+로 이름을 바꿔야 했다. 마포구청 도시계획과에서 일주일간 농성을 하였고, 전기가 끊겨 한전 앞에서 두 번의 집회를 열었다. 사람이 있는 곳에 전기를 끊는 철거현장의 무수했던 폭력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이미 십 년이 지난 이야기다. 가게는 좀 작아졌지만 철거농성장 중 드물게 ‘동일지역 내 수평이동’이라는 요구도 쟁취했다. 당당하게 조인식도 가졌다. 허리 굽히지 않고 악수를 건네받은 안종녀의 떳떳한 마지막 모습은 우리의 자부심으로 남았다. 함께 싸운 이들과 왁자지껄 개업식도 치렀다. 두리반은 다시 홍대 한 켠에 문을 열었지만 폭력의 기억이 쉽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가슴에는 그날의 억울함이 풀리지 않았다. 언젠가 안종녀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쫓겨났던 그날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높은 건물 꼭대기들만 보이는 거야. 저 많은 건물 중에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도 없겠지. 그런 생각이 들고 나서부터 저 건물들이 나를 짓누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그날 이후 그 기분이 가시지 않아. 높은 저 건물들, 내가 들어갈 곳은 한 곳도 없지.

과거 두리반이 있던 자리에 생긴 새 건물, 2021년 현재 입주자를 찾고 있다. 사진 김윤영
과거 두리반이 있던 자리에 생긴 새 건물, 2021년 현재 입주자를 찾고 있다. 사진 김윤영

상가세입자들은 칼끝을 잡고 있는 셈이에요

“사실 상가 세입자들은 칼끝을 잡고 있는 셈이에요. 칼자루는 건설 시행사나 이런 건설 투기꾼들이 잡고 있는 거고요. 얘네가 이쪽으로 휘두르면 이쪽으로 손을 베고 저쪽으로 휘두르면 손목을 베일뿐이죠.”

_ 유채림, 용산참사 2주기 강제퇴거감시단 인터뷰 중(2011)

칼끝에 서 있는 것도 아니고 칼끝을 잡고 있는 것이라는 서늘한 이야기는 쫓겨나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비유조차 아니다. 이대로 물러서도, 물러서지 않아도 상흔을 남기는 개발 사업에서 세입자와 돈 없는 사람들은 도무지 승산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든 손해와 상처를 입기 때문이다.

홍대인근 건물값이 수직 상승하고, 세입자들의 권리금을 떼어먹으려는 건물주와 기획부동산이 횡횡할 때 세입자들 사이에서는 그런 안부를 나누곤 했다. “혹시 제대 앞둔 건물주 아들은 없어?” 건물주 자녀 개업을 이유로 나가라는 말이 제일 흔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장사가 안돼도 걱정, 너무 잘돼도 걱정이 ‘뜨는 상권’의 이중고다. 장사가 너무 잘 되면 월세 올려달라는 압박이 심해질까, 재건축한다며 쫓아내고 자리를 뺏어가지 않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두리반 이후로도 가로수길 우장창창과 서촌 궁중족발을 비롯한 상가세입자의 개발 분쟁은 끊이지 않았다. 이후 상가임대차보호법의 개정으로 기존 임차인의 권리금회수는 법으로 보장받게 되었지만, 재건축 앞에서는 여전히 속수무책이다. 기울어진 운동장, 아니 칼끝을 잡고 장사해야 하는 세입자들의 처지는 여전히 아슬아슬하다. 그러나 칼국수 집이, 카페가, 공방과 가게들이 없으면 애초에 이곳의 지가가 오른단 말인가? 이곳을 지켜온 세입자를 존중하고, 가게를 일구어온 상인들의 노동을 착취하지 않는 도시개발은 불가능한가?

도시를 채우는 것은 땅값이 아니라 사람

경의선 숲길을 걸을 때면 주변의 아파트 건설로 내쫓긴 삶을 기억해달라. 더욱이 크리스마스 캐럴이 흐르는 때라면 예수의 탄신일에 닫힌 두리반의 철문을 따고, 세입자를 적대하는 세상에 맞서야 했던 기독교인 안종녀를 기억해 달라. 장사가 잘 돼도, 안 돼도 실패를 모두 맨몸으로 떠받쳐야 했던 상인들의 노동을 기억해 달라. 평당 1300만 원을 보상받고 쫓겨난 노부부의 집터에 19억짜리 아파트11)가 들어오는 도시에서 누가 쫓겨나고 누가 남을 것인지 아파트에 둘러싸인 경의선 숲길에 멈춰 잠시 생각해보자.

경의선 숲길 옆으로는 크고 작은 매력적인 가게들이 많다. 예술가나 감각적인 사람들의 집합으로 동네가 예뻐지고 장사가 잘되면 월세가 오르고, 월세가 오르면 지역이 고급화되는 양상을 일컬어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 한다. 경의선 숲길에서 본 일들을 덧붙여 한 가지 조건을 더 생각할 수 있겠다. 공원과 역개발 등 공공의 자원이 투입된 공간의 지대를 땅과 건물을 소유한 사람들이 독점하는 양상이다. 이를 버티지 못한 세입자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빈집과 ‘인형뽑기방’만 남아 동네가 황폐해져도 건물값은 계속 오르는 현상도 포함시키자. 이를 통제하기 위한 방책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도시의 불평등은 심화될 것이다. 규제를 마련하는 것이야말로 도시를 굴러가게끔 할 것이다. 결국 도시를 채우는 것은 지대가 아니라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의 노동이기 때문이다.

경의선 숲길 새창고개 구간. 공원의 양옆과 멀리 아파트 숲이 보인다. 사진 김윤영
경의선 숲길 새창고개 구간. 공원의 양옆과 멀리 아파트 숲이 보인다. 사진 김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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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원동 철거민 문제의 조속한 해결과 민중주거권 쟁취를 위한 결의대회’, 성공회대 민주자료원, 건번호 DEMOS-NA-i206156, 1998.9.11.

2) ‘김대중정권 1년 6월에 대한 평가’ 자료집 중 ‘김대중 정권의 도시빈민 정책’, 양해동(전국빈민연합 집행위원장), 1999.6.16.

3) 『서울시 철거민운동사 연구』, 김수현, 서울학연구, 1999.7.

4) 참가단체: 도시빈민여성연합,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불교인권위원회, 아시아주거권연합-한국강제철거감시단, 인권운동사랑방,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천주교서울대교구빈민사목위원회, 천주교도시빈민회, 천주교인권위원회, 한국교회인권센터 (참관: 전국철거민연합, 주거권실현을위한국민연합)

5) 완료구역: 무악1, 신당4, 답십리6-4, 답십리7, 이문1, 종암, 돈암3-2, 하계2, 중계4-2, 상계3-2, 홍제3, 홍제4, 도화2, 창전, 신정5, 오류1, 구로6, 시흥2-1, 상도1, 사당5, 사당6, 봉천7-1

진행구역: 신당3, 도원, 금호6, 하왕1-3, 행당-1, 행당-2, 상월곡, 길음3, 미아1-1, 미아5, 하계1, 수색2-1, 냉천, 남가좌7, 신길2-3, 봉천8, 봉천2-2

수주구역: 행당-3

‘다원건설(구 적준용역) 철거범죄 보고서’ 중, 다원건설(구적준용역) 사업처리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1999.11.

6) ‘다원건설(구 적준용역) 철거범죄 보고서’ 중, 다원건설(구적준용역) 사업처리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1999.11.

7) ‘다원건설(구 적준용역) 철거범죄 보고서’ 중, 다원건설(구적준용역) 사업처리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1999.11.

8) ‘법대로 했다는 재개발, 법도 버린 철거민’, 박다솔, 워커스, 2017.7.4.

9) [성명] 자진 퇴거 5개월, 다시 경의선 공유지를 묻습니다, 경의선공유지 시민행동, 2020.9.21.

10) 『매력만점 철거 농성장』, 유채림, 실천문학사, 2012.

11) 공덕SK리더스뷰 84제곱미터, 네이버 부동산, 2021. 4.19.

○ 참고자료

자료

『다원건설(구 적준용역) 철거범죄 보고서』, 다원건설(구적준용역) 사업처리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1999.11.

『서울시 철거민운동사 연구』, 김수현, 서울학연구, 1999.7.

6월항쟁 12주년 기념 시국토론회 ‘김대중정권 1년 6월에 대한 평가’ 자료집, 민중생존권쟁취·사회개혁·IMF반대 범국민운동본부, 1999.6.16.

[호소문] 도원동 철거민 문제의 조속한 해결과 민중주거권 쟁취를 위한 결의대회, 성공회대 민주자료원

[성명] 자진 퇴거 5개월, 다시 경의선 공유지를 묻습니다, 경의선공유지 시민행동, 2020.9.21.

용산참사2주기 강제퇴거감시단 인터뷰, 빈곤사회연대, 2011.

[인권하루소식] 도원동 철거폭력, 주민 중태, 1998.3.31.

[인권하루소식] 도원동 철거폭행 적준 용역 확실, 1998.4.1.

단행본

『매력만점 철거 농성장』, 유채림, 실천문학사, 2012

『가난의시대』, 최인기, 2012

신문

[한겨레21] ‘명품주거’ 위해 밀려난지 1년... 아현포차는 살아있다, 박수진, 2017.10.7.

[한겨레신문] ‘경의선 공유지’의 사회적 가치를 묻는 세 가지 질문, 김상철, 2018.8.13.

[환경데일리] 난개발로 위협 받는 경의선 숲길 공원 되살려야, 노웅래, 2015.1.30.

[워커스]법대로 했다는 재개발, 법도 버린 철거민, 박다솔, 2017.7.4.

[프레시안]두리반은 전기가 없어도 빛을 잃지 않는다, 오도엽, 2010.10.13.

[프레시안] 홍대 앞 ‘괴물’과 맞서는 ‘두리반 아줌마’의 눈물, 허환주, 2010.2.10.

[중앙일보] 대현·도화동 철거민 이주대책 요구농성, 1988.11.18.

[경향신문] 마포 한복판 ‘한국판 스쾃’ 끝났지만... 주민 바라는 공원은 ‘먼 길’, 허남설, 2020.5.5

[한국경제] 공덕역 '벼룩시장부지' 개발된다, 배정철, 2020.5.4.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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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영의 쫓겨나는 이들의 서울산책

빈곤사회연대에서 활동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여러 도시에서 자랐다. 가난한 이들을 쉽게 쫓아내고, 머문 자리마저 빠르게 지우는 도시에 애증이 있다. 서울 곳곳에 스며든/지워진 역사를 되돌아보고, 가난한 이들이 빼앗긴 공간과 권리에 대해 돌아보는 ‘다크투어 칼럼’을 한 달에 한 번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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