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2019년 4월 5일, 경기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이 장애인거주시설폐쇄법·조례 제정을 촉구하며 경기도청 앞에서 전국집중결의대회를 열었다. 당시 대구시립희망원대책위 공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한 조민제 활동가가 “장애등급제 진짜 폐지”라고 적힌 몸자보를 입고 발언하고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2019년 4월 5일, 경기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이 장애인거주시설폐쇄법·조례 제정을 촉구하며 경기도청 앞에서 전국집중결의대회를 열었다. 당시 대구시립희망원대책위 공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한 조민제 활동가가 “장애등급제 진짜 폐지”라고 적힌 몸자보를 입고 발언하고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 ‘무응답층’이라는 전선

지역운동은 서울의 운동에 많이 의존하기 때문에 중앙의 이슈를 받아쓰기하는 식이 많아요. 대구의 장애인운동은 거기에서 나아가 우리의 의제들을 개발했고 중앙보다 더 빨리 치고 나가는 것들도 생겼는데 탈시설운동이 그랬죠. 그중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건 무연고 중증·중복 발달장애인분들의 자립 모델을 만들어낸 거예요.

2016년 대구시립희망원의 비리와 인권침해가 폭로됐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어요. 거주인에 대한 체벌, 폭행, 학대, 가혹행위는 물론 사망사고도 너무 많았고 한 달에 빼돌린 급식비만 4천만 원에 달했어요. 1200명이 거주하는 초대형 시설이었고 천주교가 수탁받아 운영했는데, 신부님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사회적 공분이 커져 전국구 싸움이 되었어요. 국정감사 시기와 맞물려서 ‘그것이 알고 싶다’ 팀도 붙었어요. 시설투쟁은 아무리 열심히 싸워도 이기기가 어려운데 이건 ‘되는 싸움’이라는 느낌이 왔어요. 휘몰아치듯 싸웠죠. 2017년 결국 희망원 내 장애인시설(시민마을)을 폐쇄하고 거주인들을 탈시설하는 것이 결정됐어요. 기존엔 아무리 문제가 있는 시설이라도 폐쇄처분까지 가는 경우가 드물었어요. 그리고 폐쇄된다 해도 보통 거주인은 다른 시설로 옮겨졌어요. 우리가 그 공식을 깬 거죠. 그런데 더 어려운 싸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지금까지 탈시설의 기회는 “나가고 싶으세요?”라고 물었을 때 “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졌어요. 그런데 희망원 거주인들 중 그 질문에 대답을 못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이른바 ‘무응답층’이었어요. 중증·중복 발달장애인들이었어요. 그중 연고자가 있는 경우엔 연고자에게 물었어요. “이 사람을 탈시설 시킬까요? 아니면 다른 시설로 옮길까요?” 대다수의 연고자가 “다른 시설로 보내세요”라고 답하겠죠. 그럼 그 사람은 다른 시설로 보내져요. 그런데 연고자가 없는 사람이 9명 있었던 거예요. 대구시는 관례대로 이 사람들을 다른 시설로 전원시킨다는 재입소 조치를 발표했어요. 당사자의 의사를 확인할 수 없는데 공권력이 자의로 이 사람들을 퇴소시킬 수 없다는 논리였죠. 저희는 동의할 수 없었어요. 그런 논리라면 당사자가 다른 시설로 입소하겠다는 의사도 확인되지 않았는데 왜 공권력이 자의적으로 판단해서 전원조치를 하느냐고 맞선 거죠. 무응답층에 대한 전원조치를 중단하고 탈시설을 보장하라고 152일간 대구시청 앞에서 농성을 했고 결국 대구시가 이분들의 자립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어요.

420장애인차별철폐대구투쟁연대는 2018년 6월 18일부터 대구시청 앞에서 대구시립희망원 탈시설-자립생활 지원을 요구하며 농성에 돌입했다. 이 농성은 152일간 이어졌다. 사진은 농성 50일째인 2018년 8월 6일의 모습. 사진 비마이너DB
420장애인차별철폐대구투쟁연대는 2018년 6월 18일부터 대구시청 앞에서 대구시립희망원 탈시설-자립생활 지원을 요구하며 농성에 돌입했다. 이 농성은 152일간 이어졌다. 사진은 농성 50일째인 2018년 8월 6일의 모습. 사진 비마이너DB

시에서 예산을 대고 장지공과 사람센터가 이분들의 자립을 지원했는데 그 과정이 엄청나게 고생스러웠어요. 자립주택 한 채에 두 분이 입주해서 자립생활을 시작하셨어요. 이분들은 발달장애와 시각, 청각과 같은 감각장애, 신체장애가 있어서 하루 24시간의 활동지원서비스가 필요한 분들이었어요. 그런데 대구의 경우 발달장애인들에겐 하루에 3~4시간 정도밖에 활동지원서비스를 주지 않아요. 시에선 이 아홉 명이라 해서 특별히 더 지원할 수 없다는 방침이었고 이걸 24시간으로 늘리기 위해 우리가 계속 요구했어요. 해결해야 할 과제가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중 가장 큰 건 본인이 의사 결정을 못한다면 의료, 통장개설, 금전 관리, 도시가스 같은 각종 계약들, 행정 모든 면에서 이걸 누가 결정해 줄 거냐의 문제가 있어요. 당사자의 욕구나 의사를 확인하고 거기에 따라서 이루어졌던 기존의 지원 방식이 맞지 않은 전혀 새로운 존재들이 우리를 찾아온 거죠.

한국에선 그런 결정을 공공후견인이 하게 돼 있는데 연결되기까지 빨라도 1년이 걸려요. 갑자기 수술해야 하는 일 같은 게 생길까 봐 늘 노심초사하면서 이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애를 썼어요. 약물 오남용도 너무 심해서 한 사람이 복용하는 약이 20개 가까이 됐어요. 근데 왜 그 약을 먹는지에 대한 히스토리도 없어서 병원에 계속 다니면서 의사한테 자문을 구해 점점 줄여나갔어요. 탈시설 초기엔 환경이 낯설고 불안하시니까 자해 같은 도전행동이 더 심해지셨는데 활동지원사도 적으니까 계속 문제가 생겼죠. 담당자들이 심리적으로 굉장히 힘들어했어요. 우리가 시설을 비판할 때 늘 거론하는 ‘보호 의무 소홀’로 인한 사망 사고가 혹시 우리에게도 일어날까 봐 항상 두려웠어요.

대구시청 앞 농성 50일째인 2018년 8월 6일, 조민제 활동가가 농성장 천막 끈을 단단히 매고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대구시청 앞 농성 50일째인 2018년 8월 6일, 조민제 활동가가 농성장 천막 끈을 단단히 매고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다행히 상황은 점점 나아졌어요. 그분들의 장애가 나아진 게 아니라 그분들이 살아갈 환경이 점점 튼튼하게 구축되어 갔다는 뜻이에요. 장지공은 자립주택센터를 설립해 자립한 장애인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전반적으로 지원하고 낮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도록 주간보호센터도 만들었어요. 24시간 활동지원서비스도 받게 됐어요. 그리고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그분들이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확인해나가고 그에 맞는 지역사회 프로그램이나 기관을 연계하며 일상을 풍성하게 만들어 갔어요. 함께 살아가는 시간이 쌓일수록 감정표현도 풍부해졌고 표정도 밝아지셨어요. 자신의 방을 자신의 취향대로 꾸며나갔고, 사용하는 어휘나 의견을 표현하는 방식도 다양해지셨죠.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게 적응되면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표출하는 행동도 점차 줄어들었어요.

물론 지금도 어렵고 고단한 일들이 많아요. 하지만 탈시설 지원체계가 구축되지 않았기 때문에 위험해서 자립할 수 없다고 말하는 논리, 탈시설이 어려운 사람도 있으니 시설이 필요하다는 논리에 균열이 생겼고 그들도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사례를 우리가 만든 거죠. 지역사회 인프라가 만들어져야 시설폐쇄가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예요. 시설이 폐쇄되고 거기 있는 사람들이 나와야 지역사회가 비로소 변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 무연고자의 장례 치르기

가장 슬프고 힘들었던 건 탈시설한 분들의 장례였어요. 2020년 한 분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시설에서 30년 살다 자립한 지적장애인 분이셨는데 활동지원서비스를 하루에 4시간밖에 못 받으셨어요. 산책을 좋아하셨어요. 혼자 산책하다가 횡단보도를 만나면 건너편 사람을 보고 따라 건너는 요령을 갖고 계셨어요. 그날은 주말 아침이라 차가 없어서 건너편 할아버지가 무단횡단을 하셨고 그걸 보고 따라 건너신 거예요. 밤샘 작업하고 퇴근하는 기사님의 포크레인에 치여 즉사하셨어요. 그분을 지원했던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했어요. 그들을 독려하고 위로하는 게 저의 역할이었죠. 장례는 철저하게 산 사람을 위한 의식이라고 생각해요. 그 의식을 잘 만들어 줘야 그를 지원했던 사람들이 덜 상처받을 것 같아서 세심하게 신경 써서 했어요.

하지만 그 장례는 정말 상처가 되었어요. 그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원했던 우리에게 그 죽음에 대한 어떤 권한도 없었어요. 아예 무연고이면 구청이 시신 처리에 관련된 권한을 가지기 때문에 우리가 장례 주관자를 신청하면 그 권한을 가져올 수 있어요. 그런데 정말 무연고인 사람은 생각보다 드물어서 조회하면 먼 친척 한두 명쯤은 나와요. 그럼 그 친척이 시신 처리 포기 각서를 써줘야 저희가 장례를 치를 수 있는데 만약 거부하고 그냥 화장하고 재 뿌리고 치울 거라고 해버리면 우리는 아무것도 못하는 거예요. 어렵고 힘들게 그분의 장례를 치를 수 있었어요.

2021년에 또 한 분이 병으로 돌아가셨어요. 저희가 600만 원을 모금해서 장례를 치렀어요. 그분이 생전에 모아둔 돈이 있어서 그 형제들이 우리에게 그 비용을 주시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상속법상 그 돈은 형제가 아니라 오래전에 연이 끊긴 아들한테 갔어요. 제 또래였던 그 아들과 어렵게 통화가 되어서 상황을 잘 설명해드렸어요. 그분이 돈을 주겠다고 해놓고는 안 주더라고요. 돌아가신 분이 어렵게 모은 돈인데 그걸 본인 장례에도 쓰지 못하는 그런 과정이 허망했어요.

인터뷰하는 조민제 활동가. 사진 현다혜

발달장애인분들이 추모를 할 줄 모르는 것도 힘들었어요. 시설 안에선 사람이 죽으면 사물함 같은 데 영정 사진 올려놓고 하루 지나면 걷어가요. 죽은 사람에 대해 애도할 기회를 안 줘요. 그러니 발달장애인분들은 장례식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으시죠. 같은 집에 살던 사람이 죽었는데 마치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어린아이가 천진하게 빈소를 뛰어다니는 것 같은 장면이 펼쳐졌어요. 부조를 할 줄도 모르고 맛있는 음식이 나오니까 좋아하시고요. 사람이 죽었을 때 어떤 감정과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배워본 적 없다는 것, 그러니까 그 경험이 한 번도 기회로써 제공된 적이 없다는 게 보여서 속상했어요. 고인을 지원했던 이들은 심리적으로 완전히 무너져 기절할 정도인데 같이 살았던 사람들은 너무나 무덤덤한 그 어마어마한 차이, 그런 상황이 힘들었어요.

제 감정을 누르고 이 장례 전체를 주관해야 한다는 생각에 정작 저는 마음 놓고 추모하지 못한 것이 아직까지 가슴에 켜켜이 쌓여 있어요. 시신 사진, CCTV 사고 영상이 한동안 매일 떠올라 괴로웠어요. 그런데 탈시설화에 반대하는 쪽에선 이런 일을 곡해해서 비아냥거려요. 자립해서 죽었다는 둥, 시설 안에서 죽으면 인권침해이고 밖에서 죽으면 고귀한 죽음이냐는 둥, 여러 경로로 뒷말이 들려와요. 여기서도 상처받고 저기서도 상처받고… 그 장례의 모든 것이 힘들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을 지원하는 일엔 죽음도 포함된다는 걸 뼈아프게 배웠어요. 유언장 쓰기 같은 죽음 준비 교육도 하고 원하는 장례 형태도 미리 알아두려고 해요. 앞으로도 계속 돌아가실 테고 우리가 장례를 다 치러야 하니까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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