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김상희의 삐딱한 시선
어머니 한숨과 함께 쓰레기통에 던져진 입학통지서
입학 유예 끝에 열 살 때 겨우 입학한 학교
갖은 수모 참다가 결국 학업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장애에 대한 차별과 배제… 변하지 않은 학교 현장

김상희 씨. 사진 제공 김상희
김상희 씨. 사진 제공 김상희

- 쓰레기통에 내던져진 나의 입학통지서

내가 8살이 되자 초등학교 입학통지서가 집에 왔다. 통지서를 본 어머니의 표정이 어두웠다.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던 것 같다. “아직 걷지도 못하는데, 학교를 어떻게 보내?”라는 말과 함께 입학통지서는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나는 의무교육이라고 말하는 학교 대신 온갖 치료실만 열심히 다녔다. 치료실에 갔다 오면 누워서 줄곧 티브이만 보았다. 그런 내가 한심해 보였는지 어머니는 한글이라도 배우라며 방문학습지를 신청해 주셨다. 그렇게 2년여 동안 어머니는 나를 입학 유예시키며 장애가 호전되기만을 바라셨다. 그러나 장애는 어머니의 바람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방문학습지는 낙서로만 도배가 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뜻대로 되지 않은 나를 두고 어머니는 무척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자식에 대해 헌신적이었던 어머니는 나를 쉽게 포기하기도 어려웠다.

어머니는 10살이 되도록 한글조차 읽지 못하는 나를 학교에 보내기로 결심했다. 치료받으러 다닐 때도 이동지원을 해 주시던 아버지의 눈치를 엄청 봤는데 매일 다녀야 하는 학교는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아마도 어머니는 혼자 수십 번의 갈등과 생각을 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기나긴 고민 끝에 어머니는 용기를 내셨고, 내가 한글을 익힐 동안만, 딱 3년만 학교를 보내보자고 약속하며 아버지를 설득했다. 누군가는 때 되면 당연히 보내지는 학교에 나는 설득과 동의, 약속을 하고서야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학교에 가려고 하니 갈 수 있는 학교가 없었다. 일반학교(그 당시에 통합학교는 없었다)는 시설도 안 되어 있을뿐더러 비장애 학생들과 나란히 다닐 수 있을 것이란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동네에 있는 학교에 못 가게 되니 내가 다닐 수 있는 학교를 알아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소문 끝에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특수학교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10살 되던 1990년, 그 해 비로소 학교라는 곳에 처음 가게 되었다.

- 지옥이 된 5학년 교실

티브이에서만 봤던 학교에서 ‘학생 노릇’을 하게 되니 뭔가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거 같았다. 책상과 의자 사이에 앉아서 선생님이 칠판 앞에서 책을 펴놓고 설명하며 내 이름을 불러주는 곳에 내가 있다니. 실감이 잘 나지 않아 며칠은 잠도 못 잤다. 매일 새로운 글자를 배우고 익히는 일과가 내게도 펼쳐졌다. 마치 꿈같이 느껴졌다. 물론 특수학교 특성상 수업을 마치면 곧바로 운동치료실로 가서 고통스러운 재활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나는 학교에 가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았다.

세상에서 제일 좋았던 학교가 지옥같이 변한 건 5학년 때였다. 초등 5학년 담임은 폭력 성향이 몸에 붙은 사람 같았다. 간혹 학생들이 말을 안 들으면 손바닥을 때리거나 구레나룻을 잡아당기는 교사는 있었지만, 극심한 폭력을 가했던 교사는 처음이었다.

같은 반에 자폐 성향을 보인 친구가 있었다. 교사는 그 아이의 장애 특성(옆에 사람이 가면 자신도 모르게 툭 치거나 본인 신체를 자해하는 상황)을 고치겠다며 특정 행동을 보일 때마다 뺨을 때렸다. 심지어 발길질해서 휠체어 채 넘어뜨리는 일까지 있었다. 지금도 그 모습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수업 중에 그런 일이 종종 발생하자 나를 포함한 모든 아이는 공포에 휩싸였다.

당시 중증장애아동을 둔 어머니들은 식사 지원, 화장실 지원 등을 위해 학교에 상주해 있었다. 그 피해 학생 어머니 또한 학교에 상주해 있었음에도 가해 선생에게 제대로 항변도 못 하신 걸로 기억한다. 그 어머니는 교육청에 신고하겠다고 가슴을 치며 울면서 말씀하셨지만, 그 선생은 5학년이 끝날 때까지 1년 내내 계속 담임을 맡았다. 그 뒤로도 학교에 남아있었던 걸로 봐서는 피해 학생의 어머니는 신고를 하지 못하신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땐 선생의 ‘학생 처벌’이 아무런 문제가 안 되는 시절이었기에 신고한들 피해를 보는 건 피해 당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나마 다닐 수 있는 특수학교가 여기뿐인데 이마저도 못 다니게 될까 봐 친구도, 어머님도 ‘1년만 참자’라는 심정으로 버텼던 것 같다.

나는 이때의 시절이 공포로 남기도 했지만, 죄책감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담임의 비위를 잘 맞추며 매를 맞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눈치를 살폈고, 그 친구가 맞을 때 눈을 감고 침묵했다. 이 시간에서 벗어난 후에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없었을까?’ 이런 질문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최근 ‘서이초 사건’에 대해 사회는 교권이 무너져서 생긴 일이라며 학생인권조례도 폐지해야 하고 교권 향상을 해야 한다고 떠들어댄다. 나는 학생인권조례가 있어서, 교권이 하락해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타인에 대한 존중 인식이 낮고 인권 감수성은 바닥으로 향해 있는 한국 사회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한 특수학교의 교실 풍경. 사진 비마이너DB
한 특수학교의 교실 풍경. 사진 비마이너DB

- “특수학교 출신인 네가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특수학교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일반 중학교에 진학했다. 원래 다녔던 특수학교에 중고등학교까지 있었는데 초등학급만 남기고 지방으로 이전해 갔다. 안 그래도 자퇴를 염원하는 가족이 지방에 있는 학교에 보내 줄 가능성은 없었다. 비싼 기숙사비를 감당할 정도로 가정형편도 넉넉하지 못했다. 그래도 6학년 담임은 학업을 포기하면 안 된다며 어머니를 여러 차례 설득하여 동네 근처에 편의시설이 있는 중학교 진학을 권유하셨다. 나도 학업을 계속 이어 나가고 싶은 마음에 온 가족의 반대에 맞서 싸우며 결국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나의 고집으로 진학한 중학교는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곳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교과 진도를 쫓아가지 못하는 점이었다. 특수학교에서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일반학교에서는 중하위권 수준밖에 안 된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 말을 정말 실감했다. 나는 겨우 알파벳을 배웠는데 일부 반 아이들은 영어 문장을 술술 읽고 말했다. 중학교 와서야 함수를 처음 풀어보는 나와는 달리 이미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아이들도 많았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영·수는 하위권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암기 과목에서 간신히 성적을 받아냈다. 90년대 중·후반부터 통합교육이 시작됐는데 나는 이 시기에 낀 세대였기에 모든 난국을 스스로 극복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 측에서는 장애 학생을 받아들일 아무런 준비도 안 되어 있었다. 경사로 설치가 전부였다. 그리고 마치 나를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대했다. 학교 선생님들도 장애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다. 한 선생님은 첫 수업 시간에 교탁에 놓인 학부를 뒤져서 특수학교 출신이 우리 학교에 들어왔다며 째려봤다. 그 후부터 선생은 수업 시간마다 나를 향해 트집과 혐오의 말을 일삼았다.

반 아이들도 처음 본 장애인에게 호기심을 가진 듯 한두 달 잘해 주다가 내 나이가 본인들보다 두 살 많은 걸 안 뒤부터 왕따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누구한테 말도 못 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꽤 오랫동안 트라우마로 남아서 몸이 안 좋을 때면 반 아이들이 꿈에 나오곤 했다). 그러던 중 학기 말 기말고사를 보던 중에 갑자기 복통이 찾아와 일찍 하교했다. 그 뒤로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시험 기간 며칠씩 밤을 새워 가며 시험공부를 했고, 공부했던 만큼 시험 문제의 답도 보여서 열심히 적었다. 장애 특성 때문에 손 떨림으로 OMR 카드를 스스로 적을 수 없었는데 시험 감독 선생님은 본인이 지원해 주는 게 아니라 왕따를 주도했던 아이한테 내 시험문제 답안을 적으라고 시켰다. 내 시험지를 건네받은 그 아이는 본인이 몰랐던 답을 내가 썼는지 자기 답안지를 슬쩍 고쳤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속에서 무언가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만 포기하자’라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가족의 반대도, 수업 시간마다 나를 지목해서 차별의 말을 해대는 선생도, 왕따를 시키는 아이들 속에서도 그토록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학업을 스스로 놓아버렸다. 내가 버텨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것이 2~30년 전에 교육 현장에서 내가 겪은 일이다. 2023년 지금, 나는 또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

- 통합학교도, 특수학교도 갈 수 없는 나의 조카 이야기

몇 년 전, 언니가 조카 문제로 하소연하는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조카 녀석에게 장애가 조금씩 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발달이 조금 늦을 수 있는 건데, 언니가 나로 인해 유난스럽게 장애에 대한 겁을 먹고 있는 듯 해서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나 나의 마음과 다르게 언니는 온갖 병원을 알아보며 찾아다녔다.

조카는 신체 발달이 조금 느린 거 같았는데 해가 갈수록 언니의 우려는 현실이 되어갔다. 요즈음은 대여섯 살만 되면 한글과 영어를 모두 익힌다는데 조카는 7살이 넘었지만, 한글을 읽지 못했다. 아무리 가르치고 알려줘도 한글을 읽지 못한단다.

재작년, 조카가 8살을 앞두고 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조카를 학교에 보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라고. 나는 특수학급에서 교사로 일하는 친구한테 얻은 정보를 알려 주면서 언니한테 특수학급이 있는 통합학교에 보내라고 말했다. 절대 입학 유예하지 말고 학교에 보내라고 했다. 하지만 언닌 안 보냈다.

치료실에서 만난 장애아동 엄마들 얘기를 들어보면 특수학급이라고 해서 별다른 지원 체계도 없을뿐더러, 애들이 많이 힘들어하고 있단다. 더구나 조카처럼 한글을 모른 채로 학교에 가면 애들이 나중에 따돌릴 것이라고. 이 말에 나는 반박을 못 했다. 한순간에 내가 겪은 일들이 떠올라서 그래도 보내야 한다고, 조카가 살아갈 사회는 비장애인과 함께 살아야 하는 사회라고 강력하게 말하지 못했다.

언니는 오랜 고민 끝에 대안학교에 보내기로 했다. 특수학교에 보내려니 대기자가 너무 많고 학습장애 외에는 다른 장애가 없어 보이는 조카까지 받아줄 특수학교는 없다고 한다. 설령 받아준다고 해도 이미 특수학교엔 중복·중증 장애아동이 많아서 조카까지 신경 써 줄 여유가 없을 거란다. 그래서 언닌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리면서도 조카를 대안학교에 보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나는 언니가 힘든 게 싫어서 통합학교로 옮기라고 말은 하지만 소극적인 설득만 할 뿐이다. 내가 다녔던 학교 현장이 크게 변하지 않은 걸 알고 있기에 언니에게 대책 없는 희망의 말을 건넬 수가 없다. 최근 주호민 작가의 사건을 보며 더욱 절감한다.

김상희의 삐딱한 시선

김상희.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 멋진 글은 못 쓰지만, 글은 내가 할 수 있는 인권운동이다. 비장애 중심의 정상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나의 언어로 말하기를 계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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