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권리예산 요구하는 삭발 투쟁
경복궁역에서 삼각지역으로… 141일간 177명이 머리 깎아
목숨을 끊을 수 없어서, 신체를 바쳐가며 삭발
“끝나서 아쉬운데, 내년에도 할까요?”
2022년 3월 30일부터 12월 1일까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의 141일 삭발 투쟁 대장정이 마무리됐다. 윤석열 정부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아래 인수위) 출범 때는 경복궁역에서, 대통령실 청사가 용산으로 이전하고 나서는 삼각지역에서 삭발결의식이 진행됐다.
141일 동안 삭발한 177명은 투쟁결의문을 통해 각자의 삶을 침범한 차별을 증언하며 머리카락을 밀었다. 동료가 겪는 차별의 목격자로서 연대를 표하며 삭발한 비장애인도 있었다. 이들의 투쟁결의문은 모두 비마이너의 ‘2022년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코너에 실렸다. (▷‘2022년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코너 바로 가기)
전장연은 1일 오후 7시 30분, 4호선 삼각지역 지하 1층에 있는 장애인권리예산·권리입법 농성장에서 투쟁문화제를 열고 삭발 투쟁의 소회를 나눴다. 투쟁문화제는 전장연이 3일 세계장애인의날을 맞아 연 1박 2일 전국집중결의대회의 1일 차 저녁 일정으로 치러졌다.
첫 번째 삭발결의자부터 충청북도 옥천군, 인천시, 대구시 달성군 등 전국 각지에서 삭발 투쟁의 무게를 나눠진 결의자들이 참여했다. 결의자의 머리를 깎아온 ‘바리캉 활동가’도 참여해 소감을 전했다.
-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끊을 순 없어서 삭발했습니다
투쟁결의문은 그야말로 이 시대의 장애인 차별 증언록이다. 삭발결의자는 자신이 장애인으로서 겪은 차별, 억울하고 힘들었던 순간들, 정부와 국회에 원하는 것을 투쟁결의문에 담았다. 어린 시절부터 집이나 장애인거주시설에 갇혀 지냈던 중증장애인은 장애인이 머리카락을 자르기로 결단하는 게 왜 중요한 사건인지 설명했다.
8차 삭발결의자 박현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조직실장은 “장애인은 미용실에 가는 것도 어려워 아버지는 내 머리를 빡빡 깎으셨다. 마음대로 머리를 길러보고 싶었던 게 소원이었다”고 했다. 109차 삭발결의자 서지원 장애여성공감 극단 춤추는허리 활동가는 “삭발을 결의하기 쉽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무성적 존재로 취급받았던 내게 머리카락은 유일하게 내 삶을 표현하는 수단”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삭발한 이상근 대구 질라라비장애인야학 학생은 “시설에 있을 때는 만날 머리를 빡빡 밀고 살아서 시설을 나오고는 머리에 공을 많이 들인다. 오랜만에 머리를 밀게 됐다”고 했다.
3월 30일, 1차 삭발결의자인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은 “장애인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서 삭발을 한다”고 말했다.
“삭발을 한다고 해서 윤석열 정부가 눈 하나 꿈쩍할 것 같진 않았어요. 그래도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을 위해 뭐라도 해야 했어요. 사실 장애인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요. 지하철 투쟁, 버스나 도로 점거 아니면 뭘 할 수 있겠어요.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은데 이거저거 해도 정부가 외면하니까 ‘머리라도 밀어서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표현해 보자’는 마음이었습니다.” (이형숙)
8월 5일, 85차 삭발결의자 김병관 대구다사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도 “다르게 할 방법이 없어서 삭발했다”고 술회했다.
“활동 7년 만에 삭발은 처음이었습니다. 먼저 삭발하신 분을 보면 전부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저희(장애인)가 다르게 표현할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끊을 수도 없고요. 그래서 그린라이트(2012년부터 5년간 진행된 광화문역 농성 당시 진행한 도로 점거) 하고, 지하철 막고, 삭발하고, 농성하면서 지금까지 온 거죠.” (김병관)
- 먼저 삭발한 동지가 나를 삭발하게 했습니다
전국의 장애인 활동가가 차례로 삭발하자, 자신도 뒤를 따라 삭발을 결심했다는 결의자가 많았다.
89차 삭발결의자 오태경 한울림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는 “솔직히 말하면 삭발하기 싫었다. 정부가 제대로 된 답을 내놓길 기대했다. 그러나 앞서 삭발한 많은 동지처럼 결국 이 자리(삼각지역)에 나와 있다”고 말했다. 92차 삭발결의자 이진우 서대문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은 “앞서 삭발했던 익숙한 이름의 동지들에게 미안하지 않기 위해 삭발한다”고 했다.
5월 31일에 삭발한 43차 삭발결의자 김솔 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는 인생에서 한 번도 삭발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먼저 삭발한 동지의 눈을 보고 삭발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인천에서는 유재근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가 제일 먼저 삭발했어요. 삭발이 끝나고 지하철 투쟁을 했어요. 한 비장애인 시민이 엄청 욕을 하시더라고요. 화를 내려던 찰나에 유재근 동지가 간절한 눈빛으로 양해를 구하더라고요. ‘정말 죄송하지만 우리도 살고 싶어서 이렇게 하는 거다’라고요. 장애인권리예산을 보장하기 위해 자존심, 분노를 수그러뜨리고 한 명이라도 설득하고 싶다는 마음이 느껴졌어요. 죽어서도 잊지 못할 눈빛이에요. 그 눈빛을 보고 저도 삭발을 결의했습니다.” (김솔)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다음 날인 4월 21일, 유재근 활동가와 함께 17번째로 삭발한 임경미 옥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은 이형숙 서울시협의회 회장에 빚진 마음으로 삭발을 결의했다고 밝혔다.
“제가 삭발을 결의하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이 바로 이형숙 회장님이세요. 이 회장님은 2020년 부양의무자기준 폐지 투쟁 때도 삭발하셨어요. 그때 제가 함께 머리를 깎지 못해서 마음의 빚이 있었거든요. 이 회장님께는 늘 빚이 있었어요. 이 회장님 보면 항상 버스 밑에 있거나, 지하철 타고 있거나, 목에 사다리를 걸고 있었거든요. 함께하고 싶었어요. 이 회장님이 이번에 제일 먼저 삭발하시는 걸 보고 전화드렸어요. 이 회장님이 ‘진짜?’라고 하시면서 바로 날짜를 잡아주시더라고요.” (임경미)
이형숙 회장은 141일 동안 매일 삭발결의자를 조직하는 일을 담당했다. 동지와 눈만 마주치면 ‘같이 삭발할래요?’라는 눈빛을 보냈다. 거미줄을 치듯 삭발하자는 싸인을 동네방네 치는 게 이 회장의 일이었다. 김병관 소장은 그 거미줄에 걸려든 사람이었다.
“‘삭발해야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서울 투쟁에 결합하기 위해 서울역 근처 숙소에서 하룻밤 머물고 일찍 투쟁 현장으로 온 날, 이 회장님이 절박하게 다음날 삭발자를 찾으시더라고요. 마침내 저한테도 다가오셨습니다. 어차피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모르는 척하고 회장님께 넘어가 드렸어요. 삭발하고 났더니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단톡방(여러 사람이 함께 메시지를 주고받는 채팅방)이 뒤집어졌어요. 생일 때도 못 받은 이모티콘을 4개나 받았습니다.” (김병관)
첫 번째로 삭발하며 수많은 언론사의 플래시 세례를 받은 이형숙 회장. 이 회장이 삭발할 당시 정다운 전장연 정책실장이 포효하듯 발언하며 눈물을 흘려 장내가 숙연해졌다. 이 회장은 첫 번째 삭발결의자라는 책임감을 안고, 까까머리에서 다시 곱슬머리가 자라날 때까지 삭발할 동지를 조직했다. 그런데 이런 이 회장이 실은 첫 번째 삭발자가 아니었다.
“원래는 최용기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님이 1번이셨어요. 그런데 갑자기 최 회장님께 지방 일정이 생긴 거예요. 그 얘기를 먼저 들은 사람이 저였어요. 그때 느낌이 왔어요. 언젠간 삭발할 텐데 그냥 빨리하자. 그래서 제가 첫 번째 삭발자가 됐습니다. 투쟁결의문도 첫 번째로 썼어요. 정다운 정책실장이 새벽에 전화해서 투쟁결의문 언제 나오냐고 날 달달 볶았어요. 급하게 썼지만 장애인권리예산 요구가 인수위와 우릴 욕하는 시민에게 전달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이형숙)
- 거룩한 마음으로 바리캉을 들었습니다
강희석 나야장애인인권교육센터 활동가가 마이크를 잡자 “삼각지살롱 원장님!”이라는 환호가 쏟아졌다. 강 활동가는 141일간 가장 많이 머리를 깎은 일명 ‘바리캉 활동가’다.
그는 삭발결의식 현장으로 올 때, 삭발결의자가 쓴 투쟁결의문을 꼼꼼히 읽는다. 머리를 깎는 일이야 매일 비슷하지만, 삭발결의자가 어떤 마음으로 머리를 미는지를 읽고 그것을 마음에 담아 머리를 깎는다고 했다. 또한 삭발 전 자신만의 의식을 치른다고 말했다.
“삭발결의자를 처음 만나면 인사하고 안부를 물었어요. ‘안녕하세요. 오늘 제가 바리캉을 듭니다. 어제는 잘 주무셨어요?’라고 여쭈었어요. 마지막에는 꼭 ‘혹시 마음 변하시면 (삭발을) 안 하셔도 됩니다’라고 말씀드리기도 했어요. 편안한 마음을 가지셨으면 해서 한 말이기도 했지만, 삭발결의자는 무거운 결단을 하고 그 삭발에 책임도 져야 하잖아요. 그래서 그런 말씀을 드렸어요. 지금까지 마음이 변했다고 하신 분은 아무도 없어요.” (강희석)
강 활동가는 삭발을 “자신의 신체를 바치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그 일을 함께하면서 아픔과 슬픔, 놀라움을 느꼈다. 몸을 바치며 투쟁하는 동지가 자랑스럽다고도 했다.
“바리캉을 들 때마다 정수리, 뒤통수, 목덜미를 본다는 게 새로운 느낌이었어요. 다 다르게 생긴 신체를 보면서 ‘시민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신체를 바쳐가며 투쟁한다’는 걸 느꼈어요. 아픔과 슬픔이 느껴지는 날도 있었고 놀라움과 신념을 느낀 날도 있었어요. 몸을 바치며 투쟁하는 동지가 자랑스러웠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삭발하는 귀한 시간을 훗날 역사가 기억해야 한다는 거룩한 마음으로 바리캉을 들었습니다.” (강희석)
삭발이 계속될수록 장애인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은 ‘이제 내가 해야 하나?’, ‘내 차례가 오려나?’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형숙 회장의 애정 섞인 강한 삭발 권유가 다가올 때면 조금은 두렵기도 했다. 그만큼 삭발 투쟁을 결의하는 게 쉽지 않고, 큰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강 활동가는 그래서 삭발결의자들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삭발을 못 할 것도 없단 생각도 하긴 했어요. 그렇지만 자기 삶의 신념을 명확히 세우면서 신체를 바치는 걸 결단하는 게 쉽지는 않았어요. 아직은 삭발하겠다고 손을 들 용기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삭발을 결의한 동지들을 존경합니다.” (강희석)
- “삭발 투쟁 끝나서 아쉬운데… 내년에 2탄을 기획해 볼까요?”
이형숙 회장은 삭발 첫날, 삭발 투쟁이 길어지면 좋겠다는 기대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8개월간 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지하철에서 많은 시민에게 욕설을 듣고,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이 ‘(전장연을)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처벌하겠다’고 한 걸 들으면서 삭발 투쟁을 오래 하면 좋겠다고 기대했어요. 결과가 나올 때까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오래 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어요. 100일 정도 지나니 투쟁결의문에 ‘내가 마지막 삭발이면 좋겠다’는 말이 나오더라고요. 그러나 그분들은 마지막이 되지 않았고 결국 141일까지 이어졌습니다. 마음속에 오기도 생기고 분노도 일어났어요. 우리가 더 끈끈하게 이어져서 투쟁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형숙)
이 회장은 141일간 거의 매일 아침 삭발결의식 현장에 왔다. 자신이 조직한 삭발결의자를 지긋이 바라보며 연대와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가끔 못 오는 날에는 아무도 죄책감을 주지 않았는데 미안해하기도 했다. 그렇게 성실하고 간절하게 현장을 지켜왔다.
“제가 삭발하자고 했을 때 함께하겠다고 결의한 동지들에게 너무나 고맙습니다. 조금 강하게 권유했나 싶기도 해요. 이 자릴 빌려서 죄송하단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삭발하는 동안 투쟁결의문이 낭송되는 걸 듣고 있으면 마음이 아파서 ‘내가 왜 저 분에게 삭발하자고 했을까’ 후회하는 날도 있었어요. 함께하신 동지들에게 정말 감사합니다. (객석을 둘러보며) 아직 삭발을 결의할 분이 많이 계신 것 같네요. 내년에 2탄을 기획해 볼까요? 투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웃음).” (이형숙)
매일 아침 8시까지 삭발결의식 현장에 가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장애인은 더욱 어렵다. 이동권이 완전히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장애인보다 더 이른 시간에 일어나 새벽같이 출발해야 한다. 그럼에도 다들 삭발 투쟁이 끝난 걸 아쉬워했다.
“오늘(1일) 현장에 와서 보니까 많은 분이 ‘나도 삭발 결의했어야 했는데’라는 아쉬움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아요. 저도 삭발 투쟁 끝나는 게 많이 아쉬워요. 나만 당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웃음). 177명의 의지를 이어가며 투쟁합시다. 장애인이 당연한 권리를 누릴 수 있을 때까지.” (김솔)
“제가 머리 깎을 때, ‘이 긴 머리를 깎으시다니, 어쩜 좋아요’ 하면서 걱정하는 분이 많았어요. 결과적으로는 예쁘게 잘 깎였어요. 앞으로 또 삭발 투쟁을 한다면, 너무 걱정 마시고 바리캉 활동가에게 마음 놓고 맡겨 주세요. 177명 깎은 노하우가 쌓였답니다. 긴 머리로 돌아가려면 6년 정도는 걸릴 것 같아요. 그 안에 장애인의 기본권이 단 하나라도 보장되면 좋겠습니다.” (임경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