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벌적 손해배상, 큰 권력 비판하는 작은 언론에 손쉽게 배상 요구
언론인 단체, 법안 밀어붙이는 민주당에 “개정안 철회하고 사회적 합의 나서라”
언론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아래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통과될 위기에 놓이자, 언론인 단체들이 여당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언론중재법 개정안은 30일 오후 5시 본회의에서 의결을 거칠 예정이었지만, 여야의 합의가 무산되면서 회의가 지연되고 있다.
언론인 단체, 언론중재법 개정안 밀어붙이는 민주당에 “철회” 한목소리
언론중재법은 지난 2005년 언론 피해 구제를 목적으로 제정됐다. 이 법률을 통해 언론중재위원회는 언론보도로 인한 분쟁의 조정과 중재, 그리고 침해사항을 심의하고 있다.
그러나 국회에서는 그동안 언론중재법을 개정해 언론보도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기 위한 시도가 이어졌다. 그리고 지난 7월 27일, 더불어민주당(아래 민주당)은 정청래 민주당 국회의원의 대표발의 개정안을 비롯한 16개 발의안을 묶어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위를 거친 뒤, 지난 25일 새벽,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 핵심 이유에는 언론·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침해할 수 있는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언론중재법 개정안은 여론의 반대 목소리로 법안이 소위를 거치면서 추가로 수정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가장 문제가 되는 △모호한 허위 및 조작보도에 관한 정의 △열람 차단 청구권 △언론보도 피해자에 대한 최대 5배의 징벌적 손해배상 등 주요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
이에 30일, 오전 11시 전국언론노동조합(아래 언론노조) 등 5개 언론현업단체에서는 국회 앞에서 언론중재법을 철회하고 여당이 사회적 합의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언론노조 등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우리는 민주당에 충분한 토론을 위한 사회적 합의기구를 제안했지만, 민주당은 일부 조항의 수정을 거듭한 것이 협의라고 포장했다”고 규탄하며 “민주당은 언론중재법 개정안의 본회의 상정을 철회하고 사회적 합의기구를 즉시 수용하라”고 촉구했다.
언론중재법 개정안, 인권침해 지적하는 언론사에 더 치명적
제30조의2(허위·조작보도에 대한 특칙) ① 법원은 언론 등의 고의 또는 중과실로 인한 허위·조작보도에 따라 재산상 손해를 입거나 인격권 침해 또는 그 밖의 정신적 고통이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 보도에 이르게 된 경위, 보도로 인한 피해정도, 언론사등의 사회적 영향력과 전년도 매출액을 적극 고려하여 손해액의 5배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손해배상액을 정할 수 있다.
② 법원은 언론보도등이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 고의 또는 중과실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1. 보복적이거나 반복적으로 허위·조작보도를 한 경우
2. 정정보도·추후보도가 있었음에도 정정보도·추후보도에 해당하는 기사를 별도의 충분한 검증절차 없이 복제·인용 보도한 경우
3. 기사의 본질적인 내용과 다르게 제목·시각자료(사진·삽화·영상 등을 말한다)를 조합하여 새로운 사실을 구성하는 등 기사 내용을 왜곡하는 경우
③ 제1항의 경우 「공직자윤리법」 제10조제1항제1호부터 제12호까지에 해당하는 사람 및 그 후보자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대기업 및 그 주요주주, 임원에 대하여는 적용하지 아니한다.
④ 제1항의 경우 공공복리 등 공공의 이익을 위한 언론보도등으로 다음 각 호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적용하지 아니한다.
1. 「공익신고자보호법」 제2조제1호의 공익침해행위와 관련한 사항에 대한 언론보도
2.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에서 금지하는 행위와 관련한 사항에 대한 언론보도
3. 그 밖에 제1호 및 제2호에 준하는 공적인 관심사와 관련한 사항으로 제4조제3항에 따른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는데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언론보도
특히 가장 논란이 되는 조항은 제30조의2항 중 ‘징벌적 손해배상’에 관한 내용이다. 해당 조항은 ‘허위·조작보도·인격권’ 등 열거된 개념이 모호할 뿐만 아니라, 권력이 큰 개인이나 법인·회사가 여론을 위축시키기 위해 배상금을 얼마든지 청구할 수 있게 한다. 나아가 언론의 고의성이나 중과실은 법원이 추정해 판단하며 그 객관적인 기준조차 없다.
더불어 국내법상 이미 명예훼손에 따른 형사처벌이나 손해배상이 가능한 상황에서 언론중재법의 징벌적 손해배상은 언론을 지나치게 억압하는 악법이 될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언론노조 등은 “전 세계에서 징벌적 손해배상과 형벌 규정이 함께 있는 나라는 없다”라고 지적했다.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통과된다면, 언론사는 국가나 권력을 가진 자들에 대한 비판적 보도를 하기 더욱 힘들어지고 소수자의 권리를 위한 목소리를 소극적으로 낼 확률이 높다.
전규찬 언론개혁시민연대 대표는 “10년 전 국회 출입문 앞에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이 농성을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2기 과거사위원회가 출범해 국가 폭력을 조사하려 한다”라며 “만일 농성을 시작했을 당시, 언론중재법이 이 개정안과 같았다면 우리의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나갈 수 없었을 것이며, 지금처럼 당당하게 정부가 국가폭력에 책임지도록 요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형제복지원이 국가폭력으로 인정받게 된 싸움의 시작에는 2011년 피해생존자 한종선 씨의 국회 앞 1인시위와 이후 ‘살아남은 아이’ 책 출판이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개정안을 적용해본다면, 형제복지원은 과거 기억에 의존한 한 씨의 증언이 허위·조작이라며 이를 보도한 언론사를 대상으로 손쉽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소송에 부담을 느낀 언론사와 기자가 취재에 손을 놓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시설법인에서 발생하는 인권침해를 보도하는 본지 또한 언론중재법 개정안의 영향을 크게 받을 우려가 있다. 김동원 언론노조 정책협력실장은 “언론중재법 개정안의 고의 중과실 추정 조항은 중소 언론사, 특히 인권 침해와 차별의 문제를 지적하는 비마이너와 같은 언론사에 더 치명적이다. 이런 문제들은 중소사업장뿐 아니라 공공기관이나 민간시설에서 많이 벌어지는데, 이들은 개정안에 따라 배액배상을 지금보다 더 손쉽게 요구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이어 김 정책협력실장은 “이런 곳들이 소송을 걸게 되면 결과에 상관없이 언론사와 기자가 위축되어 후속보도가 불가능해지고 고의 중과실 조항의 입증책임을 언론사와 기자가 떠안게 된다. ‘시민 피해 구제’라고 만든 법이 도리어 장애인, 성소수자, 외국인노동자 등의 피해를 방치하는 법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