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시외이동권 전면 부정한 대법원판결
장애인권 퇴행시킨 판결이지만 현행법으로도 시외이동권 보장 가능
국토부 의지만 있으면 대통령령으로 휠체어 탑승 버스 늘릴 수 있어
국토부 산하 교통안전공단 “고속버스 말고 KTX나 장콜 타시라”

토론회 현장. 6명이 참석해 있다. ‘장애인 시외이동권 공익소송 대법원 판결선고에 따른 장애인의 동등한 시외이동권 보장을 위한 현황과 대책마련 토론회’라고 적힌 현수막이 붙어 있다. 사진 함께걸음 유튜브 캡처
토론회 현장. 6명이 참석해 있다. ‘장애인 시외이동권 공익소송 대법원 판결선고에 따른 장애인의 동등한 시외이동권 보장을 위한 현황과 대책마련 토론회’라고 적힌 현수막이 붙어 있다. 사진 함께걸음 유튜브 캡처

시외로 이동하는 전국 고속버스 중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이 탈 수 있는 버스는 단 10대, 0.57%밖에 없다. 노선 또한 턱없이 모자라다. 전체 고속버스 노선 169개 중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노선은 단 4개뿐이다. 현실이 이런데 대법원은 국가도, 지방자치단체도, 버스회사도 책임이 없다고 판결했다.

지난 2월 17일, 대법원은 김아무개 씨 등 교통약자 3명이 대한민국과 서울시, 경기도, 금호고속, 명성운수를 상대로 제기한 ‘장애인 시외이동권 보장을 위한 차별구제소송’에서 ‘정부 책임은 없으며 버스 회사에 휠체어 승강설비를 마련하라는 2심 판결도 잘못됐다’며 파기환송했다. 교통약자들이 처음 소를 제기한 건 2014년 3월이다. 8년을 기다려 나온 대법원판결이 장애인 시외이동권을 전면 부정한 것이라 장애인운동단체와 시민사회단체는 크게 반발했다.

이 가운데 국토교통부 의지만 있다면 현행법 대통령령으로도 충분히 장애인 시외이동권을 보장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지난달 27일 수요일에 열린 ‘장애인 시외이동권 공익소송 대법원 판결선고에 따른 장애인의 동등한 시외이동권 보장을 위한 현황과 대책마련 토론회’에서다.

2014년 1월 27일, 장애인들이 시외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고속버스터미널을 점거하고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2014년 1월 27일, 장애인들이 시외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고속버스터미널을 점거하고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 “장애인을 천민으로 여긴 판결”

이번 토론회가 장애인이동권을 후퇴시킨 대법원판결로 열린 만큼, 해당 판결에 대한 비판으로 토론회가 시작됐다. 김예지 국민의힘 국회의원은 “장애인 시외이동권을 인정하지 않고 국가 책임마저 부정한 법원의 판결을 보면서 대한민국 모든 장애인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부정한 것 같아 매우 유감스럽다”고 비판했다.

장혜영 정의당 국회의원도 “법이 없을 경우 잘못된 사법부 판결로 이어질 때도 있으나 이번 판결은 그렇지 않다. 교통약자법에 장애인이동권이 정확하게 명시돼 있다. 이번 판결은 사법부의 차별적인 장애인 인식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도 날선 비판을 쏟아냈다. 박 대표는 “대법원은 장애인을 천민으로 여겼다. 2014년 1월 시외이동권 투쟁을 처음 시작하고 그해 3월 공익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국토부는 지자체에서 저상버스 도입 계획이 없기 때문에 기획재정부가 재정지원을 할 수 없다고만 했다”며 “투쟁 끝에 2019년에 휠체어 이용자가 탑승 가능한 고속버스 시범사업을 시작했는데, 장애인들이 너무 좋다고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이런 대법원판결이 나오다니 이젠 피눈물이 난다”고 성토했다.

윤정노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2016년에 있었던 검증기일에 2심 재판부가 휠체어 승강 설비가 있는 버스를 탑승해 보고 싶다고 해서 변호인단이 검증신청을 했다. 그래서 재판부, 소송관계인 등이 실제로 탑승까지 했었다. 1층에 휠체어 이용자 전용 공간이 있고 2층에 비장애인이 탑승할 수 있는 좌석이 있는 2층 버스였다. 버스회사 입장에서도 경제성이 충분히 확보될 수 있는 모델이었다”며 “그런데 대법원이 장애인이동권을 퇴보시킨 판결을 했다니 너무 아쉽다”고 밝혔다.

윤 변호사는 “기속력(법원이나 행정기관이 자기가 한 재판이나 처분에 스스로 구속되어 자유롭게 취소·변경할 수 없는 효력) 때문에 파기환송심은 대법원판결과 비슷한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김원영 변호사가 토론회에서 발표하고 있다. 사진 함께걸음 유튜브 캡처
김원영 변호사가 토론회에서 발표하고 있다. 사진 함께걸음 유튜브 캡처

- 국토부 의지만 있으면 고속버스도 ‘대폐차 시 저상버스 의무 도입 대상’ 포함 가능

대법원판결이 장애인 시외이동권을 퇴행시켰지만, 방법은 충분히 있다.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아래 교통약자법) 14조 7항은 지난해 12월, 장애인활동가들의 투쟁으로 신설됐다. 이 조항에 따르면 ‘노선버스 운송사업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운행형태에 사용되는 버스를 대폐차하는 경우에는 저상버스로 도입하여야 한다’고 돼 있다. 토론회에 참여한 변호사들은 국토부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버스’에 고속버스를 넣으면 된다고 말했다. 즉, 국토부 의지만 있으면 대법원판결과 상관 없이 장애인 시외이동권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원영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는 “국토부는 현재 법령으로도 모든 노선 버스에 저상버스를 도입할 수 있다”면서 “하지만 국토부가 고속버스에까지 다 저상버스를 도입하는 건 무리라는 반론을 펼치면서, 시내버스에만 저상버스를 도입하는 것으로 운행형태를 정하는 국토교통부령을 만들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이에 김원영 변호사는 법안이 한 번 더 개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해당 조항으로 인해 모든 시내버스가 저상버스로 바뀔 수 있는 강력한 법적 근거가 생긴 건 맞다. 하지만 이 조항이 저상버스가 아니라 휠체어 이용자 탑승 리프트가 달려 있는 버스 도입을 미룰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될 수도 있다”며 “이 조항의 ‘저상버스’를 ‘저상버스 등’으로 바꿔서 휠체어 이용자 탑승 설비 버스도 도입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교통약자법 개정으로 저상버스 의무도입화가 명시됐지만 ‘도로 구조 등으로 저상버스 운행이 적합하지 않으면 도입이 제한될 수 있다’는 단서가 달렸다. 반면 휠체어 탑승 설비가 장착된 버스는 저상버스와 달리 도로 환경에 영향을 덜 받기 때문에 장애인이동권 보장을 위해서는 휠체어 탑승 설비가 있는 버스도 적극 도입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원영 변호사는 국토부 의지와 상관없이 저상버스 도입 의무가 더 강해지고 휠체어 탑승 설비가 있는 버스가 적극 도입될 수 있도록 개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 변호사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운행형태에 사용되는 버스’ 부분을 삭제하고, ‘노선버스 운송사업자가 버스를 대폐차하는 경우에는 저상버스로 도입하여야 한다. 단 고속버스의 경우에는 휠체어 이용자 탑승 설비가 갖춰진 버스로 도입할 수 있다’로 변경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임성택 장애인법연구회 회장은 “교통약자법 14조 7항은 시내버스에 한정된 조항이 아니다. 버스형태는 법으로 정해지지 않았다. 대통령령에서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고속버스도 논의를 거쳐서 시행령에 반영될 수 있다”며 국토부의 의지를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홍성민 한국교통안전공단 연구원이 토론회에서 발표하고 있다. 사진 함께걸음 유튜브 캡처
홍성민 한국교통안전공단 연구원이 토론회에서 발표하고 있다. 사진 함께걸음 유튜브 캡처

- 교통안전공단 “KTX 타시는 게 맞다”, 국토부 “확대할 계획 있다” 모호한 답변

변호사들이 국토부 의지를 강조했는데, 국토부 산하 정부기관인 한국교통안전공단은 장애인에게 “고속버스 타지 말고 KTX와 장애인콜택시(아래 장콜)를 타라”는 의견을 내놨다.

홍성민 한국교통안전공단 연구원은 먼저 “버스는 버스회사 사유재산이다. 사유재산을 폐차시키고 일시적으로 휠체어 이용자가 탑승 가능한 버스로 바꾸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장기적으로는 맞는 방향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당장 가능한 방법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홍 연구원 의견과 달리 현재 운행 중인 고속버스를 전부 폐차시키라고 주장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어 홍 연구원은 “그런데 KTX가 고속버스보다 훨씬 빠르고 편리하다. 장애인 할인도 된다. 시간과 비용 면에서 KTX를 이용하시는 게 맞는 것 같다. 터미널에서 목적지까지 가실 때는 특별교통수단을 이용하시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 홍성민 연구원은 저상버스 확대가 안 되는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왜 국가에만 책임을 묻느냐고 하기도 했다. 홍 연구원은 “제가 이 업무를 몇 년 동안 하고 있는데도 장애인이 저상버스 타는 경우를 많이 못 봤다. 정류장과 보도 구조의 문제, 버스정류장 불법 주정차 등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운전자가 불친절하거나 주변 시선이 부담된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었다”며 “이런 다양한 문제들이 같이 고려가 돼야지, 장애인이동권이 확보되지 않은 게 저상버스가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라고 말했다.

홍성민 연구원은 시민의식이 가장 큰 문제라고 말하며 “저상버스 보완보다 시민의식을 먼저 개선하기 위해 홍보, 교육에 지금보다 더 많이 투자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홍 연구원의 발언에 김원영 변호사는 “말씀하신 것처럼 저상버스 이용할 때 불편한 점 많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플랫폼은 일정 규모에 도달하면 그때부터 이용자가 폭증한다. 지금은 갈 수 있는 노선이 제한적이고 눈치도 보이고 편하게 탈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이용자가 적다. 그런데 ‘내가 어디든 갈 수 있어. 누구든 이용하는 버스니까’라는 게 확실하다면 비로소 이용자가 많아지게 된다”고 비판했다.

김 변호사는 또한 “인식 개선 문제는 저 같은 사람이 글 쓰면서 하겠다. 국토부는 빠른 속도로 노선을 늘려서 저상버스를 일상적으로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해 달라. 장애인이 안정적으로 이용할 대중교통 플랫폼이 되도록 인프라 구축하는 데 최대한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박동국 국토교통부 생활교통복지과 사무관은 “휠체어 이용자가 탑승 가능한 버스 운행이 확대될 수 있도록 추진할 계획이 있다”는 모호한 말을 남기며 언제까지 몇 대를 도입할 건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답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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