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해방운동가 생애기록 - 전사들의 노래
존재 확인, 내 인생의 숙제 _ 박김영희②

《 존재 확인, 내 인생의 숙제 》

① 나는 커서 뭐가 되지

② 빗장을 여는 사람들 

1997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장애여성리더십포럼에 참여한 한국대표단들의 모습. 당시 박김영희 대표는 단장으로 참여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휠체어 탄 여성이 박김영희 대표. 사진 제공 박김영희
1997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장애여성리더십포럼에 참여한 한국대표단들의 모습. 당시 박김영희 대표는 단장으로 참여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휠체어 탄 여성이 박김영희 대표. 사진 제공 박김영희

- 빗장을 여는 사람들

95년 어느 날 한 친구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아래 연구소)라는 곳에서 전시회를 한다면서 같이 가자고 했어요. 우리 집이 3층이라 나가기가 어려웠어요. 거길 내가 어떻게 가냐고 했더니 누가 데리러 온대요. 그 친구가 아주 중증이라 한 번 만나기가 쉽지 않아서 걔를 보려고 나갔어요. 박옥순이라는 사람이 데리러 와서 힘들게 나갔는데 정작 내 친구는 안 나왔어요. 행사는 북경세계여성대회에 다녀온 사람들이 하는 보고회였어요. 세계의 여성운동하는 사람들이 북경에 모여 행사를 했는데 행사장에 장애인 편의시설이 안 되어 있는 문제로 장애여성들이 피켓 시위를 한 거예요. 우리나라 여성운동가들이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거죠. 우리나라에도 장애여성들이 있을 텐데, 우리도 저런 운동이 필요해, 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시위 사진을 전시한 행사였어요.

그때 나에겐 장애인운동도, 장애여성운동도 멀고 생소한 것이었어요. 여성장애인? 그게 뭐야? 장애문제는 또 뭐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장애인이 그렇게 사는 게 문제라는 인식도 없었고 그냥 내가 장애인이니까 뭔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던 거죠. 내 친구는 왜 이런 데 나를 오라고 한 거야? 뻘쭘해 하면서 좀 보다가 돌아왔어요. 접수를 받는 곳에서 파마머리를 높게 세운 여성이 경상도 사투리를 씩씩하게 쓰면서 “저는 배복주예요. 대구에서 왔어요” 하면서 인사하는데 ‘이렇게 중증인 장애인은 어떻게 살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기에 나도 뭐 저런 장애인이 다 있나 하면서 그녀를 쳐다봤어요. 며칠 뒤에 박옥순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빗장을 여는 사람들’(아래 빗장)이라는 장애여성들의 모임이 있으니 나오라고 했어요. 나는 집 밖으로 나가기가 어렵다고 했더니 자기가 데리러 오겠다면서 집요하게 나오라고 권했어요. (웃음) 그렇게 빗장에 나가기 시작했어요. 박옥순이 날 업고 내려가면 집 앞에 배복주가 차를 갖고 대기하고 있었어요. 두 사람은 연구소에서 활동하는 간사였어요.

거기 가니까 다 대학 나오고 너무 잘난 사람들이었어요. 저는 운동과는 안 맞다고 생각했어요. 배운 게 있나, 가진 게 있나, 내 몸 하나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내가 무슨 운동을 해요. 운동 같은 거 안 한다는데도 필요한 거 지원해줄 테니까 자꾸만 같이하자고 했어요. 부산에서 부산대학교 후문 쪽에 살았기 때문에 시위하는 걸 본 적이 있어요. 미사 끝나고 돌아올 때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너무 심한 날은 친구와 아마데우스라는 카페에서 민트 한 잔 시켜놓고 시간이 지나길 기다렸어요. 사랑의 고리 모임엔 대학 다니는 장애남성들도 놀러 왔었는데 새카맣게 탄 얼굴에 충혈된 눈으로 민중이 어쩌구 민주화가 어쩌구 설파하면서 나한테도 집회 나가야 한다고 했었어요. 흥, 너희끼리 열심히 하라고 내가 말하면 저 몽매한 민중을 보라면서 우스갯소릴 했죠. 신부님이 미사 강론 중에 사회문제에 대해 이야길 하실 때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긴 했지만 데모나 이념 같은 건 대학 다니는 남성들의 것이지 나같이 배우지 못한 사람과는 상관없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90년도 중반에 장애인운동 내에서 여성문제가 이슈가 되기 시작했어요. 여성단체에서도 장애를 가진 여성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요. 빗장은 94년에 연구소와 다른 작은 모임으로 시작됐대요. 그런데 모임에 나가보니 이 사람들은 장애여성들이 어떻게 사는지 잘 모르더라고요. 결혼한 여성들이 시집으로부터 얼마나 무시당하는지, 임신을 했을 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을 많이 당하는지, 내가 들었던 이야기를 하면 다들 처음 듣는다는 듯이 깜짝 놀랐어요. 담당 간사 박옥순은 비장애여성이었고 배복주는 장애여성이었는데 걸을 수 있었고 차를 운전해서 다녔죠.

그 시절의 장애인운동은 대학 나온 경증장애인들이 주도했고 나 같은 중증장애인들이 운동의 주체가 된다는 생각을 전혀 못 하던 때였어요. 연구소는 장애인운동 단체인데도 지하에 있어서 업혀 내려가야 했고 화장실도 이용하기 어려웠어요. 그런 내가 뭘 할 수 있겠느냐고, 나는 공문도 쓸 줄 모른다고 했더니 박옥순이 저에게 회원 관리를 맡으라고 했어요. 저는 주로 사람들에게 연락하고 이야기하고 소통하는 역할을 했어요. 그러면서 제가 알고 지냈던 장애여성들을 모임으로 불러냈죠. 이동할 방법이 없어서 카톨릭 기사회에서 한 달에 한 번 이동을 지원해주셨어요. 집에서만 지내던 장애여성들이 그렇게 밖으로 나오게 되었죠.

1997년 8월 25일, 제1회 국제장애여성리더십포럼 보고대회가 국회에서 열렸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박김영희 대표. 사진 제공 박김영희 
1997년 8월 25일, 제1회 국제장애여성리더십포럼 보고대회가 국회에서 열렸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박김영희 대표. 사진 제공 박김영희 

96년에 동아시아여성대회가 우리나라에서 열렸는데 빗장 회원들이 대거 참석해서 스포트라이트를 집중적으로 받았어요. 그런데 어떤 기자가 나를 찍어서 가정폭력 당한 여성으로 기사를 쓴 거예요. 사람들은 장애여성이라고 하면 그저 폭력을 당한 대상으로만 생각했어요. 그 기사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과정에서 장애여성 문제가 뭔지 우리조차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사회를 향해 무언가 말하려면 우리 자신부터 장애여성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겐 언어가 없었죠. 먼저 우리 안에서부터 이야기를 나누는 데 집중하자고 의견을 모았어요. 하지만 연구소에선 우리가 언론에 나가서 인터뷰도 하고 대외적으로 적극적으로 나서길 원했어요. 내실을 기하고 싶었던 빗장과 드러나는 성과를 원했던 연구소는 삐거덕거리기 시작했어요. 연구소가 우리를 통제하고 동원하려는 느낌이 강했어요. 빗장은 회원이 80여 명 정도에다 장애여성들이 주체적으로 모임을 이끌어갔기 때문에 자치성이 강했어요. 언젠가는 독립해서 우리만의 단체를 만들자는 생각이 꿈틀대기 시작했죠.

- 세계 장애여성들을 만나다

처음으로 남부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여성장애인대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준비를 할 때였어요.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내가 제일 잘하는 게 뭐지 생각하니까 전화를 거는 일이었어요. 옛날엔 동사무소에 가면 그 지역에 거주하는 장애인 명단을 받을 수 있었어요. 박옥순이 업어서 사무실에 나를 데려다 놓으면 그 명단을 보고 처음부터 마지막 사람까지 전화를 했어요. 처음 전화하면 “됐어요, 안 가요” 그러고, 두 번 전화하면 “그게 뭔데요?” 하고, 세 번 전화하면 “한 번 생각해 볼게요” 그래요. 행사 당일 얼마나 올까 가슴을 졸였는데 정말 많이 모였어요. 1박 2일 일정이었는데 숙소가 부족할 정도였어요.

장애여성과 성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제가 사회를 봤어요. 그땐 우리도 뭘 잘 몰랐어요.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는데 커다란 강당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성에 대해 이야기해보라고 한 거예요. 내가 뭘 안다고 사회를 보고. (웃음) 어떤 장애남성이 마이크 잡고는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서 비장애여성들이 와서 목욕을 시켜주는데 자신은 그때 성을 충분히 향유한다는 거예요. (헛웃음) ‘이게 무슨 상황이지?’ 그때의 당황스러움이 지금도 생생해요. 뭔가 심각한 문제라는 건 느꼈지만 설명할 언어도 없으니까 제지할 수도 없었죠. 그 자리에 비장애 페미니스트 여성들이 있었거든요. 장애여성들이 뭔가를 한다니까 궁금해서 와봤는데 그 모습을 보고 다들 경악했죠. 나중에 나한테 와서 문제제기를 하는데…. 아휴, 나 어떡해…. (울음 같은 웃음)

나중엔 그 비장애 페미니스트 여성들도 빗장과 함께 활동했어요. 김은정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자기를 어리게 보는 것에 반발하면서 나한테 ‘언니’라고 안 부르겠다는 거예요. 언니라고 부르기 시작하면 언니는 언니다워져야 하는데 자긴 그런 나이주의에 반대한다고 했어요. 알았다고 하면서도 그땐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나이주의가 뭐지?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하루는 칠부 바지를 입고 갔는데 한 장애남성이 소아마비 장애인들은 다리가 왜소한데 영희 씨는 다리가 통통하네요, 했어요. 김은정이 이건 성희롱이라면서 심각하게 문제제기를 했어요. 저는 정확하게 이해가 안 됐어요. 같은 소아마비 장애인으로서 얘기한 건데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 그렇다고 반박할 수도 없었어요. 그 남성의 말이 듣기 좋지도 않았거든요. 나중에야 알게 됐죠. 장애에 있어선 그 남성과 공감대가 있고 동시에 나는 여성이기 때문에 불쾌함도 느꼈다는 거, 이중적인 감정이 생긴다는 것을요. 장애여성에게는 장애와 여성이라는 교차성이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설명할 언어가 없었죠. 그 시절엔 야단을 많이 맞았어요. (웃음) 집회 갈 때 예쁘장하게 화장하고 가면 복주가 “언니! 이건 아니거든요!”라고 했어요. 투쟁하러 갈 땐 거칠고 강한 모습으로 나가야 한다고요.

97년에 미국 워싱턴에서 세계장애여성리더십포럼이 열렸어요. 장애여성 리더를 키워야 한다는 취지의 국제대회였는데 13명으로 구성된 한국대표단이 꾸려졌는데 제가 사람들과 관계를 잘 맺는다면서 단장도 맡으라고 했어요. 처음엔 못 간다고 했었어요. 엄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고 참가비도 부담이 되었거든요. 그런데 꼭 가야 한다면서 빗장에서 일일호프를 열어서 돈을 모아줬어요. 16시간 비행기 타고 워싱턴 하얏트 호텔에 도착했는데 우와! 문화적 충격이 어마어마했어요.

미국 공항에 마중 나온 밀알교회 특장차. 생애 처음 리프트특장차를 보면서 안기거나 업히지 않고 휠체어 채로 차를 탈 수 있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 몇 년 후, 이동권 투쟁으로 우리나라에도 장애인콜택시가 도입되었을 때 너무 감동적이었다. 사진 제공 박김영희  
미국 공항에 마중 나온 밀알교회 특장차. 생애 처음 리프트특장차를 보면서 안기거나 업히지 않고 휠체어 채로 차를 탈 수 있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 몇 년 후, 이동권 투쟁으로 우리나라에도 장애인콜택시가 도입되었을 때 너무 감동적이었다. 사진 제공 박김영희  

호텔 안에 82개국에서 온 장애인들로 북적북적했어요. 처음 본 게 너무 많았어요. 우와! 자동차에 리프트가 달렸어! 저거 봐! 전동휠체어야! 어머, 어머머, 휠체어를 발로 운전하는 사람이 있어! 우리는 호텔 로비에 앉아서 연신 감탄했어요. 누가 업어주지 않고 밀어주지 않아도 된다는 게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우리는 몸에 찬 보조기구를 어떻게든 숨기려고 긴 치마를 입는데 거기 갔더니 다리에 보조기구를 한 사람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녔어요. 팔이 절단된 여성이 누드로 찍은 사진도 있고요. 몸의 차이를 당당하게 드러내는 모습이 우리와 너무도 달랐죠.

아시아의 장애여성들은 얼마나 맞아 죽는지 얘기하고 아프리카 장애여성들은 얼마나 굶어 죽는지 얘기하는데 유럽 장애여성들은 레즈비언이 어쩌고저쩌고했어요. 한국은 우리가 얼마나 성폭력을 당하는지 이야기해야 하는데 제대로 조사된 것조차 없어서 오로지 경험에 기대야만 했어요. 그런데 레즈비언이라니, 완전 신세계죠!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한국에 돌아가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아요. 장애 있는 몸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장애여성의 성에 대해 이야기하기, 그리고 성소수자 운동과 함께 가기 같은 것들이요. 언젠가 연구소에서 독립해 우리만의 단체를 만들 때를 대비해서 온갖 자료들로 가방을 꽉꽉 채워서 돌아왔어요. 어휴, 휠체어가 무거워서 밀리지가 않을 정도였어요.

1997년 6월, 국제장애여성리더십포럼에 다녀오니 당시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활동하던 배복주 간사가 부당해고를 당했다. 이에 대해 연구소에 사과받고 나온 후 다 함께 찍은 사진. 제일 오른쪽이 박김영희 대표. 사진 제공 박김영희  
1997년 6월, 국제장애여성리더십포럼에 다녀오니 당시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활동하던 배복주 간사가 부당해고를 당했다. 이에 대해 연구소에 사과받고 나온 후 다 함께 찍은 사진. 제일 오른쪽이 박김영희 대표. 사진 제공 박김영희  

- 고덕동 거북이 시스터즈

독립의 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어요. 미국 가기 전에 연구소와 빗장의 갈등이 한창 깊었는데 한국에 왔더니 연구소에서 배복주를 해고했더라고요. 복주가 빗장의 편에서 연구소와 대립했기 때문이에요. 더 이상 연구소와 함께 할 수 없었어요. 우리는 대표를 찾아가서 사과받아내고 그 길로 연구소를 나왔어요. 그때 저는 오랫동안 꿈꾸던 일을 행동에 옮길 때가 왔다고 생각했어요. 가족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꿈이요. 편찮으신 엄마를 돌볼 사람이 필요해서 부모님이 남동생네로 옮겨가시게 되었어요. 저는 부모님을 따라가지 않고 빗장의 동료이자 친구였던 영란, 순천과 같이 독립해 살기로 했어요.

두 사람 다 장애를 갖고 있었죠. 집에다간 나 결혼한다 생각하고 500만 원만 달라고 했어요. 남동생 이름으로 대출도 천만 원 받았어요. 영란이는 자립 계획서를 써서 식구들 앞에서 발표했고 부모님이 대출을 천만 원 받아서 주셨어요. 그렇게 전세금 2,500만 원을 마련했어요. 고덕동에 방 두 칸짜리 반지하 집을 구했어요. 그 공간을 아지트 삼아서 빗장 이후의 활동을 구상해 나가기로 했어요. 97년 8월 31일에 이사했어요. 김은정이 형광등을 달면서 우리도 남자 없이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돼, 라고 했던 게 기억나요. 며칠 안 되어서 복주가 짐 싸들고 들어왔어요. 중증의 언니들 셋만 사는 게 불안했던지 내쫓아도 안 나간다면서 눌러앉았어요. 그때부터 사는 게 너무너무 바빠졌어요.

‘장애여성공감’에서 처음 제주도로 캠프 가서 다큐 ‘거북이 시스터즈’(2003) 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영란, 영희, 순천.
‘장애여성공감’에서 처음 제주도로 캠프 가서 다큐 ‘거북이 시스터즈’(2003) 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영란, 영희, 순천.

동사무소 가서 우리가 지원받을 수 있는 게 뭐가 있느냐고 물었어요. 장애인 셋이 산다니까 시설인 줄 알고 관리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더라고요. 그런 사람 없고 우리 스스로 산다고 했더니 가족에 한해서만 지원받을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장애남성이랑 결혼을 하라더라고요. 황당하죠. 셋 중 저만 생활보호대상자여서 임대아파트를 신청할 수 있었는데, 운 좋게 당첨되더라도 가장 작은 1인용 아파트밖에 받을 수 없었어요. 성씨가 다른 셋이 함께 살 희망이 없었어요. 결국 우리 스스로 살아남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부터 우리는 성씨가 달라도 동반자로 인정되고 제도로 지원되는 대안가족제의 필요성을 요구했어요.

직업을 가질 수 있을까 해서 여성민우회에서 하는 텔레마케터 전문 교육을 받으러 다녔어요. 처음 한 일은 전화로 인터넷 학습프로그램을 파는 거였어요. 한 건 성사하면 10만 원을 받기로 하고 하루 종일 전화통을 붙들고 살았어요. 나중엔 목소리만 들어도 이 사람이 금방 끊을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게 되더라고요. 3개월 동안 2건 성사했어요. 축하한다고 우리끼리 박수쳐주면서 좋아했는데 20만 원을 받기도 전에 회사가 망해서 도망가 버리는 바람에 전화요금만 수십만 원 깨졌죠. (웃음)

1997년 고덕동 집에서 경제활동으로 하루에 백여 통이 넘는 전화를 거는 텔레마케팅 노동을 하던 시절의 모습. 사진 제공 박김영희
1997년 고덕동 집에서 경제활동으로 하루에 백여 통이 넘는 전화를 거는 텔레마케팅 노동을 하던 시절의 모습. 사진 제공 박김영희

나중엔 SK텔레콤 고객 정보 관리하는 일을 했어요. 핸드폰 가입하면서 계좌번호, 주민번호를 쓸 때 잘못 기재한 것들을 전화해서 수정하는 일이었어요. 복주가 명단을 받아오면 우리 셋이 종일 전화를 돌렸어요. 수정할 때마다 1,000원씩 받았어요. 낮엔 사람들이 일하느라 바쁘다면서 끊어버리기 때문에 저녁에 다시 걸어야 할 때가 많았어요. 아침에 시작해서 밤늦게까지 줄기차게 전화를 붙들고 있어야 하는 일이었어요. 어떤 사람은 운전 중인데 졸린다면서 얘기 좀 더 하면 안 되냐고 하고 어떤 사람은 만나자고 따로 연락이 오기도 했어요.

장애여성들의 일자리가 다 그런 식이었어요. IMF로 비정규직 일자리가 확산될 때여서 재택으로 하는 이런 일들이 막 나오기 시작한 때였던 것 같아요. 당시 추천받았던 일 중에 룸살롱 여성들을 연결해주는 일이나 폰섹스를 하는 전화방 같은 것도 있었어요. 전화만 있으면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고 그나마 벌이가 괜찮다면서 장애여성들 사이에선 종종 이야기되더라고요. 성매매 현장에서 장애여성들의 성이 어떻게 판매되는지 그때 알았어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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