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쫓겨나는 이들의 서울산책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장애인수용시설 3대 적폐 폐지 광화문 농성장

“윤영, 윤영. 우리가 광화문역에서 농성을 하는 거예요. 얼마나 멋있어요? 청와대를 딱 마주 보고 우리의 지하 뻥커를 만드는 거지. 장애인·홈리스 이런 사람들이 시내 한복판을 딱 차지하고 얼마나 좋아요?”

2012년 8월,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광화문농성을 시작하자던 박경석(당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 대표님의 목소리는 경쾌했다.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라는 당시로써는 사람들에게 생소했던 복지제도를 바꾸자는 제안이라기보다 잠시 도시 게릴라가 되어 시내 한복판을 차지해보자는 키득거림이 더 많이 묻어 있었다. 추측건대 사회운동 3년 차 초보 활동가가 너무 겁먹고 도망칠까 봐 놓은 위장 포석이었던 것 같다. 재밌어 보이지 않아? 일단 한번 해보자구! 박경석 대표님은 이런 식으로 일을 만드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다.

위장술이었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뭐든 하고 싶었다. 수급권자와 빈곤층의 죽음이 연일 전파를 타고 있었지만 제도 개선을 촉구하는 성명을 내고 항의 기자회견을 여는 것 이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늘 마음이 답답하던 차였다. 슬퍼하더라도 함께 슬퍼할 공간을 찾고 싶었다. 농성장은 그러기에 최적의 장소가 아닌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폐지를 대선 후보들이 공약하도록 하자. 우리의 첫 번째 목표였다.

2012년 8월 12일, 광화문역에 도착한 장애인 활동가들이 경찰 방패에 막히자 이에 항의하며 싸우고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2012년 8월 12일, 광화문역에 도착한 장애인 활동가들이 경찰 방패에 막히자 이에 항의하며 싸우고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2012년 8월 21일 아침, 예고된 시간보다 이른 아침 광화문역에 도착했지만 곳곳에는 경찰이 가득했다. 광화문광장에서 광화문역으로 이어지는 해치마당에는 바둑판 모양으로 배열한 경찰이 휠체어 이용자나 ‘시위자’ 관상으로 생긴 사람들을 잡아 통행을 막고 있었다. 농성이 아니라 광화문역 안으로 진입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른 시간에 도착한 선발대가 곳곳에서 작은 전투를 벌인 끝에 광화문역에 모일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 다시 문제가 시작됐다. 지하철로 광화문역에 온 사람들은 지하 4층에, 올라오다가 길이 막힌 사람들은 지하 3층에, 처음 도착한 사람들은 지하 2층에, 아직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광화문역 곳곳의 출구에 산개해있었다. 화장실조차 가지 못하고 수 시간을 대치한 채 하루가 흘렀다. 예정된 저녁 문화제를 농성장 예정지에서 하지 못하고, 광화문역 6번 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진행했다. 때마침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긴 하루를 보낸 뒤 겨우 남은 사람들이 은박지 롤을 바닥에 깔고, 플래카드를 이불처럼 덮고 8월 21일 밤을 맞을 수 있었다. 1842일의 첫 번째 날이었다.

2012년 8월 21일 밤, 농성 첫날의 모습. 지붕조차 없는 바닥에 은박지 롤을 깔고 사람들이 앉아 있다. 천장에는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무기한 농성”이라는 노란색 현수막 하나가 걸려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2012년 8월 21일 밤, 농성 첫날의 모습. 지붕조차 없는 바닥에 은박지 롤을 깔고 사람들이 앉아 있다. 천장에는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무기한 농성”이라는 노란색 현수막 하나가 걸려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 농성장의 영정들

1842일을 생각하고 농성을 시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약 알면서 시작한 사람이 있다면 굉장히 지독한 사람일 것이다) 처음에는 대선 후보들에게 우리의 요구를 관철하자는 것이 목표였지만, 장애등급제 폐지는 약속했으되 부양의무자기준에 대해서는 ‘개선’만을 약속한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향방을 결정하기 어려웠다. 이대로 농성을 접는다면 아무런 성과가 없을 것이고, 농성을 지속하자니 이 농성의 목표는 무엇인가?

사실 의문을 품을 시간은 없었다. 대개 농성장은 영정과 함께 시작한다. 용산 참사 유가족들의 남일당 농성이,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대한문 앞 농성이 그랬다. 세월호 광장의 유가족과 문중원 기수의 가족이 광화문에 앉아 있을 때도 그들의 가슴엔 먼저 떠난 가족의 얼굴이 있었다. 광화문 농성장의 경우 그 순서가 조금 달랐다. 우리는 영정과 함께 시작하지 않았지만, 하루하루 농성의 날짜가 이어질수록 새로운 영정을 모셔야 했다.

농성장에서 함께 활동하던 우리 동료 김주영이 화마에 숨졌다. 탈시설 1세대인 그는 불이 난 집에서 119를 스스로 불렀지만 혼자 휠체어에 앉거나 방을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해서 고작 2미터의 문을 앞에 두고 구조대가 도착하기 전 목숨을 잃었다. 부모님이 일을 구하러 나간 사이 발달장애가 있는 동생을 돌보던 지우, 지훈 남매가 사망했다. 전자레인지에 음식을 데워먹으려다 옮겨붙은 불은 11살 동생을 돌보던 13살 누나에게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여름, 장애등급 하락으로 기초생활수급 탈락을 염려하던 박진영 씨가 목숨을 끊었다.

“시장 면담 요청을 아무리 해도 수급권자란 이유, 즉 없는 자라 하여 한 번도 받아주지 않고 거절하고 있습니다. 억울합니다”

_ 고 박진영 님의 유서 중

그의 유서에는 장애 정도의 변함이 없음에도 일방적인 등급하락에 대해 이의를 표할 곳이 없다는 답답한 마음과 등급 하락에 따른 수급탈락이 우려되는데 제대로 된 상담조차 받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시장 면담을 요청하였을 것이다. 더 중요한 결정 권한을 가진 사람이 이 문제를 해결해주길 바라는 절박한 심경이었을 테지만 그가 생사의 기로에서 했던 마지막 청원은 진상 민원인 취급을 받았다.

광화문 농성장에 놓인 18개의 영정. 영정 뒤 대형 현수막에는 “2012년 8월 21일, 농성을 시작할 때는 이곳에 누구의 사진도 없었습니다.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자 기준, 장애인수용시설에 의해 희생된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사진 최인기 
광화문 농성장에 놓인 18개의 영정. 영정 뒤 대형 현수막에는 “2012년 8월 21일, 농성을 시작할 때는 이곳에 누구의 사진도 없었습니다.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자 기준, 장애인수용시설에 의해 희생된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사진 최인기 

생전의 박진영 씨를 본 적은 없지만 나는 영정 속 그가 겪었을 슬픔과 무력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다. 복지제도는 ‘평가를 과학화한다, 객관화한다’며 나날이 복잡해지지만 사람들의 삶은 더 복잡한 법이라 아무리 정교해진들 공평무사할 수 없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경험과 언어가 공식적인 언어로 정리되지 않는 사람들은 더 쉽게 지치고 상처받기 마련이다. 남편의 혼외 자녀가 호적에 줄줄이 달려있어 부양의무자기준 때문에 번번이 수급탈락을 하면서도 ‘혼외 자식이니 내 부양의무자에서 제외해달라’고 말을 꺼내는 것은 차마 못 할 일처럼 느껴져 번번이 주민센터에서 눈물만 쏟고 돌아오던 할머니가 있었다. ‘남편 떠나고 아이를 떠났던 내가 수급받겠다고 그 아이 가슴에 못을 또 박으면 그게 인간이요?’라고 묻는 할머니에게 ‘실제 부양여부’니 ‘부양의무자가 있지만 부양받을 수 없는 경우’에 관한 특례니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4백 페이지가 넘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사업안내서엔 할머니의 자리가 없었다.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큰아들을 비롯한 자녀와 사위 소득 때문에 기초연금 20만 원으로만 근근이 생활하던 할머니도 있었다. 그의 창가에 놓인 제라늄 화분이 화사해 ‘참 잘 키우셨다’ 칭찬하자 그는 재빨리 ‘남이 버린 화분 키운 거지 내 돈 주고 산 거 아니오’라는 말부터 꺼냈다. 사업에 실패한 뒤 연락이 끊긴 아들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집에 커다란 티브이를 두고 갔는데, 그 티브이 때문에 ‘아들과 여전히 연락하고 지내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본 처지에서 비롯된 반응이었다. 할머니와 함께 찾은 동주민센터에서 다시 수급신청을 하러 왔다고 하자 담당자는 한숨부터 쉬었다. 박진영 씨의 유서와 영정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종류의 막막함이 할머니의 일상에도 놓여있었다.

농성을 시작한 지 채 일 년이 되기 전에 이렇게 네 개의 영정이 농성장에 모셔졌다. 농성을 마치던 2017년 농성장에 모셔진 영정은 열다섯 개에 이르지만 사실 그게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이를테면 나의 가슴에도 영원히 남은 영정들이 있다. 2010년 가을 ‘아들이 나 때문에 못 받는 것이 있다’며 본인이 떠나고 나면 동사무소 분들에게 잘 부탁드린다는 유서를 남기고 간 한 장애아동의 아버지가 있다. 일용직 노동자였던 그는 아들의 장애판정 이후 병원비 마련에 어려움을 느끼고 동주민센터를 방문했지만, 근로능력이 있는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수급을 신청할 수 없다는 거절을 받고 돌아섰다. 같은 해 겨울, 노부부가 한날 목숨을 끊으며 ‘수급비 가지고는 생활이 안 돼 죽음을 선택한다. 5개월이 넘도록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물어보는 자식이 당신에겐 있느냐’는 유서를 남겼다. 부부는 부양의무자기준 때문에 이혼 신고를 하고 한 사람 수급비로 둘이 함께 생활을 꾸려가고 있었다. 2012년 6월에는 거제 시청 앞마당에서 한 할머니가 목숨을 끊었다. 부양의무자기준 때문에 수급에서 탈락한 그는 ‘법도 사람이 만드는데 사람에게 법이 이럴 수 있냐’는 항의를 유서에 남겼다.

“법이 그래서 어쩔 수 없어요.” 제도의 문턱에서 사람들이 수없이 들었던 말이다. 복지제도 앞에서 개인의 모든 상황과 개별성은 순식간에 휘발되고 수급신청자의 삶은 법과 제도의 틀로 재단된다. 복지의 도움을 받을만한 상황에 놓였다는 것을 입증하지 않으면, 즉 실패의 원인에 대한 무결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가는 개인의 노력을 입증하지 않으면 한국의 복지는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을 환영하지 않는다. 가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똑같은 구멍이 숭숭나있는데 우리는 애도할 자격이 있는 걸까. 죽음과 애도, 분노조차 소비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세계에서 광화문 농성장은 이 죽음을 흘러가지 않게 멈추어두는 물받이 같은 공간이었다. 넘치는 이야기 중 흘려보내서는 안 되는 것들을 기억하고 저장하는 댐이고 둠벙이었다.

광화문 농성장 맞은편에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장애인수용시설에서 숨진 이들의 영정이 놓여 있다. 농성 3주년인 2015년 8월 21일의 모습. 사진 비마이너DB
광화문 농성장 맞은편에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장애인수용시설에서 숨진 이들의 영정이 놓여 있다. 농성 3주년인 2015년 8월 21일의 모습. 사진 비마이너DB

- 광화문의 다양성 담당

2014년과 2015년은 유난히 힘들었다. 송파 세 모녀가 있었고, 세월호 참사가 있었고, 장애등급제 희생자 고(故) 송국현 동지의 죽음이 있었다. 장애등급제 폐지 이행을 요구하며 국무총리를 따라다녔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악플보다 무플이 무섭다던데, 별의별 수단을 동원해 문을 두드려도 무시로 일관하는 이 정부와의 싸움이 그런 것인가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별의별 일을 다 해가며 한해 한해를 보냈다. 명절이면 차례상을 모시고, 연인들처럼 100일, 500일, 1000일 기념 파티를 준비했다. 크리스마스를 함께 맞고,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 ‘차별을 걷어차는 부릉부릉 자동차’라는 이름을 붙인 봉고차를 나눠 타고 ‘차차차 전국 투어’를 하며 서명을 모으고, 신촌과 강남, 대학로, 종로의 거리를 막아서는 ‘그린라이트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광화문 농성장은 신기한 곳이었다. 국무총리가 면담요청서에 답장이 없으면, 사다리를 들고 우다다다 거리로 뛰쳐나가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지하철과 버스를 막아서고 거리를 점거하면 매일 새롭게 짜릿한 욕을 들을 수 있었다. 전국에서 활동가들이 순번을 돌아가며 농성장을 지켰다. 전국 곳곳에서 활동하는 장애인자립생활센터와 야학의 활동가들을 알고 지내는 것도 농성장 덕분이다. 이제 막 탈시설 해서 서울로 ‘소풍’ 나온 사람들도 있다. 이 모든 일이 ‘청와대를 마주 보는 지하 뻥커’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 신기하고 이상한 사람들의 만남이 이뤄지는 곳이 광화문이어서 좋았다. 쓰레기통 하나 찾아보기 어렵지만 말끔한 곳, 신호등에 따라 일제히 건너는 차량과 사람들 사이에서 누추한 사람을 찾기 어려운 공간에 광화문 농성장은 새로운 일상을 놓았다. 도시는 이곳에 머무르는 모든 사람들의 활동이 이뤄낸 집합체이지만 도시에 대한 권리는 언제나 치열하게 경합한다. 새로운 아파트단지가 아파트 앞 재래시장을 없애거나, 도시 미화를 이유로 거리의 노점상이 사라지는 것, 비싸지는 집값 때문에 도시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더 이상 도시에 살지 못하는 것이 누가 머무를 것인가에 대한 경합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공공의 공간이 사라지거나 시민 대신 소비자만 대접받는 도시로 변모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강력하게 관철된다. 깨끗하게 정비된 공간, 다양성이 포착되지 않는 공간, 멸균실처럼 조작된 공간은 대단히 인위적인 것이지만 의문의 끈을 놓아버리는 순간 여기서 사라진 사람들에 대해 세상은 고려하지 않는다. 광화문 농성장은 가장 비싼 사무실이 밀집한 광화문의 다양성 담당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런 순간이 좋았다.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들이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운동본부죠?”라고 대뜸 말을 걸며, 부양의무자기준 때문에 수급자가 안 됐는데 어디서 이런 걸 하는 데가 있다는 걸 알고 나니 희망이 생긴다며 힘내달라는 전화를 받을 때. 부양의무자기준때문에 수급에서 탈락한 친구인데 광화문에 이런 데가 있다길래 데리고 나왔다며 부양의무자기준 폐지에 대해 설명 좀 해달라는 사람들을 농성장에서 만날 때. 농성이 2~3년 이어지자 광화문 농성장은 어딘가 흩어져 있는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부표가 되었다. 함께 바라볼 부표가 있다면 적어도 부양의무자기준 때문에 부당한 일을 겪을 때 자신을 자책하기보다 사회의 기준이 이동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테니 조금 더 견딜 힘이 될지 모른다. 슬픔에 빠지더라도 함께 슬퍼한다면 조금 나을지 모른다. 그런 기대가 생기는 날들이 광화문 농성장에서 만나는 모든 좋은 날 중의 하나였다.

광화문 농성 1842일 째 되는 날인 2017년 9월 5일, 활동가들이 농성장 앞에서 마무리를 기념하는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최인기
광화문 농성 1842일 째 되는 날인 2017년 9월 5일, 활동가들이 농성장 앞에서 마무리를 기념하는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최인기

- 1842일의 마지막 날들

2016년,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이 광화문에 밝혀졌다. 어디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밀려드는 촛불을 보며 조금 머쓱한 기분이 들기도 했는데, 얼굴 모르는 손님들이 잔뜩 몰려와 우리 집에서 잔치를 벌이는 느낌이었달까. 5년 내 보고 있던 광화문이 이런 모습이었나 싶었다. 신이 나기도 했고 너무 바쁘기도 했다. 이 기간 광화문 농성장은 사람들의 길 안내 도우미가 되었고, 정수기, 난로 제공자가 되었고, 핸드폰 충전기지가 되었다.

그해 겨울을 넘기고 박근혜는 퇴진했다. 광화문 농성 2주년을 맞아 2014년에 열었던 ‘부글부글 결심대회’*)에서 박경석 대표님은 ‘농성을 빨리 끝내려면 박근혜가 대통령 그만두는 게 빠를지도 몰라요!’라고 일갈했는데 우스갯소리로만 들었던 것이 원통하다. 어쩌면 그에게는 천리안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말 대통령이 물러나고 2017년 대선 후보들에게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약속을 받아냈다. 문재인 대통령의 신임 장관, 박능후 보건복지부장관이 광화문 농성장에 찾아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부양의무자기준을 폐지하겠다’고 2017년 8월 25일 약속했고, 9월 5일 1842일의 농성은 마무리되었다.

*) 광화문 농성장 참가자들의 총회격의 모임이다. 농성상황 전반을 점검하고 계획을 수립하는 연중행사였다.

2017년 8월 25일,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광화문 농성장에 찾아와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를 약속했다. 사진 비마이너DB
2017년 8월 25일,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광화문 농성장에 찾아와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를 약속했다. 사진 비마이너DB

그리고 다시 4년이 흘렀다. 장애등급제 폐지는 1~6급의 등급 결정을 폐기했으나 ‘장애의 정도가 심함’, ‘장애의 정도가 심하지 않음’이라는 표현을 유지하고 있고, 등급이 아니라 개별 복지서비스의 필요도에 따라 지원을 확대하라는 요구는 ‘종합조사표’라는 제도에 갇혀버렸다. 부양의무자기준은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생계, 의료, 주거, 교육급여 중 2015년 부양의무자기준이 먼저 폐지된 교육급여에 이어 2018년 주거급여에서 폐지되었으나 2021년 10월 생계급여에서 부양의무자기준을 완화하는 데 그쳤다. 복지부는 이에 대해 ‘60년 만의 부양의무자기준 완전 폐지’라는 표현을 쓰며 크게 자화자찬하였으나 고소득·고자산가를 제외한다는 이유로 연봉 1억과 재산 9억 이상이 확인되는 부양의무자를 가진 수급권자의 급여를 여전히 제한할 예정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의료급여에서 부양의무자기준은 폐지되지도, 관련한 계획도 정확히 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오늘 광화문 농성을 마칩니다. 5년간의 농성 투쟁을 통해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자기준, 장애인 수용시설은 이제 없어져야 할 것임을 전 사회에 알렸고, 정부와 보건복지부가 위원회 구성을 통한 성실한 이행을 약속했습니다. 이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이를 달성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남아 있습니다. 5년간의 투쟁은 우리의 일상이 되었지만, 우리의 승리는 세상의 모든 일상을 바꿀 것입니다.”

- 2017년 9월 5일 광화문농성장 해소의 글 중

2020년 12월, 서초구 방배동에서 사망한 지 5개월이 지난 한 어머니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어머니의 사망 후 거리에서 노숙을 하던 발달장애가 있는 그의 아들을 발견한 한 사회복지사에 의해 어머니의 죽음이 알려졌다. 이들 모자는 자활사업 참여가 끝난 뒤 아무런 소득도 없었지만 부양의무자기준 때문에 생계·의료급여를 신청하지 않았다. 월세 25만 원의 재개발 지역 주택에 살고 있던 그들은 방배동 재개발 이후에 갈 집이 있었을까. 꼼꼼하게 기록된 가계부에 남은 모자의 살림살이는 지출이랄 것도 없이 빠듯했다.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를 공약한 대통령의 임기 3년 차에 발생한 일이다. 세상의 일상은 바뀌었는가. 이 죽음을 애도할 자격이 있을까.

- 희망의 근거, 1842일

운동을 시작하던 20대 초반, 내가 처음 본 소위 ‘문건’은 운동이 망했다는 말이 너무 반복되어 이제 아무런 긴장감조차 불러오지 못한다는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세상이 바뀐다는 희망이 없다면 운동은 무엇인가 의심스러웠지만 물어보지 못했다. 누군가의 20대는 세상을 바꾸던 시기였다는데, 나의 청년기는 그렇게 화끈하거나 멋졌던 적이 없다. 어쨌든 잘 해보자,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보자, 그래도 멈추지 말아보자 이런 확신 없는 말만 반복했다. 헤어지는 애인을 붙잡을 때도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전망 없는 일에 뛰어들 바보는 많지 않았다. 그런 바보 중 하나는 나였기 때문에 나는 자신감도 별로 없다. 늘 무언가 주장해야 하는 숙명을 타고난 활동가의 마음에 이렇게 의심이 많다는 것은 성가신 일이다. 부양의무자기준이 반드시 폐지되어야 한다고 수천 번, 아니 만 번은 말했을 텐데도 나는 아직도 이리저리 자를 대본다. 혹시 내 말이 이상한 건 아닐까? 이상한 내가 운동을 하고 있어서 세상이 더 빨리 좋아지지 못하고 정체된 것은 아닐까?

물론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나 하나 때문에 세상의 변화가 빠르고 더디고 할 것 같다는 과잉된 자의식은 얼른 접어두도록 하자. 중요한 것은 이렇게 의심 많고, 신중하다가 때를 놓치고, 거의 모든 일에 아무런 확신도 갖지 않는 내가 광화문 농성장을 생각하면 묘하게 힘이 난다는 사실이다. 그곳에 묻어둔 신주단지라도 있는 양 언젠가 힘든 날이 오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면 될 것으로 생각한다. 1842일의 농성이 준 것은 대통령 공약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면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망한 운동의 꽁무니만 쫓아온 나에게도 드디어 세상을 바꾸기 위해 당신이 필요하다고 말할 용기가 찾아왔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서울에서 광화문도 변했다. 불과 5년 전 촛불로 채워졌던 광화문 광장은 중앙광장이 아니라 한쪽으로 치우친 낯선 모양으로 변하는 중이다. 다행히 해치마당과 광화문역 지하도는 큰 변화가 없다. 광화문역 해치마당에서 한층 내려가면 우리의 농성장이 있던 자리에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폐지 농성을 기억하는 작은 현판이 남아 있다. 정부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지만 우리의 싸움은 그렇게 싱겁게 끝나지 않는다. 1842일이라는 강력한 근거를 가진 희망은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광화문의 1842일은 이곳에 머물렀던 사람들의 삶으로 곳곳에서 지속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 모여서 세상의 규칙을 바꾸자는 대단한 꿈을 키웠던 우리의 시간이 광화문역에 있다. 과거의 시간을 빼앗을 방법이 개발되기 전까지 이 시간은 우리 차지일 것이니 조금 마음이 놓인다. 세상의 일상은 꼭 바뀔 것이다.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2018년 8월 21일, 광화문 농성 6주년을 맞이하여 활동가들이 농성장이 있던 자리에 이를 기념하는 현판을 달았다. 사진 강혜민
2018년 8월 21일, 광화문 농성 6주년을 맞이하여 활동가들이 농성장이 있던 자리에 이를 기념하는 현판을 달았다. 사진 강혜민

김윤영의 쫓겨나는 이들의 서울산책

빈곤사회연대에서 활동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여러 도시에서 자랐다. 가난한 이들을 쉽게 쫓아내고, 머문 자리마저 빠르게 지우는 도시에 애증이 있다. 서울 곳곳에 스며든/지워진 역사를 되돌아보고, 가난한 이들이 빼앗긴 공간과 권리에 대해 돌아보는 ‘다크투어 칼럼’을 한 달에 한 번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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