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울터미널에서 시외이동권 보장 촉구
장애인 시외이동권 정부 예산안, 내년에 또 삭감
터미널 측 “휠체어 탑승 수송 의무 없다”며 가로막아
경찰, 법원 판결 언급하며 “장애인 고속버스 이용은 불가능”
- 예순세 살의 이수미 씨는 고속버스를 타본 적이 없다
전동휠체어를 이용하는 예순세 살의 이수미 씨는 단 한 번도 고속·시외버스를 타본 적이 없다. 그는 대부분의 삶의 시간 동안 집과 장애인거주시설에 갇혀 살았다. 가족과 함께 살았던 집은 엘리베이터 없이 계단만 있는 3층 주택이라 외출이 불가능했다. 마흔한 살이 된 2001년엔 장애인거주시설에 들어갔다가 2017년 11월에야 시설을 나와 자립생활을 시작했다.
이 씨는 혼자 이동하는 것이 여전히 막막하다. 어느 지역을 가든 장애인콜택시를 이용해야 하는데 지역마다 각기 다른 기준으로 장애인콜택시를 운영하니 이를 일일이 알아보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고속‧시외버스는 아예 탈 수 없으니, 지방 갈 때면 KTX를 이용한다. 그러나 KTX에 전동휠체어 이용 장애인은 두 명까지만 탈 수 있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 다수가 함께 이동하려면 각기 다른 시간대의 열차를 타야 한다.
“왜 나는 고속버스를 타지 못할까. 그런 생각이 항상 들죠. 지하철도 엘리베이터가 생기면서 장애인이 타는 게 일상이 됐는데, 고속버스, 시외버스도 마찬가지로 장애인들한테 일상이 되어야 하지 않나요? 그런데 그걸 탈 수 있어도 도착해서가 문제예요. 이동할 수단이 없으니깐.”
추석 연휴 전날인 27일, 서울동서울터미널에서 비마이너 기자를 만난 이수미 씨가 승차홈을 등지고 말했다. 고속·시외버스를 탈 수 있게 된다면 어디를 제일 먼저 가고 싶냐는 물음에 이 씨는 “여수 밤바다”라고 답했다.
“여수역에 KTX 있지 않나요?” 기자가 다시 묻자 이 씨가 답했다. “있긴 있죠. 그런데 역에서 내려서 바다까지 갈 수 있나요? 버스 타야 하지 않아요?”
- 지속해서 삭감되어 온 장애인 시외이동권 예산
27일 낮 12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는 서울동서울터미널에서 시외이동권 보장 촉구를 위한 시민 선전전을 벌였다. 전장연은 2014년부터 설날과 추석이면 고속버스터미널을 찾아 “장애인도 고향 가고 싶다”며 장애인 시외이동권 문제를 알려 왔다. 9천여 대의 고속·시외버스 중 휠체어 이용 장애인이 탑승할 수 있는 버스는 단 한 대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9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장애인 시외이동권은 정부 예산에서도, 사법부 판결에서도 부정당하고 있다.
시외이동권 예산은 꾸준히 삭감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2019년 10월에야 정부는 13억 4,000만 원을 투입해 휠체어 탑승설비를 갖춘 고속버스 10대(서울~부산 등 4개 노선)에 대한 시범운행을 시작했다. 하지만 ‘교통약자 장거리 이동지원예산’은 2020년에는 12억 7,200만 원으로 줄더니 2021년에는 10억 원, 2022년에는 2억 원으로 삭감됐다. 올해에는 5억 원으로 소폭 올랐으나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내년도 예산안에서는 3억 5,000만 원으로 다시 삭감됐다. 정부는 내년에 14대의 ‘휠체어 탑승설비를 갖춘 버스’를 도입한다는 계획이다.
2022년 3월에는 소송 제기 8년 만에 대법원에서 장애인 시외이동권에 대한 판결이 났지만, 1‧2심보다 후퇴한 선고였다. 국가와 지자체의 책임을 면제해 준 것도 모자라 ‘버스회사들에 휠체어 승강설비를 마련하라’는 2심 판단이 잘못됐다고 파기환송한 것이다. (▷관련 기사 : ‘장애인 시외이동권 전면 부정’ 8년 만의 대법원판결)
이날 기자회견에서 박김영희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대표는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 대해 “우려했던 일이 그대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박김 대표는 “몇 대 만들어 놓지도 않고서 정부는 장애인들 이용이 많지 않기에 휠체어탑승설비가 있는 버스들을 없애야 한다며 예산을 삭감하고 한다. 우려했던 일이다”라면서 “휠체어탑승설비가 있는 버스들을 왜 장애인들이 이용하지 못하고 있는지, 장애인의 경험을 고려하지 않는 정책들로 그마저 있는 버스들이 폐기 위기에 놓였다”고 규탄했다.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개인대의원으로 활동하는 배재현 활동가는 “명절 때마다 ‘장애인도 고향 가자’고 투쟁하며 기차역, 터미널에서 농성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외쳐야 하나. 명절에 고향 가고 싶다는 것만큼 평범한 소망이 어디 있나. 그런데 매년 예산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 삭감되고 있다”고 말했다.
다니주누 전장연 활동가는 “정부 의지는 예산편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정부는 돈이 없다며 기다리라는 말만 한다”면서 “미국 고속버스 회사 홈페이지엔 ‘모든 버스는 휠체어 탑승이 가능하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한국은 여전히 시내버스는 물론이고 고속‧시외버스는 아예 탈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 경찰, 법원 판결 언급하며 “장애인의 고속버스 이용은 불가능”
기자회견을 마친 후, 이들은 구매한 버스표를 들고 승차홈으로 향했다. ‘가평 가는 시외버스를 타겠다’며 승차홈으로 들어가는 장애인들을 경찰이 막아서면서 23번 승차홈 입구는 경찰과 장애인의 대치로 혼잡해졌다.
동서울터미널 관리자는 “동서울터미널은 전동휠체어 탑승 수송의 의무가 없다”면서 “아무 잘못 없는 일반회사가 운영하는 동서울터미널에서 이런 시위를 하는 것은 업무 방해”라며 장애인들의 출입을 막았다.
이에 대해 박김영희 대표는 “우리는 돈 주고 가평 가는 버스표 세 장을 샀다. 터미널은 장애인에게 표 팔아놓고 왜 태우지 않나”라면서 “장애인이 탈 수 있는 버스가 없어서 못 타게 됐으면 사과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는 시민으로서 승차하고 싶다. 버스 타고 고향 가고 싶다. 경찰은 길을 비켜라”고 외쳤다.
하지만 경찰은 “고향을 방문하는 시민들에게 불편과 명백한 위험을 초래하고 있다. 업무방해 행위는 관련 법에 따라 처벌될 수 있다”면서 “법원에서 휠체어 탄 장애인들이 고속버스를 이용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제부터 범법행위에 대해서는 채증을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법원의 ‘퇴행적 판결’이 장애인들의 시외이동권을 진압하는 근거로 언급된 것이다.
“고향을 방문하는 시민들”이라는 표현에 박김영희 대표가 발끈했다. “우리는 시민이 아닙니까? 시민의 자격이 따로 있습니까? 경찰은 무슨 자격으로 그렇게 말합니까. 권리를 말하는 사람을 왜 폭력집단으로 매도합니까. 경찰은 우리를 불법 집회자로 취급하는 데에 사과하십시오.”
승차홈으로 들어가지 못한 장애인들은 “사과하라”고 외쳤다. 터미널에서 일어난 낯선 소요에 놀란 시민들은 이들을 둘러싸고 사진과 영상을 찍었다. 그러나 장애인들은 결국 승차홈에 진입하지 못했다. 경찰은 비키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