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최옥란 열사 20주기 기념 토론회 열려
정태수는 장애인 노동권의 시작
최옥란은 반빈곤운동의 뿌리
이들을 오늘날 투쟁현장에서 만나려면

정태수와 최옥란. 진보적 장애인운동계에서는 이들의 기일을 명절처럼 기린다. 매해 3월 1일이면 전국 각지에서 활동가들이 모여 2002년 3월 3일에 떠난 정태수 열사를 추모한다. 최옥란 열사는 2002년 3월 26일에 떠났는데, 활동가들은 이 날을 고유명사처럼 ‘3·26(삼이륙)’이라 부르며 매해 전국장애인대회를 연다. 이처럼 정태수와 최옥란은 오늘날 장애해방운동과 반빈곤운동의 활동가들을 단단하게 묶고 있다.

‘열사’라고 하니 아주 오래 된 역사 속 인물 같지만 그렇지 않다. 정태수는 1967년생, 살아있었으면 한국식 나이 계산법으로 올해 56세다. 최옥란은 정태수보다 한 살 많은 1966년생, 올해 57세다. 이들은 각각 36세와 37세를 일기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정태수는 제 손으로 꾸린 제1회 장애인청년학교 수료식날 뒤풀이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최옥란은 명동성당 농성을 마치고 세 달 후 음독을 시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최옥란 열사(왼쪽), 정태수 열사(오른쪽).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최옥란 열사(왼쪽), 정태수 열사(오른쪽).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20년 전 세상을 떠난 장애해방열사를 기억하고, 20년 후인 오늘날 열사의 삶과 죽음을 다시 이야기하는 일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정창조 박종필추모사업회 활동가는 “열사를 ‘열사답지 않은 모습’으로 새로 그려내서, 동등한 위치에서 열사와 우정을 나누자”, “지금, 여기에 열사의 음성을 새기는 정치적 실천을 하자”고 이야기한다.

열사와 동등한 위치에서 우정을 나누고, 지금 여기에 열사의 음성을 새기는 일은 어떤 걸까. 열사가 오늘날 우리 옆에서 장애해방운동을 함께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20년 전 세상을 떠난 정태수와 최옥란이, 현재 모욕과 지지를 한꺼번에 받고 있는 출근길 지하철 시위 한가운데에 있다면 그들은 무슨 말을 했을까. 상상 속 열사의 말이 내 입을 통해 구호와 발언으로 나온다면 어떨까. 상상 속 열사에게 말 걸고 그들과 대화를 나눠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장애해방운동 활동가들은 열사를 오늘날로 불러와 더 큰 투쟁으로 확장해 가자고 이야기한다. 정창조 활동가는 “우리는 열사의 이 시대에 대한 응답을 통해, 그 응답에 따라서만이 새로운 시대를 준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열사정신계승위원회 위원장은 “우리는 열사가 그토록 바랐던, 장애인을 조직하고 장애인의 힘으로 자본주의 경쟁관계의 계산방식을 바꾸는 투쟁을 하고 있다. 앞으로도 시대에 도전하는 투쟁으로 새롭게 확장해 가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이런 이야기들은 지난달 22일 열린 ‘정태수·최옥란 열사 20주기 기념 토론회 – 장애해방열사 정신 계승의 의미와 과제’에서 나왔다. 이날 토론회에는 80·90년대에 열사들과 함께 투쟁한 동료들, 열사의 삶과 죽음을 기록하고 투쟁을 이어가는 활동가들이 참석했다.

토론회 현장. 참가자들이 앉아 있다. 사진 하민지
토론회 현장. 참가자들이 앉아 있다. 사진 하민지

- 정태수, 장애인 노동권 투쟁의 시작을 만든 조직가… 오늘날의 ‘권리중심일자리’로

“이것도 노동이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노동을 합니다”

“재활을 넘어 권리생산의 주체로”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아래 권리중심일자리) 관련 구호들이다. 권리중심일자리는 2020년 7월, 서울시에서 260명의 중증장애인을 대상으로 처음 시작됐다. 이들은 장애인편의시설 모니터링, 현장 캠페인, 장애인권 인식개선 강의, 집회현장 등에서의 춤과 노래,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사회적 홍보 등의 노동을 하고 돈을 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일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중증장애인이 ‘권리생산’이라는 이름의 노동을 한다.

그간 장애인은 노동시장에서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여겨져 왔다. 진보적 장애계에서는 자본주의·이윤창출·경쟁사회·비장애인 중심의 생산성 기준을 거부하며 장애인 노동권 보장을 외쳐왔다. ‘장애인에게도 일자리를 달라’가 아니라 ‘장애인에게 맞는 일자리를 만들라’라며 새로운 노동개념을 제시했다.

장애인운동의 역사는 노동권 보장의 역사와 궤를 함께한다. 1989년 양대법안 투쟁(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 심신장애자복지법 개정), 1995년 최정환 열사 죽음 이후 조직된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 1996년 장애인 1500명을 거리에 세웠던 장애인 고용촉진 걷기대회가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현장에 정태수가 있었다. 특히 13박 15일 동안 제주에서 서울까지 전국을 돌며 장애인 노동권 보장을 요구한 장애인 고용촉진 걷기대회는 정태수의 빛나는 업적으로 기억된다.

김병태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회장이 발표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김병태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회장이 발표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정태수는 장애인 노동권 투쟁의 시작이에요. ‘장애인 고용촉진 걷기대회’를 홀로 외롭게 조직해서 ‘장애인 노동권을 쟁취하자’, ‘노동을 통해 장애인도 사회에 참여하자’고 외쳤어요. 그때 태수는 장애인을 조직하면서 ‘발굴한다’고 했어요. 장애인을 만나기 얼마나 어려우면 그런 말을 했겠어요. 그 시절에 전국을 돌면서 1500명을 조직한 거예요.” (박경석 전장연 열사정신계승위원회 위원장)

“장애인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노동을 할 수 없는 몸으로 부정돼 왔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기생적 소비계층’으로만 살아야 했습니다. 정태수는 이런 현실에서 장애인 노동권 쟁취를 위해 제주에서 서울까지 행진하며 전국을 휘젓고 다니던 목발의 투사였습니다. 맨날 하던 말은 ‘장애인을 어떻게 조직할 거냐’였습니다. 각 대학교에 가서 목발이라도 짚고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만나고 그랬어요.” (김병태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회장)

“정태수에 대한 가장 빛나는 기억으로 사람들은 주저 없이 ‘장애인 고용촉진 걷기대회’를 꼽았다. (중략) 노동권에 대한 전장협(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전장연의 전신)의 의지를 잘 보여주는 사업이었는데, 이 대회를 주도한 사람이 바로 정태수였다. 정태수의 동료였던 김종환은 그의 정신으로 노동권과 조직화를 꼽았는데, 이 전국적 걷기대회야 말로 그의 지향과 강점이 가장 잘 결합해 탄생한 작품일 것이다.” (《유언을 만난 세계》, 오월의봄, 2021, 203쪽)

박경석 전장연 열사정신계승위원회 위원장이 발표하고 있다. 박 위원장의 뒤로 정태수 열사의 사진과 ‘장애해방’이라고 적힌 문구가 보인다. 사진 하민지
박경석 전장연 열사정신계승위원회 위원장이 발표하고 있다. 박 위원장의 뒤로 정태수 열사의 사진과 ‘장애해방’이라고 적힌 문구가 보인다. 사진 하민지

박경석 위원장은 정태수의 노동권 쟁취 투쟁이 오늘날의 권리중심일자리로 이어졌다고 했다. 권리중심일자리가 단순히 장애인을 고용해 일을 시키고 월급을 주는 일자리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려져 왔던 장애인의 권리를 장애인 당사자가 생산하는, 자본주의에 저항하며 평등을 외치는 일자리인데 이 뿌리가 정태수의 조직에 있다는 것이다.

“정태수가 20여 년 전 이야기하려고 했던 게 오늘날의 권리중심일자리가 아닐까 합니다. 당시 태수를 비롯해 소수의 몇 명 활동가들이 노동권 투쟁을 하지 않았다면 전장연이 지금 하고 있는 노동권 투쟁이 가능했을까요? 자본주의 시장이 장애인을 ‘비경제활동 인구’라 치부해 왔고, 우리의 투쟁으로 만든 권리중심일자리는 이런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를 바꾸는 일자리입니다. 그 시작이 정태수였습니다.

‘자본주의 시장에 장애인의 자리를 조금이라도 할당해 주세요’라고 외쳤던 시대에 정태수는 장애인 당사자의 힘으로 불평등에 저항하자고 했던 조직가였습니다. 그 투쟁이 오늘날 권리중심일자리로 확장됐습니다. 노동권 투쟁은 사회복지의 결과물을 떡고물처럼 받아먹으라는 걸 거부하고, 자본주의의 방식대로만 사람이 사회와 관계 맺어져 있는 걸 바꾸는 투쟁입니다. 앞으로도 시대에 도전하는 투쟁으로 새롭게 확장해 갑시다.” (박경석 전장연 열사정신계승위원회 위원장)

2018년 8월 21일, 광화문 농성 6주년을 맞이하여 활동가들이 농성장이 있던 자리에 이를 기념하는 현판을 달았다. 사진 강혜민
2018년 8월 21일, 광화문 농성 6주년을 맞이하여 활동가들이 농성장이 있던 자리에 이를 기념하는 현판을 달았다. 사진 강혜민

- 최옥란, 반빈곤운동의 시작… ‘광화문 농성 1842’일의 저항정신으로

1842일, 장애등급제·부양의무자기준·장애인수용시설 폐지를 외치다!

2012.08.21 ~ 2017.09.05

광화문역 지하에 달린 현판 문구다. 이 현판이 있는 자리에 농성장이 하나 있었다. 현판에 적힌 것처럼 장애등급제·부양의무자기준·장애인수용시설 폐지를 요구하는 농성장이었다.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은 2012년 8월 21일, 이 세 가지 폐지를 국가에 요구하며 무기한 농성을 시작했다.

2017년, 전직 대통령 박근혜 씨가 물러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전 장관은 2017년 8월 25일, 농성장을 찾아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은 파기됐다. 장애등급제는 ‘장애정도’로 바뀌었고, 등급제에 따라 부여하던 복지서비스는 ‘종합조사표’에 따라 부여한다. 부양의무자기준은 교육급여, 주거급여에선 폐지됐으나 생계급여에선 완화되는 데 그쳤다. 의료급여는 폐지 계획조차 없는 상황이다.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활동가는 비록 문재인 정부가 약속을 파기했지만 1842일이라는 끈질긴 농성이 운동의 희망이 됐다고 이야기한다. 기초법 개정, 부양의무자기준 폐지, 최저생계비 인상, 기준중위소득 인상 등 반빈곤운동은 광화문 농성의 희망을 안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김윤영 활동가는 이 운동의 시작점에 언제나 최옥란이 있다고 말한다.

“기초법은 2000년 10월 시행하자마자 비판에 직면했습니다. 그런데 개정운동은 학자와 전문가를 중심으로 흘러갔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목소리가 조명받지 못 했어요. 그런데 2001년 12월, 또 하나의 흐름이 만들어졌습니다. 명동성당 앞에서 농성을 시작한 노점상이자 장애여성, 기초생활수급자였던 최옥란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문제점을 고발한 첫 번째 당사자입니다. 김대중 정부의 복지제도를 비판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은 최옥란의 싸움으로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활동가)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활동가가 발표하고 있다. 그의 뒤로 최옥란 열사의 사진이 보인다. 사진 하민지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활동가가 발표하고 있다. 그의 뒤로 최옥란 열사의 사진이 보인다. 사진 하민지

최옥란은 정태수 같은 조직가는 아니었다. 김윤영 활동가는 최옥란을 “자신의 문제를 사회문제로 만든 사람”이라고 말한다. 최옥란은 1993년 아들 준호를 얻고 1998년 이혼했다. 양육권은 최옥란보다 경제적 능력이 나았던 남편에게 갔다. 준호와 함께 살려면 돈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1998년 이혼 직후 노점 운영을 시작했는데, 몇 년 못 하고 포기했다. 2000년, 국민기초생활보장법(아래 기초법) 시행으로 기초생활수급자가 됐기 때문이다. 수급자는 소득이 있으면 수급권이 탈락되거나 수급비가 깎였다.

최옥란은 기초법의 문제점을 알리는 투쟁을 하겠다고 장애인 동료들에게 말했는데, 당시 장애인운동은 이동권, 교육권 등의 투쟁과제가 산적해 있어서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최옥란은 포기하지 않았고 서울지역실업운동연대 활동가들을 만나 투쟁을 계획했다.

“최옥란은 자기 생각을 말하면서 늘 ‘이거 아니잖아. 이렇게 해야 하잖아’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주장이 확실했고 고집이 강했어요. 최옥란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이 그를 트러블메이커(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로 기억하곤 합니다. 최옥란은 항상 온몸으로 부당함을 말했지만 들으려는 사람이 많지 않아 늘 외로웠고 그래서 더 비장하게 각오를 다지고 끝장 투쟁을 계획했던 것 같아요. 양육권을 가져오려면 기초법에 전면적으로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병태 정태수열사 추모사업회 회장)

2001년 12월 3일,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위한 명동성당 농성 돌입 기자회견 당시 최옥란 열사(오른쪽). 사진 빈곤사회연대

최옥란은 기초법 실행 1년이 조금 지난 2001년 12월 3일, 노들장애인야학 등 여러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명동성당에서 일주일간의 농성에 돌입했다. 당시 28만 6천 원이던 수급비 인상이 주요한 요구사항이었다. 농성 5일차에는 김원길 보건복지부 전 장관 집에 찾아가 ‘이 돈 가지고 한번 살아보라’라고 쓴 쪽지와 함께 수급비 28만 6천 원을 반납했다.

명동성당 농성이 끝나고 약 석 달 후인 2002년 2월 21일, 최옥란은 음독을 시도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3월 26일 사망했다. 최옥란의 투쟁을 지지하던 시민사회단체는 그가 못 다 이룬 투쟁을 이어가게 된다.

“당시 시민사회단체들은 ‘기본생활권 쟁취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현실화를 위한 연석회의’로 발전해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개정운동을 이어갔습니다. 연석회의는 2004년, 지금 제가 활동하는 반빈곤운동 연대단체 ‘빈곤사회연대’로 발족했습니다. 최옥란이 제기했던 문제들은 현재 수급자가 하는 요구사항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최옥란들’은 싸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활동가)

“최옥란은 명동성당에서 최저생계비 투쟁을 하면서, 그가 겪어야 했던 불행한 개인적 문제의 원인이 제도에 있다고 명확히 지적했어요. 최옥란의 투쟁은 20년의 시대를 흐르면서 광화문 농성 1842일 투쟁의 근간을 만들었고요, 광화문 투쟁의 생명력이 반빈곤운동 현장 곳곳에서 저항정신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박경석 전장연 열사정신계승위원회 위원장)

정창조 박종필추모사업회 활동가가 발표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정창조 박종필추모사업회 활동가가 발표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 장애해방열사를 ‘오늘’ 만나는 방법은

정창조 박종필추모사업회 활동가는 장애해방열사의 죽음이 ‘우리의 바깥’에서 일어난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들의 죽음이 ‘내 이웃의 죽음’ 같은 게 아니라, ‘불쌍한 장애인의 안타까운 사연’ 정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단 뜻이다. 정 활동가는 “장애해방열사들은 ‘우리’보다 너무 불행하고 가련한 존재인 것처럼 취급된다. 이럴수록 ‘우리’와 ‘우리의 바깥’의 경계는 더 뚜렷해진다”고 비판했다.

정창조 활동가는 ‘열사’의 전형적인 이미지, 즉 숭고한 시대정신으로 영웅적 결단을 하는 등의 이미지를 버려야 한다고 설명했다. 최옥란을 아는 사람들이 그를 ‘고집쟁이’, ‘트러블메이커’로 기억하듯, 장애해방열사를 ‘내 곁의 동지’로 기억하자고 했다.

정 활동가는 “거대한 역사적 변혁 따윈 몰랐지만 자기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 삶을 바꾸는 게 더 중요했던 장애해방열사들은 내 곁의 동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자신의 생을 중심으로 한 사소한 요구들이 되레 우리가 거대한 역사적 변혁을 꿈꾸게 만들었고, 세상을 바꿔 왔다. 열사를 열사답지 않은 모습으로 새로 그려내고 열사와 동등한 위치에서 우정을 나눌 때 열사의 위력은 회복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열사가 이 시대에 말을 걸어오는 그대로 기억하고 광장에서 나누는 작업이 필요하다”면서 “오늘날 투쟁 현장에서 열사를 내 곁의 동지로 떠올리고, 열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며, 열사가 지금 여기의 현장에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했을지 상상해 볼 수 있다”고 대답했다.

“역사 바깥으로 내몰린 열사를 역사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나도 가족과 살고 싶고, 지역사회에서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오늘날 동지들 모습 그대로 열사의 상을 그리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열사가 ‘우리의 바깥’이 아니라 ‘우리의 안’에 있을 수 있도록, ‘동지 너머’의 존재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동지’일 수 있도록 합시다. 열사들은 영정이 되어 우리의 대오와 진지 안에서 우리와 함께 세상을 바꾸고 있습니다.” (정창조 박종필추모사업회 활동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비마이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