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해방운동가 생애기록 - 전사들의 노래
존재 확인, 내 인생의 숙제 _ 박김영희①
영희의 집에서 세 차례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집에선 휠체어에서 내려와 생활하기 때문에 노트북이나 약, 리모컨처럼 그의 손닿는 곳에 있어야 할 것들은 모두 바닥에 있고 책장도 화분들도 낮게 배치되어 있었다. 우리 집에선 바닥에 있는 것들이 너저분하게 보이는데 여기선 모두 알맞게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신기했다. 그것들을 내려다보며 서 있으니 갑자기 내가 거인처럼 커다랗게 느껴져서 얼른 바닥에 앉았다. 책장에 꽂힌 책들도, 하얀 선반 위의 초록 식물들도, 오밀조밀한 퀼트 소품들도 앉아서 보니 한결 더 아름답고 단정한 방이었다.
그 방에서 했던 인터뷰를 떠올리면 왜인지 머리 위로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다녔던 것처럼 느껴진다. 그의 목소리가 새가 지저귀듯 시종 명랑했단 뜻이지만 어쩌면 그의 별명이 참새라는 말을 들어버린 것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죽으면 입만 동동 뜰 거라고 그의 친구들이 예언했다는데 과연 이 인터뷰는 내가 해본 가장 긴 인터뷰가 되었다. 우리는 세 번 만났고 총 10시간 정도 이야기했는데 그는 고단한 기색이 없고 나는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그는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었고 그것은 세상과 그만큼 마찰하면서 살아왔다는 뜻이다. 박김영희는 장애여성공감을 만들었고 장애인이동권연대의 공동대표를 지냈으며 한때는 진보 정당의 정치인으로, 지금은 장애해방열사_단과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여성 운동가로서 남성중심적이고 비장애중심적 운동사회를 가로지르며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왔다.
2001년에 시작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기록한 박종필 감독의 다큐 ‘버스를 타자’의 마지막 부분엔 국가인권위원회를 점거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맨 앞에 나선 대표들 중 유일한 여성이 영희였다. 내가 장애인운동이라는 신세계를 접했을 때부터 그는 그 자리에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마이크를 쥐고 있었을 것처럼 의연하고 당차 보였던 그의 당시 나이가 마흔둘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박종필의 영상 기록 덕분에 20년이 흘러 마흔셋의 내가 마흔둘의 영희를 바라볼 수 있다. 그땐 참 커다랗고 믿음직스럽게 나이 들어 보였던 영희가 그렇게 자그맣고 앳돼 보일 수가 없고 그래서 새삼스럽게 그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이 이야기는 그때로부터 40년 전인 1961년 강원도 동해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사회적 자원을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던 한 여성이 어떤 사회변혁 운동의 대표가 되어가는 이야기다. 새로운 세계를 만나 휩쓸리고 흔들리면서 단단하게 균형을 잡아나가는 이야기다. 수없이 많은 사람과 만나고 부딪치면서 선명해지고 고유해지는 한 사람의 이야기다. 한 번도 지도로 그려진 적 없는 세계에 태어난 사람이 미지의 땅을 탐험하면서 스스로 지도가 되는 이야기다. 한국 사회라는 역사의 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한 장애여성들의 이야기다.
할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할머니는 딸이 여섯인 집의 막내였어요. 할머니의 아버지가 목사였는데 딸 여섯을 모두 교육 시켰어요. 둘째 언니는 서울 이화여고로 유학 가서 나중에 이화여고 교장선생님을 하셨어요. 우리 할머니는 한글도 알고 일본어도 알았어요. 6·25전쟁 때 남편(할아버지)이 돌아가셔서 혼자서 아들 셋을 키우셨어요. 남의 집 식모살이하고 살았어도 자긍심이 있던 분이었어요. 딸이 없다는 걸 늘 아쉬워하면서 손녀를 낳으면 이화여고 보내겠다는 높은 꿈을 갖고 계셨는데 제일 먼저 태어난 손녀가 장애인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웃음)
저는 1961년에 강원도 동해 묵호에서 태어났어요. 1960년대 강원도는 시멘트, 무연탄 수출 산업이 번성했는데 아버지는 그걸 운송하는 해운회사에 다니셨어요. 외국 선박들이 와서 물건을 싣고 출항해 나가는 동안 아버지가 그걸 준비하는 일을 하셨어요. 집에 외국인 선장들이 자주 놀러 와서 엄마가 음식을 해주셨어요. 남자들한테 기죽지 않고 살려면 여자가 똑똑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할머니와 외국문화를 많이 아는 아버지 아래에서 성장했어요. 1남 4녀 중 장녀예요. 삼촌들까지 있었던 대가족이었는데도 할머니 사랑을 온전히 받았어요. 할머니가 당신 어렸을 때 이야기를 많이 해줬어요. 당신 할머니한테 딸이라고 구박을 많이 받아서 자긴 절대 딸이라도 구박 안 할 거라고 다짐했었대요. 이화여고 다녔다던 할머니의 둘째언니는 유관순의 친구였대요. 삼일절에 만세 불렀다고 이화여고 학생들이 몽땅 붙잡혀갔을 때 고향으로 피신을 와서 산에 숨어있었던 둘째언니한테 우리 할머니가 밥을 갖다 날랐다고 했어요.
할머니는 가끔 서울 사는 언니한테 다녀왔는데 그때마다 나 주려고 소꿉 장난감을 사오셨어요. 내가 좋은 걸 갖고 있어야 애들이 나랑 놀고 싶어 한다면서요. 애들이 장난감 보려고 맨날 놀러 왔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학교에 가야 된다면서 안 오더라고요. 아, 학교라는 데는 되게 좋은 덴가 보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좋은 데를 나는 안 보내주더라고요. 내가 학교에 가려면 누군가 나를 업어다 줘야 하는데 엄마는 동생들을 돌봐야 했으니까요. 그러다 여동생이 입학할 때 저도 같이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할머니가 날 업어서 교실에 앉혀놓고 가면서 동생한테 언니 잘 도와주라고 신신당부했는데 학교만 가면 동생은 어디 갔는지 없어졌어요. 그러다 “영신아” 부르면 또 금세 어디선가 나타났어요. 매일은 못 가고 평소엔 학습지 같은 걸 받아와서 공부하다 시험 때만 갔던 건데 그것도 2학년까지밖에 못 다녔어요. 작은엄마가 돌아가셔서 할머니가 사촌동생을 키워주러 가셨거든요.
할머니는 아침에 나를 싹 씻겨서 대문 앞 의자에 앉혀놓으셨어요. 지나가는 사람 구경하라고요. 아침에는 동네 할머니들이 손주들을 업고 와서 영희야, 나왔나, 하고는 옆에 앉아서 이야기를 했어요. 들어보면 며느리 이야기였어요. 점점 할머니들이 많아져서 동네 소식을 다 들을 수 있었어요. 오후가 되면 이번엔 동네 며느리들이 애를 업고 와서는 시어머니 이야기를 했어요. 얘기가 끝나면 사람들은 아휴, 어린 너한테 뭐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돌아갔어요. 그때 알았어요. 시어머니 이야기는 며느리한테 하면 안 되고 며느리 이야기는 시어머니한테 하면 안 된다는 걸. (웃음) 아버지는 저녁을 먹을 때 언니한테 들려주라고 동생들에게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는지 다 얘기하게 했어요. 대문은 항상 열려있어서 동생 친구들이 동생 없을 때도 놀러 와서 이야기하다 갔어요.
- 내가 도망칠 곳
할머니한테서 한글을 배웠어요. 할머니가 작은아버지 댁으로 가신 후엔 별로 할 게 없어서 책을 봤어요. 한국문학전집, 세계문학전집을 읽었는데 러시아 문학은 왜 그렇게 어둡고 캄캄하던지. 새소년, 어깨동무 같은 잡지는 펼치면 처음부터 끝까지, 편집자 이름까지 다 봤어요. 나이가 들면서는 은근히 할 일이 많아졌어요. 강릉여고 다녔던 동네 언니가 방학 때 와서 바느질을 가르쳐줘서 동생들 바느질 숙제를 대신해 줬어요. 나중엔 반공 포스터도 그리고 글짓기 숙제도 해줬어요. 계속해주다 보니 나중엔 안 하면 내 잘못처럼 되었어요. 동생들 방학 땐 내가 제일 바빴어요. (웃음)
아버지는 나중에 직접 해운회사를 운영하셨는데 사업이 잘 안 되어서 빚이 늘어났어요. 부모님 언성이 높아지면 동생들은 에이, 신경질 나! 하면서 뛰쳐나가 버리는데 나는 그러질 못하니까 방에서 책만 보았어요. 머릿속으로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데도 눈은 책에 고정하고 있었어요. 나는 도망칠 곳이 거기밖에 없었으니까요. 무너지는 아버지도 보고 점점 좌절해가는 엄마도 보고 성장해가는 동생들도 모두 지켜봤어요. 그렇게 굉장히 오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요. 스물다섯이 될 때까지.
어느 날 라디오를 듣다가 장애인들이 서로 편지를 주고받는 모임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때 저는 세계문학을 읽으면서 그들의 정신세계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궁금했어요. 그러려면 성서를 공부해야겠더라고요. 모임 회장한테 편지로 그 이야기를 했더니 우편으로 천주교 교리를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서 알려줬어요. ‘통신 교리’였어요. 신청했더니 학습지 같은 작은 책이 왔어요. 내용을 공부한 뒤 문제지를 풀어 보내면 점수가 매겨져서 왔어요. 그렇게 몇 차례 우편이 오고가던 중이었는데 어느 날 처음 보는 수녀님이 찾아왔어요. 모임 회장이 우리 동네 성당에 편지를 써서 나를 찾아가 보라고 부탁한 거예요. 그게 인연이 되어서 신부님이 우리 집에 찾아왔고 나중엔 영세까지 받았어요.
신부님은 한 달에 한 번 우리 집에 오셨는데 그때마다 빨간 보자기에 책을 싸서 오셨어요. 그중에 천주교에서 나오는 잡지가 한 권 있었는데 거기에 내 이야기를 써서 보냈어요. 그랬더니 전국의 교도소에 있는 재소자들에게서 편지가 왔어요. 답장 쓰느라 아주 바빴어요. 나중엔 라디오에도 사연을 보냈어요. 우리 집에서 일어난 사건들, 엄마, 동생들의 이야기, 그리고 내 생각을 썼죠. 그러니까 밥통도 오고 보온병도 와서 엄마가 무척 좋아하셨어요. (웃음) 그때부터 쓰기 시작했어요. 사연 쓰고 답장 쓰느라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었어요.
우리 아파트에 여섯 살 된 수정이라는 아이가 있었어요. 그 애가 나한테 온 편지를 우리 집까지 항상 배달해줬어요. “수정아, 글을 알아?”하고 물었더니 글은 모르지만 우리집 우편함 위치는 안대요. 그럼 내가 한글 가르쳐줄게, 하고서는 한글, 숫자, 시계 보는 법을 알려줬어요. 며칠 뒤에 수경이 친구 태경이가 태경이 엄마 손을 붙잡고 왔어요. 그 애들한테 하루에 두 시간씩 동화책을 읽어 줬어요. 점점 아이들이 많아졌어요. 미루 엄마, 탁희 엄마가 아이들을 데려와선 자긴 선생님이었는데도 자기 아이를 가르치는 건 어렵다고 했어요.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건 즐거운 일이었어요. 많진 않지만 수입도 생겼고요.
탁희는 귀엽고 미루는 예민하고 승빈이는 점잖고 태경이는 겁이 많았어요. 매일이 사건이었지만 재밌었어요. 아이들은 나를 꼬박꼬박 선생님 대접을 해줬어요. 그리고 엉뚱하고 솔직했어요. 선생님은 왜 못 걷게 되었어요? 선생님은 어떻게 화장실 가요? 그 애들이 질문할 때마다 나를 정직하게 마주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사연을 라디오에 보냈더니 좋은 글로 뽑혀서 몇십만 원 하는 숙녀복을 받았는데 나한텐 맞지 않더라고요. 세상의 기성복에 내 몸은 맞지 않는다는 걸 인식하게 됐어요.
- 처음 집을 떠난 날
나란 존재는 뭘까,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까, 하는 생각에 골몰하던 때 잡지를 보다가 부산에 있는 ‘사랑의 고리’라는 공동체를 알게 되었어요. 수녀가 되고 싶지만 장애가 있어서 될 수 없는 여성들의 공동체였어요. 그곳의 언니들과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어요. 내가 쓴 편지를 모임 할 때마다 함께 읽는다고 했어요. 어느 날 그곳의 언니 둘이 우리 집까지 나를 데리러 왔어요. 집에서만 살지 말고 나가서 한번 살아보라고, 며칠 자기들과 지내면서 경험해보자고 했어요. 출장 간 아버지한테 전화했더니 다음에 당신이 데려갈 테니 가지 말라고 했어요. 엄마는 자기가 다 책임지겠다면서 다녀오라고 했어요. 그날 처음으로 집을 떠나보았어요.
한 언니는 청각장애가 있었고 한 언니는 턱에 장애가 있었어요. 언니들이 나를 업고 버스에 태우고 휠체어를 싣고 힘에 부치면 아저씨들을 붙잡아서 도움을 청했어요. 부산까지 일곱 시간 갔어요. 도착했을 땐 밤 11시였는데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어요. 택시! 택시! 하고 부르는데 아무도 우릴 안 태워줬어요. 언니들이 택시를 잡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걸 가만히 앉아 바라보면서 흥, 내가 돈을 안 내겠다는 것도 아닌데 왜 안 태워주는 거야? 하고 생각했어요. 이럴 줄 알고 아버지가 가지 말랬구나, 아버지 말 들을 걸, 오지 말걸, 후회했어요.
사랑의 고리는 이해인 수녀님이 계시는 베네딕토 수녀회 안에 있었는데 방 두 개가 딸린 조그만 집이었어요. 다음날이 되니까 사랑의 선교회 수사님들이 판자촌에 봉사하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했어요. 내가 거길 어떻게 가요? 하니까 걱정하지 말래요. 가보니까 엄청 언덕이에요. 휠체어를 힘겹게 밀고 올라가다 계단을 만나면 업기도 하면서 혼자 사는 노인, 장애인들을 찾아다녔어요. 수사님들이 빨래하고 청소할 때 나보고는 할머니들과 얘기를 나누라고 했어요. 그렇게 한 번 가고 두 번 가면서 친해지고 그러다 보면 누군가는 모임에도 나오기 시작한다는 걸 그때 배웠어요.
일주일쯤 지나니까 언니들이 나보고 혼자 버스를 타고 집에 가라고 했어요. 이번에도 나는 “내가 어떻게 가요?” 했어요. 언니들이 할 수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요. 언니들이 나를 버스에 태워주면서 집에 전화를 걸어줬어요. 고속버스 안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낯선 사람들 속에 혼자가 되었어요. 이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다는 마음에 두렵기도 하고 이제 나는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에 설레기도 했어요. 동해 터미널에 도착했을 땐 동생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후부터 일 년에 한 번씩 그렇게 부산에 다녔어요. 3, 4년이 흘러서 87년이 되었을 때 가족이 아예 부산으로 이사를 가게 됐어요. 아버지 사업이 망해서 야반도주하듯 간 거였어요. 부산 외삼촌 집에 얹혀살면서 엄마는 식당에 일하러 다녔어요. 그때 정말 가난이 뭔지 알았어요. 많이 힘들었지만 나는 사랑의 고리에 자주 갈 수 있어서 좋았어요. 한 달에 보름은 거기에서 지내고 보름은 집에서 사는 식이었어요.
장애인 공동체라고 하면 대부분 관리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곳은 장애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이끌고 결정하는 곳이었어요.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죠. 어렸을 땐 스무 살까지만 살다 죽어야지 했어요. 스무 살 이후에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초등학교 다닐 적에 선생님이 아이들한테 너는 커서 뭐가 될래? 하고 물었던 적이 있어요. 한명 한명한테 너는 뭐가 될래? 물으면서 오는데 애들이 대통령 된다, 간호사 된다, 교사 된다, 현모양처 된다, 그랬어요. 나는 뭐가 된다고 하지? 앉아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머릿속이 하얘졌어요. 그때 피아니스트가 딱 떠올랐어요. 텔레비전에서 피아니스트가 앉아서 연주하는 걸 봤거든요. 피아니스트가 된다고 해야지. 선생님이 점점 다가왔어요. 애들이 너 피아노 배웠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하지? 피아노를 본 적도 없었거든요. 앞으로 배울 거야! 라고 할까? 선생님이 내 앞까지 왔어요. 가슴이 콩콩 뛰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나한텐 안 물어보더라고요. 다음에 하자면서 지나가 버리셨어요. 그게 잊혀지지가 않아요. (웃음)
- 나는 커서 뭐가 되지
밤마다 울었어요. 나는 낮달 같은 존재였죠. 떠 있는데 아무도 내가 거기 떠 있는지 몰랐어요.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거라곤 사부작사부작 글 쓰고 편지 쓰는 것뿐이었어요. 스무 살 이후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고 모델도 존재하지도 않았어요. 베란다에 앉아 창밖의 코스모스를 바라보던 날이었어요. 아, 예쁘다, 하면서 생각해요. 나는 작년에도 이걸 보고 있었는데 올해도 이러고 있네. 내년에도 그러겠지? 밤에 누워서 동생들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내 얘긴 별로 할 게 없었어요. 나는 귀만 있고 입은 없었어요. 난 앞으로 뭘 하고 살지? 할 수 있는 게 없네?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몸으로 뭔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난 뭘 하고 살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한참 후의 일이고 그때 나에겐 언어조차 없었어요.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뭐가 갑갑한지도 잘 몰랐어요.
그랬던 내가 사랑의 고리에선 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 거기 사는 사람은 세 명이었지만 훨씬 많은 장애여성들이 드나들었어요. 모임을 하면 한 달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생각을 하면서 보냈는지에 대해 돌아가며 이야기했어요. 나처럼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어요. 우린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먹고 놀았어요. 자원활동하는 비장애 청년들과 함께 노래도 부르고 집에 사는 장애인들을 불러내서 크리스마스, 부활절 행사도 같이했어요. 광안리 바닷가에 가서 물놀이도 하고 1년에 한 번은 경기도의 피정센터에 모여서 2박 3일간 발표회와 명상도 했어요. 사람들이 날 보고 너 참 잘한다고 칭찬했어요. 표현하는 거, 쓰는 거, 어떤 사람을 관찰해서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말이나 조언하는 걸 내가 잘해준대요. 그 속에서 처음으로 내가 나라는 존재로 인정받았던 것 같아요.
신부님은 우리는 모두 고유한 존재라고 말씀하셨어요. 각자 다른 나뭇잎이 모여 아름다운 나무가 되는 것처럼 우리도 서로의 다름을 미워하지 않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고요. 세상에 존재하는 건 다 이유가 있으니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고요. 모두에겐 자유의지가 있으니 네가 원하는 걸 선택하면 된다고 하셨어요. 또 사람은 살면서 계속 바뀐다고, 어렸을 땐 보호받아야 하는 자식이었다면 성장해선 누군가를 보호해줘야 되는 입장으로 변한다고도 했어요. 환경과 조건, 나이에 따라서 인간은 그 위치가 바뀌고 그것에 따라 새롭게 자신을 정체화해야 한다고 이해했어요. 그때 저는 세상을 다르게 보는 훈련을 했던 것 같아요.
90년에 부모님과 함께 서울로 이사를 와 서울 사랑의 고리에 다니면서 지냈어요. 저는 그 공동체에 들어가 수도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마음 아픈 사람, 힘든 사람들이 찾아와 이야기하면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면서 살겠다고요. 그런데 사랑의 고리에서 나를 받아줄 수 없다고 했어요. 여긴 장애인수용시설이 아니라고 했어요. 나는 내가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에게 나는 그저 돌봐줘야 할 사람이었던 거예요. 거부당했다는 상처가 꽤 컸어요. 이제 어떻게 살아야 되지? 뭔가 답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고민이 시작되었어요. 그때 장애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상담하는 장애인 동료상담이란 걸 알게 되었어요. 언젠가 저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했어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