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해방운동가 생애기록 - 전사들의 노래
존재 확인, 내 인생의 숙제 _ 박김영희⑤

《 존재 확인, 내 인생의 숙제 》

① 나는 커서 뭐가 되지

② 빗장을 여는 사람들

③ 그렇게 대표가 된다

④ 정치라는 소용돌이

⑤ 그 누구도 아닌, 영희

2016년 10월 24일, 고 김주영 활동가 4주기 추모제에서 발언하는 박김영희 대표. 사진 강혜민 
2016년 10월 24일, 고 김주영 활동가 4주기 추모제에서 발언하는 박김영희 대표. 사진 강혜민 

-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아슬아슬한가

2018년 10월인가 감기가 심하게 걸렸는데 잘 낫지 않았어요. 이번 기자회견 끝내고 병원에 가야지, 다음 집회 마치고 가야지, 계속 미루면서 약만 사다 먹었어요. 토요일이 되어서 아무래도 오늘은 병원에 가야겠다 생각하면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화장실에 가고 싶었어요. 화장실에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숨이 넘어갈 듯이 차오르면서 소변이 나와 버리는 거예요. 아주 짧은 사이였는데 활동지원사분이 봤을 때 벌써 내가 숨을 못 쉬어서 입술이 새까매져서는 뒤로 넘어갔대요. 그 다음엔 꿈결처럼 누군가 옷을 찢어라, 잘라라, 호스를 껴라, 하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아요. 깨어나 보니 병원 응급실이었어요. 몸이 너무 아픈데 낯선 사람들이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의사는 내가 숨을 못 쉬어서 인공호흡기를 했다고 말했어요. 어제 당신의 호흡이 잠시 멈췄고 몇 초만 늦었어도 죽을 수 있었는데 참 천행이라고요.

동생들이 들어와서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요. 이게 뭐지… 내가 지금 살아있는 건가… 혀가 말려 들어가면 안 된다고 혀를 눌러놓았고 양쪽 손은 묶여 있었어요. 기도에 관을 삽입해서 그 관으로 숨을 쉬었어요. 썩션으로 가래를 뽑아내는데 할 때마다 너무 아팠어요. 제때 가래를 빼주지 않으면 가래가 코를 막아서 숨을 쉴 수 없으니까 또 죽을 것 같았어요. 너무 고통스러운데 나도 모르게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정신을 잃으면 간호사가 와서 박영희 씨 정신 차려요, 정신 차려요, 하면서 계속 깨웠어요.

며칠 후 일반 병실로 옮겼는데 의사가 나한테 어지럽지 않으냐고 물었어요. 괜찮다고 했더니 깜짝 놀라더라고요. 보통 사람들은 몸속 이산화탄소 수치가 30 정도인데 나는 70이고 그건 거의 연탄가스 중독 수준이래요. 고산지대 사람들이 산소 없이 사는 데 몸이 적응되어 있는 것처럼 내 몸도 그런 것 같다고 했어요. 이산화탄소가 쌓이면 머리가 몽롱하고 정신이 혼미하다가 지난번처럼 혼절해서 곧장 혼수상태로 들어간대요. 갑자기 그렇게 되면 산소를 공급해야 하니까 목에 구멍을 뚫어야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러면 말을 못 하게 된대요. 말을 못 하게 된다고요? 이 장애에 말까지 못 하면 나는 뭘 하고 살 수 있지? 선뜻 답을 할 수가 없어서 생각을 좀 해보겠다고 했더니 의사가 죽을 수도 있는데 목에 구멍 뚫는 게 뭐 그리 대수냐고 답답해했어요. 그래도 나는 하는 데까지 해보고 싶었어요.

호흡기 치료를 받는 근육장애 친구들에게 물었더니 세브란스병원을 추천해줬어요. 찾아갔더니 그곳 의사선생님은 목을 뚫지 않고 기계를 이용해서 재활치료를 해보자고 했어요. 그 후 기계를 대여해서 매일 집에서 호흡기 치료를 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대여비가 한 달에 100만 원인데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라 무료로 지원받아요. 밤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 잠을 자는 시간 동안 호흡기를 코에 끼고 자요. 내 폐가 스스로 호흡을 잘 못 하니까 기계가 인공적으로 바람을 훅 넣으면 나도 모르게 숨을 쉬는 거예요. 코에 바람이 훅 들어오면 눈이 건조해지고 입이 말라요. 잠을 편히 잘 수 없으니까 몸이 아주 고되죠. 그 일 이후로 순식간에 몸이 훅 꺾여서 내려앉은 느낌이 들었어요. 나가서 일정 한 번 소화하고 들어오면 ‘아, 힘들다’ 하면서 죽은 듯이 잠을 자요. 활동을 많이 줄였어요. 가늘고 오래 하자고, 이게 또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했죠.

저는 대체로 건강했어요. 아무리 피곤해도 자고 일어나면 거뜬해졌거든요.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어요. 응급실에서 눈을 뜨고 창밖으로 하늘을 바라보면서 생각했어요. 어제 나한테 죽음이란 게 왔던 거구나. 아, 죽는다는 게 순식간이구나. 산다는 게 진짜 허무하구나. 퇴원해서 집에 왔더니 세상이 다르게 보였어요. 죽음이라는 게 다녀간 순간 깨달았어요. 나는 전혀 떠날 준비가 안 되어 있구나. 그 전엔 기를 쓰고 뭔가를 해야 한다고,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죽어도 출근해서 죽어야 돼, 죽어도 농성장에서 죽어야 돼, 죽어도 기자회견 하고 죽어야 돼. 이젠 좀 달라졌어요. 뭘 만들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느꼈느냐가 중요해졌어요. 죽을 수 있다는 걸 안 후부턴 한 발 뒤로 물러서 질문하게 되었어요. ‘뭐가 더 중요하지?’

일을 많이 줄였지만 꼭 하고 싶은 일은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면서 그들로부터 새롭게 발견하고 배우는 것, 그리고 힘들어하는 활동가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거예요. 여유를 갖고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어요. 어떤 활동가가 돈을 조금씩 모아뒀다가 죽을 때 가난한 활동가들한테 남겨주고 가야지, 하던데 나는 뭔가 남기려고 애쓰지 말고 충분히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먹을 수 있을 때 먹고 행복할 수 있을 때 부지런히 행복해서 그 행복감을 동료들과 나누면서 살아야겠다고요.

2010년 9월 17일, 장애심사센터 농성을 마무리하던 날. 동지들과 이야기 나누며 미소 짓고 있는 박김영희 대표. 사진 김유미
2010년 9월 17일, 장애심사센터 농성을 마무리하던 날. 동지들과 이야기 나누며 미소 짓고 있는 박김영희 대표. 사진 김유미

- 중증장애인 리더들을 위하여

사랑의 고리에서 세상에 필요 없는 존재는 없다는 것을 배웠어요. 살면서 거부당하고 배제될 때마다 그때를 기억했어요. 나는 고유하고 그 고유함으로 분명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라고요. 인생이라는 게 다 자기 존재를 확인해나가는 과정인데 그게 안 될 때가 참 괴로운 것 같아요. 어렸을 때 동생들의 숙제를 열심히 해줬던 건 생각해보면 나도 뭔가를 하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언니가 해줘서 너무 좋아, 하는 소릴 들으면 그래, 나도 쓸모가 있는 사람이야, 라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내가 존재한다는 걸 나 스스로 확인하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가족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거예요.

하지만 그것은 내 것이 아니었죠. 아무리 잘해도 박영희로서 인정받는 게 아니잖아요. 내 존재가 참을 수 없이 가벼웠어요. 오랫동안 나는 뭐지? 왜 살지? 어떻게 살지? 라는 고민을 하면서 살았어요. 그래서 “네가 필요해”라는 말을 들으면 거절을 못 하는 게 나의 약점이죠. (웃음) 정치할 때도 그랬고 이동권 투쟁할 때도 그랬고 내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간다는 마음으로 살았어요. 참 정신없이 달려왔어요. 거절 못해서 한 일이 나를 괴롭게 한 적도 있지만 살아보니까 온전히 나쁘기만 한 일은 없더라고요. 많이 배웠고 좋은 경험들이었어요.

어느 날 한 여성운동가가 나에게 말했어요. “운동에 자신을 온전히 던지면 많이 외로운데 어쩌려고 그렇게까지 하세요?” 가끔 그 말을 생각해요. 추운 겨울날 거리에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고 경찰과 대치하다 새벽녘에 사람 한 명 없는 거리를 달려 혼자 집으로 돌아올 때면 나는 왜 이렇게 사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힘들고 외로울 때 많았죠. 하지만 지금 내가 뭔가 하지 않으면 이 사회는 나 같은 장애인들이 살아갈 방법이 없어요. 이런 현실을 조금이라도 바꾸려면 내 모든 것을 쏟아야 할 만큼 나는 가진 것이 적은 사람이죠. 우리가 살기 위해 세상이 바뀌어야 하고 세상을 바꾸는 일에 외로움이 수반되는 것이라면 받아들여야겠죠. 상처받을까 두려워서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없듯이요. 되돌아보니 운동과 연애를 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2010년 9월 7일, 이명박 정부의 가짜 복지를 규탄하는 집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박김영희 대표. 사진 김유미
2010년 9월 7일, 이명박 정부의 가짜 복지를 규탄하는 집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박김영희 대표. 사진 김유미

장애인 리더들, 특히 장애여성 리더들에게 내 경험과 이야기가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나에겐 선배나 롤모델이 없었거든요. 그럼에도 항상 누군가 내 뒤에서 나를 조종하고 있을 거라고, 배후가 따로 있을 거라고 의심하는 눈초리를 받으며 살았어요. 그 사이에서 이게 맞을까, 저게 맞을까,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할 수밖에 없었죠. 비장애인과 함께 운동하면서 어떻게 자존감을 지킬 것인가, 빠르게 돌아가는 운동 안에서 어떻게 자기중심을 잡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참 어려워요. 자립생활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중증장애인 대표들이 많이 생겨났지만 좋은 리더가 어떤 모습인지에 대한 고민은 부족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대표가 권력적으로 변해가거나 ‘바지사장’처럼 되어 가기도 하죠.

좋은 리더로 성장하기 위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이 운동의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해요. 기회를 준다는 의미로 “사업계획서 한 번 써봐” 하고 그냥 던지는 게 아니라 1장엔 뭐가 들어가는지 2장엔 뭐가 들어가는지, 표지라는 게 있어야 하는데 그건 어떻게 만드는 것인지, 세세하게 차근차근 가르쳐줘야 해요. 내가 처음 회의록 쓰는 걸 배울 땐 한글문서에 ‘회의록’ 쓰고 엔터 세 번 누르고 날짜, 시간, 참석자를 순서대로 써야 한다는 것부터 배웠어요. 복주는 나를 이렇게 가르쳤죠. 우리가 오늘 무엇에 대해 논의했었지? 오늘 결정된 게 뭔지 정확하게 아는 게 중요해. 말로 한 번 해봐. 그래, 그걸 한 줄로 써봐. 자꾸 하다 보면 늘 거야, 언니.

장애여성공감의 공감 잡지 창간 준비를 하던 중 건국대학교에서 배복주와 함께. 사진 제공 박김영희  
장애여성공감의 공감 잡지 창간 준비를 하던 중 건국대학교에서 배복주와 함께. 사진 제공 박김영희  

저는 중증장애인들에게 남들이 잘하는 거 말고 네가 잘하는 걸 하라고 늘 말해요. 그들의 주변에서도 그렇게 북돋워 주면 좋겠어요. 나는 전화 거는 걸 제일 잘했어요.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계속 들었죠. 그것이 차곡차곡 쌓여서 성장의 바탕이 되었어요. 중증장애인들이 너무 거리의 투쟁 현장에만 나가서 소모되는 느낌이라는 하소연을 많이 듣는데, 그것이 소모가 아니라 성장의 바탕이 될 수 있도록 우리가 잘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언어를 많이 만들어냈으면 좋겠어요. 장애인이 비장애인처럼 살려는 게 장애인운동이 아니잖아요. 장애인으로 살아서 불행했다기보단 비장애인과 비교당할 때, 장애가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질 때 나는 불행했어요. 이렇게 말하면서도 TV에서 세계테마기행 보면 와, 너무 멋있다, 저긴 두 발로만 갈 수 있구나, 다음 생엔 비장애인으로 태어나서 저길 한번 가봐야겠네, 하고 생각해요. 이율배반적인 순간이 많아요. (웃음) 하지만 나는 앉아서 세상을 바라보고 느리게 움직이니까 두 발로 빠르게 달리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걸 봐요. 이번 생에는 그렇게 바라볼 때만 발견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나의 여행에 대해서, 유쾌하고 까칠하고 주체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장애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요.

   

- 아주 주체적인 존재의 고통

시종일관 유쾌하게 이야기하던 영희의 눈시울이 딱 한 번 붉어진 적이 있었다. 2002년 이동권연대가 국가인권위원회를 점거하고 박경석 대표가 단식농성에 들어갔을 때였다. 영희는 창백한 얼굴로 기운 없이 앉아있는 박경석을 농성장에 남겨둔 채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시청으로 이동했다. 사람들이 공동대표인 영희에게 물었다. “우리는 뭘 해야 돼요?” 영희도 그것을 몰라 답답했다. 투쟁의 당사자들이 우왕좌왕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에서 연대하러 온 머리 하얀 어머니들이 노련하게 시청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자식 잃고 십수 년을 안 가본 데 없이 쫓아다녔을 그들이 시청 벽에다 대고 장애인들 다 죽는데 시장은 안 나오고 뭐하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나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이 말을 할 때까지만 해도 영희는 ‘그땐 그랬지’ 하는 식으로 여유 있게 웃고 있었다.

- 내 차례가 되어서 마이크를 잡았는데 눈물이 막 났어요. 너무 슬퍼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한참 동안 말을 못 하고 울기만 했어요.

영희의 이야기가 거기서 갑자기 끊어졌다. 방 안에 짧은 정적이 흘렀던 그 순간 그의 눈에서 눈물이 비죽 솟았다. 무려 20년의 시간을 뚫고 온 눈물이었다. 젊은 영희의 무용담을 흥미진진하게 웃으며 듣고 있던 나는 몹시 당황했다. 그, 그, 그게 그렇게 슬플 이야기인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방금 무엇이 지나갔지? 내가 무엇을 놓쳤지? 나는 아주 무방비한 상태로 어떤 절절한 고통의 얼굴과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그의 이야기가 다시 이어졌지만 나는 여전히 그 감정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고, 너무나 이해하고 싶어서 물었다.

- 아까 왜 우신 거예요?

- 옛날 생각하니까 눈물이 나네요.

- 그때 어떤 마음이셨는데요?

-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마음.

- 무서우셨어요?

- 아니요. 막막했어요.

영희가 어깨에 떨어진 빗방울을 툭툭 털어내듯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무서운 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는 듯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막막함이라는 듯이.

사람들이 나한테 자꾸 물었어요. “우리는 뭘 해야 돼요?” 그런데 나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까. 법을 만든다고 하는데 너무 막연하고, 점거농성도 단식농성도 처음인데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고.

그것은 내가 경험한 적 없는, 정말로 알지 못하는 슬픔이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는 그 막막함이 20년이나 몸에 각인되어 있을 만큼의 격정적인 슬픔이었다는 게 신기하다 못해 신비했다. 내가 모르는 슬픔이었기 때문에 나는 영희가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슬픔이 하는 일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 순간에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어서 저 사람은 대표가 되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영희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답을 아는 사람인 것보다 더 믿음직스러웠고 왜인지 가슴이 뭉클했다. 나는 그 슬픔이 영희의 생애를 이해하는 열쇠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 열쇠를 쥐고 그의 삶을 다시 읽으니 놀랍게도 이전에는 들리지 않았던 말들이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올해 3월 26일, 오송역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소속 장애인들이 저상버스 도입을 요구하며 버스를 점거했다. 당시 현장에서 발언하는 박김영희 대표의 모습. 사진 강혜민 
올해 3월 26일, 오송역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소속 장애인들이 저상버스 도입을 요구하며 버스를 점거했다. 당시 현장에서 발언하는 박김영희 대표의 모습. 사진 강혜민 

*          *          *

영희가 잠깐 학교에 다녔던 시절 선생님이 학생 한명 한명에게 물었다.

- 너는 커서 무엇이 될래?

아이들이 저마다의 꿈을 말할 때 영희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는 무엇이 된다고 하지?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 뭐지? TV에서 본 피아니스트가 떠올랐다. 피아니스트가 된다고 해야지. 그런데 애들이 너 피아노 배웠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하지? 영희는 피아노를 구경해본 적도 없었다. 앞으로 배울 거야, 라고 말할까? 그러는 사이 선생님이 영희 앞까지 성큼 다가왔다.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생님을 올려다보는 영희의 작은 가슴이 콩콩 뛰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 다음에 하자꾸나.

환갑의 영희가 어린 영희의 마음을 어찌나 생생하고 실감나게 표현하던지 마치 구연동화를 듣듯이 빠져서 듣고 있었는데 동화는 느닷없이 이렇게 끝나버렸다.

- 스무 살까지만 살고 죽으려고 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스무 살 이후엔 뭘 하고 살지 방법이 없었거든요.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때 끝난 줄 알았던 이야기가 갑자기 경쾌해졌다.

- 그런데 죽을래도 방법이 없는 거예요. 어떻게 죽어? 약을 먹어? 누가 약을 사다 줘? 물에 빠져 죽나? 물까진 어떻게 가?

마치 랩을 하듯 라임까지 딱딱 맞는 것이 스스로도 재미있다는 듯 영희가 깔깔깔깔 웃었다. 나는 이 얘기가 웃긴 얘긴지 슬픈 얘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가 방금까지 들려준 유년 시절 이야기엔 명랑하고 우애 깊은 가족들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저녁이 되어 밥상에 둘러앉으면 아버지는 집에서만 지내는 영희를 위해 동생들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도록 했고, 영희는 숙제하기 싫어하는 동생들을 위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바느질을 하느라 하루가 짧았다고 했다. 아무리 중증 장애를 가졌어도 사랑과 지지를 듬뿍 받고 자라면 영희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나보다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영희는 이렇게 말했다.

- 밤마다 울었어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법을 모르겠더라고요. 아무도 안 가르쳐주니까.

살아있는 인간에게 그보다 더한 고통이 또 있냐는 듯 영희는 벌써 몇 번째 그 ‘방법이 없다’ 소리를 반복하고 있었지만 비장애인으로 살아온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한 채 이렇게 물었다.

- 낮엔 동생들의 숙제를 그렇게 열심히 해주던 다정한 언니가 밤만 되면 죽고 싶어서 울었다고요?

나는 영희의 동생도 아니면서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영희가 대답했다.

- 그건 내 것이 아니잖아요. 나는 그렇게라도 해서 나의 존재와 나의 쓸모를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 말은 뜨겁고도 서늘해서 가슴이 찌르르했다. 나는 그 후에도 오래오래 그 말을 곱씹다가 알게 되었다. 방법이 없었다고 자꾸자꾸 말하는 그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방법을 찾는 사람이었는지를. 모든 어린이들에겐 숙제가 있었지만 영희에겐 없었다. 그래서 영희는 동생들의 숙제를 했다. 그것은 어린 영희가 살기 위해 찾은 생존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내 것이 아니었던 숙제는 영희를 얼마나 불안하고 슬프게 만들었을까. 동생들이 커서 더 이상 숙제를 받아오지 않을 때가 되면 영희 자신의 쓸모도 존재 이유도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스무 살은 그렇게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자기 몫의 숙제를 받지 못한다면 영희는 물거품처럼 사라질지도 몰랐다.

서울 왕십리에 있던 사랑의 고리에 가끔 오셨던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박김영희 대표는 “추기경님은 우리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용히 듣기 좋아하셨다”고 회상했다. 맨 앞줄에 하얀색 상의를 입은 사람이 박김영희 대표. 사진 제공 박김영희 
서울 왕십리에 있던 사랑의 고리에 가끔 오셨던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박김영희 대표는 “추기경님은 우리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용히 듣기 좋아하셨다”고 회상했다. 맨 앞줄에 하얀색 상의를 입은 사람이 박김영희 대표. 사진 제공 박김영희 

만약 선생님이 영희에게 “너는 커서 무엇이 될래?”라고 묻고, “저는 피아니스트가 될 거예요.”라고 영희가 대답하고, “아니, 그건 불가능할 걸! 너는 피아노를 본 적도 없잖아!” 하고 누군가 영희를 무시했다면 나는 그의 슬픔을 더 빨리, 더 선명하게, 그러나 잘못 이해했을 것이다. 영희는 이렇게 말했다.

- 나는 낮달 같은 존재였어요. 사람들은 내가 거기 있는 줄도 몰랐죠. 나는 사람들을 지켜보기만 하는 존재였어요. 귀만 있고 입은 없었어요. 난 뭐지? 난 뭘 하고 살지? 나에겐 언어조차 없어서 뭐가 갑갑한지도 잘 몰랐어요.

처음에 나는 영희가 “너는 커서 무엇이 될래?”라는 질문과 그 질문이 불러올지 모르는 어떤 파국을 두려워했던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이야기를, 영희를, 완전히 잘못 이해한 것임을 깨달았다. 선생님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긴장 속에서도 영희는 빠르게 답을 생각해냈고 이어질 친구들의 질문에 대처할 방법까지 준비해 두었다. 그러나 질문은 영희 앞에서 멈췄다. 영희를 슬프게 한 것은 질문의 가혹함이 아니라 모든 학생들에게 빠짐없이 던져지던 그것이 영희의 눈앞에서 한순간에 사라져버려서 자신이 영영 대답할 방법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영희의 인생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이것이 너무나 주체적인 존재의 고통에 관한 이야기임을 깨달았다.

*          *          *

내가 마흔둘의 영희가 마이크를 잡고 울먹이던 장면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 장면이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그의 존재는 선명하고 또렷해져 모두가 영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린 뭘 해야 돼요?”하고 질문하는 간절한 눈빛들 앞에서 영희는 참을 수 없이 무거운 존재감을 느꼈고 엉엉 울고 말았다. 이것은 빛나는 역전의 순간이다.

수만 명의 서명을 받고 온갖 시위의 방법을 다 써보았는데도 결국 장벽 앞이었다. 나는 영희가 어쩔 수 없이 벽을 만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했다. 모든 방법을 다 쓴 사람이 결국 도착하는 곳은 방법이 없는 곳일 테니까. 영희는 최선을 다해 거기까지 왔다. 그리고 자신처럼 안간힘을 써서 거기까지 온 사람들 앞에 ‘앉아’ 있었다. 기어이 벽 앞에 도착해 그 막막함을 확인하고 눈물 흘리던 영희를 위로한 것은 죽은 자식의 싸움을 자신의 숙제로 삼은, 살아갈 방법도 죽을 방법도 없어 속절없이 늙은 어머니들이었다. 그들을 의지해 눈물을 거둔 영희가 사람들에게 했다는 말이 나는 눈물 나게 좋았다.

- 뭐라도, 뭐라도 해요, 우리. 앞에 나서야 하는 일이 있다면 내가 할게요.

2006년 4월 27일, 중증장애인들이 활동보조제도화를 요구하며 한강대교를 6시간 동안 기었다. 당시 투쟁에 함께한 박김영희 대표. 사진 김유미
2006년 4월 27일, 중증장애인들이 활동보조제도화를 요구하며 한강대교를 6시간 동안 기었다. 당시 투쟁에 함께한 박김영희 대표. 사진 김유미

영희는 자라서 장애여성 단체를 만들었고 진보정당의 정치인이 되었으며 중증장애인이 주체가 되는 사회변혁 운동의 대표가 되었다. 영희는 너무 일찍 온 존재여서 가는 곳마다 벽이거나 벼랑이었지만 살아갈 방법도 죽을 방법도 없는 그곳에서 줄곧 맨 앞자리의 막막한 슬픔을 견뎌냈다. 그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이냐고 내가 물었을 때 영희는 자신에게 아주 소중했던 공동체였던 사랑의 고리로부터 거부당했던 상처가, 쓸모없는 존재라는 낙인이, 자기로 하여금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만들도록 계속 추동했다고 대답했다. 나는 가슴이 좀 뭉클했다. 그것은 영희에게 자기 몫의 숙제가 생긴 순간처럼 느껴졌다. 이제 영희는 세상에 없는 방법을 찾아 헤매지 않고 방법을 ‘만들기’ 시작한다. 단체를 만들고 저상버스를 만들고 승강기를 만들고 법과 제도를 만들고, 그리고 자기의 언어를 만들었다. 어떤 선택은 결실을 맺고 어떤 선택은 그렇지 못했대도 온전히 나쁘기만 한 선택은 없었다. 상처도 좌절도 모두 ‘내 것’이고 시행착오를 겪을 때마다 영희는 고유하고 선명해졌으니까. 영희는 자라서 그 누구도 아닌 영희 자신이 되었으니까.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자문] 박김영희(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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