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부, 시행령 입법예고 의견 제출 28일 마감
예외 조항에 유예 기간까지 “장애인 접근권 침해”
장추련, 내달 법 시행 앞두고 “시행령 재검토해야”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는 29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달 보건복지부가 입법예고한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령 개정안의 전면 재검토를 촉구했다. 사진 복건우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는 29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달 보건복지부가 입법예고한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령 개정안의 전면 재검토를 촉구했다. 사진 복건우

발달장애와 시각장애가 있는 문석영(31) 씨는 무인정보단말기(키오스크) 앞에만 서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동네 패스트푸드점이나 카페에 설치된 무인정보단말기 화면과 씨름하고 있으면 뒤에서 재촉과 함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이다. 그는 “무인정보단말기 글자 크기가 너무 작아서 메뉴 목록을 확인하기도 어렵고, 점자 패드나 음성 안내가 없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서기현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는 식당에 가도 무인정보단말기 화면을 혼자서 누르지 못한다. 휠체어에 앉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손을 뻗어도 주문 버튼에 닿지 않기 때문이다. 활동지원사 없이 무인정보단말기를 이용하는 건 그에게 불가능에 가깝다. 그는 “무인정보단말기를 이용하는 장애인에게 정당한 편의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명백한 차별”이라고 지적했다.

지난달 보건복지부가 입법예고한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아래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령 개정안을 보면 50㎡(약 15평) 미만 사업장의 경우 무인정보단말기에 점자 패드, 음성 안내, 높이 조절 기능이 없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 등 보조적 수단을 두기만 해도 장애인에게 ‘정당한 편의’를 제공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아래 장추련)는 29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령 개정안의 전면 재검토를 촉구했다. 이들은 시행령 개정안이 장애인 무인정보단말기 접근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며 복지부가 개정안을 처음부터 다시 논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각장애인 이병길 씨가 무인정보단말기(키오스크)로 음식을 주문하고 있다. 무인정보단말기 화면에는 “(삼각형 안에 느낌표가 그려진 주의 표시와 함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시겠습니까?”라고 쓰여 있고, 작은 글씨로 “주문 내역이 모두 취소됩니다”라고 적혀 있다. 그 아래 왼쪽에는 취소 버튼이, 오른쪽에는 확인 버튼이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시각장애인 이병길 씨가 무인정보단말기(키오스크)로 음식을 주문하고 있다. 무인정보단말기 화면에는 “(삼각형 안에 느낌표가 그려진 주의 표시와 함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시겠습니까?”라고 쓰여 있고, 작은 글씨로 “주문 내역이 모두 취소됩니다”라고 적혀 있다. 그 아래 왼쪽에는 취소 버튼이, 오른쪽에는 확인 버튼이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 50㎡ 미만 사업장 제외, 모바일 앱 대체, 단계적 확대… 복지부의 ‘개악’

지난해 6월, 장애인 무인정보단말기 접근권에 관한 장애인차별금지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국회는 2023년 1월 28일부터 재화·용역 제공자가 무인정보단말기를 설치·운영하는 경우 장애인에게 정당한 편의를 제공하도록 의무화했다(제15조 제3‧4항 신설).

이에 발맞춰 지난달 18일 복지부는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령 일부개정안을 40일간 입법예고했다. 그러면서 개정안에 대한 찬반 의견을 이달 28일까지 우편으로 제출하도록 했다.

입법예고안에서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크게 세 가지다. 50㎡ 미만 사업장 조건부 제외, 별도의 보조기기‧소프트웨어(모바일 앱) 대체 허용, 그리고 유예 기간을 둔 단계적 확대다. 장애계는 이 같은 조항이 장애인 접근권을 보장한다는 법 개정 취지를 훼손할 뿐 아니라, 장애인 당사자의 문제 제기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개악’이라고 지적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달 입법예고한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령 개정안 중 ‘재화‧용역 제공자의 단계적 범위’에 관한 내용. 시행령 개정안은 공공기관과 민간기업에 필요한 준비 기간에 따라 2024년 1월, 2024년 7월, 2025년 1월로 나눠 순차적으로 적용될 예정이다. 보건복지부 제공
보건복지부가 지난달 입법예고한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령 개정안 중 ‘재화‧용역 제공자의 단계적 범위’에 관한 내용. 시행령 개정안은 공공기관과 민간기업에 필요한 준비 기간에 따라 2024년 1월, 2024년 7월, 2025년 1월로 나눠 순차적으로 적용될 예정이다. 보건복지부 제공

현재 50㎡ 미만 사업장에 설치된 무인정보단말기는 시행령 개정안에서 정하는 ‘장애인 편의제공’ 의무 대상이 아니다. 복지부 규제영향분석서를 보면 무인정보단말기를 따로 교체하지 않아도 이와 연계된 보조기기‧모바일 앱이 있으면 법률상 정당한 편의를 제공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는 무인정보단말기 교체에 드는 사업자의 비용 부담을 고려한 조처다.

또 시행령에는 편의제공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복지부가 내놓은 입법예고안에는 높낮이 조절, 화면 출력과 동등한 음성 정보 제공, 쉬운 설명 안내, 문자중계 등이 명시돼 있지 않다. 올해 상반기 장추련은 장애인 당사자들과 함께 전국의 무인정보단말기 1,002대를 직접 모니터링한 결과를 보고했지만, 이는 복지부 시행령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게다가 3단계에 걸친 ‘단계적 확대’로는 장애인 접근권을 보장하기까지 매우 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현재 시행령은 공공기관과 민간기업에 필요한 준비 기간에 따라 2024년 1월, 2024년 7월, 2025년 1월로 나눠 순차적으로 적용될 예정이다.

한편 개정법 시행일인 2023년 1월 28일 이전에 설치된 무인정보단말기의 경우 장애인 편의제공 의무를 3년간 면제하는 조항이 이미 존재하는 상황에서, 단계적 확대를 추가로 명시하는 건 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승헌 장추련 활동가는 “장애인 편의제공 의무를 2026년까지 유예하는 부칙이 이미 존재하는데도, 경영 여건에 따라 시행령 적용 단계를 달리하면 장애인의 자기결정권과 선택권이 한없이 미뤄지게 된다”고 지적했다.

김재왕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무인정보단말기가 설치된 곳을 보면 편의점, 햄버거 가게, 미용실 등 15평을 넘지 않는 소규모 사업장이 대부분”이라며 “복지부가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무인정보단말기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무시하고 보조기기나 모바일 앱을 지원하는 것에 그친다면 국회의 법 개정 취지는 퇴색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활동가들이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무인정보단말기(키오스크) 접근성 차별 시행령 반대’라고 적힌 노란 손피켓을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 복건우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활동가들이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무인정보단말기(키오스크) 접근성 차별 시행령 반대’라고 적힌 노란 손피켓을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 복건우

- 입법예고안 반대의견 114건 접수… “시행령 개정안 재검토하라”

개정법 시행을 한 달 앞둔 이날 국민참여입법센터에는 입법예고안에 대한 찬반의견 119건이 접수됐다. 그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반대의견(114건) 내용을 보면 △50㎡ 미만 사업장 조건부 제외 △정당한 편의 내용 미기재 △예외에 예외를 더한 단계적 조치 등이 반대의 주된 이유였다.

이는 장애계 주장과도 대부분 일치한다. 장추련은 앞서 12일 성명을 내고 현행 입법예고안이 “장애인에게 정단한 편의를 제공한다는 법의 본래 취지를 벗어나 장애인 차별을 정당화하고 있다”며 “입법예고된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령 일부개정안의 즉각 철회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김성연 장추련 사무국장은 “사업체에 부담을 주겠다는 게 아니라,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계(무인정보단말기)를 만드는 게 기본적인 원칙이자 권리라는 것”이라며 “입법예고 전 토론회와 공청회에서 강조했듯 복지부는 장애인차별금지법 취지에 맞게 장애인의 선택권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시행령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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