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의 확고한 토대
두려운 우주
나는 늘 우주가 두려웠다. 신의 존재를 확신할 수 없을 때, 우주는 거대한 별과 행성들, 그리고 그 안에서 우연히 조합된 생명의 단초들이 번성하는 우연의 세계일 뿐이었다. 이런 우주에서는 누구도 본질적인 가치를 갖는다거나, 평등해야 한다거나,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할 근거가 없다. 우리는 그저 태어나고, 자라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된다.
다윈은 인류에게 바로 이러한 세계를 알려주었다. 이전까지 인류는 인간이 어떤 지적 설계자에 의해서 창조되었으며, 인류의 역사는 어떤 존재자의 인도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여겼다. 굳이 종교의 영역에서가 아니라도, 역사에는 진보가 있다는 믿음들은 언제나 존재해왔다. 하지만 다윈의 진화론은 진보를 말하지 않는다. 진화는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진보가 아니며, 생명의 다양성이 증가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명현상의 전개다. 이것은 그때그때의 환경에 따른 누적적 변화일 뿐이며 일순간에 우리를 고매한 목표로 도약시키는 원리 따위는 없다.
물론 진화론은 틀린 이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시대에 진화는 인간에 대한 아주 강력한 이론으로 과학계에서 지지받고 있으며, 종교적 편견이 없는 눈으로 본다면 그 이론은 정밀하고 논리적이며 많은 증거를 축적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가 있는 우리는 (아마도 진리일 가능성이 꽤 높은) 이 이론의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생물학적 손상은 도태되어야 할 비정상이며 자연이 열등하다고 입증하는 강력한 특성일 뿐인가? 울적해 보이는 진화론의 결론에 대해 나는 세 가지 측면을 이야기하려 한다. 첫째, 진화론의 결론은 반드시 울적하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둘째, 진화론의 결론이 우울하다고 해서 우리가 기죽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셋째, 진화의 결론이 우울할수록, 우리들의 가치는 더욱 굳건한 토대위에 세워질 힘을 얻는다는 점이다.
진화는 ‘정상성’을 깨트린다.
우생학으로 이용된 다윈의 이론은 장애인에게 불리하고 우울한 결론을 주는 것으로 생각되기 쉽지만, 사실 진화론의 기본전제는 우리에게 오히려 유리한 입장을 시사한다. 현재까지도 우리의 사고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서양철학의 대부 플라톤은, ‘이데아(idea)’라는 개념을 통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절대적인 원형(原型)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도 원형 상태로서의 인간이 있다. 물론 그런 인간이 현실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어떤 인간이 더 ‘정상적’이고 ‘올바른’ 인간인지는 그 원형에 더 가까운지로 판단될 수 있다. 또한 인류 사상사에서 또 하나의 축을 이루는 기독교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는 하나님이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했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은 큰 키와 두 팔, 두 다리, 눈과 귀, 그리고 남성(아마도 그는 백인일 것이다)인 아담의 형상을 닮았다는 것이다. 여자인 하와는 아담의 갈빗뼈에서 파생된다. 이 사고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 정상(원형)의 모습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상정하고, 그것에 가까울수록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 전제한다.
위와 같은 입장에서 장애인은 정상, 또는 원형(idea)에서 아주 많이 이탈한 존재들이다. 태초의 아담에 비해 어떤 장애인들은 키가 현저히 작고, 팔과 다리가 없거나, 눈이나 귀를 사용할 수 없다. 장애인들은 대체로 현대사회의 비장애인보다 아담의 모습에서 더 멀리 떨어져있다.
그러나 진화론은 절대불변하는 원형의 종을 전제하지 않는다. 생물의 현재 모습은 언제나 그때그때의 환경에 적응하기 쉬운 형질이 선택된 결과에 불과하다. 소리의 중요성이 덜한 환경에서 청각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전혀 종에 불리하거나 열등한 특질이 아니다. 또한 변화에 방향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원형이니 정상이니 하는 것은 긴 진화의 역사에서 보면 다 무의미하다. 인간의 신체는 계속 변화하며 어떤 것도 시공을 초월해 완전하거나 우월한 것도 있을 수 없다. 진화론의 세계관은 우리의 오해와는 달리, 장애를 바라보는데 더 유연한 형이상학의 기초를 제시한다.
자연주의의 오류
위와 같은 진화론의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금 이 시점에서’ 적응하기 어려운 특질인 장애는 열등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뿐이지 않은가? 게다가 신체에 대한 아름다움의 관점이 보편적이라고 주장하는 진화론의 연구결과는 장애가 있는 몸도 인정받을 수 있는 미의 다양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닌가. 나는 그런 측면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지 않겠다. 또한 분명 진화론은 우생학으로 악용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적으로 000 이다”라는 진술을 “000 이어야 마땅하다”라는 윤리적 진술로 대체해서는 안 된다.
영국의 철학자 흄은 위와 같은 대체를 ‘자연주의의 오류’라고 불렀다. 예컨대 진화론의 연구결과가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현재 우리 사회에서 생존하기 더 어렵고, 결혼에서 소외되기 더 쉽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고 해서 장애인들이 우리 사회에서 생존하지 않아도 되며, 결혼하지 않고 소외되어 사는 것도 마땅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의 문제와 당위(윤리)의 문제는 구분되어야 한다. 이를 구별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바로 우생학자들이었으므로, 우생학에 반대하고자 하는 우리의 태도는 과학적 연구결과를 무조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당위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는 태도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괄호 안으로 들어간 두려움
나는 진화론이 우울한 결론만을 내리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한 측면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우울한 결론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가 있는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토대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진화론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 미래의 어느 시점에 강력한 지지를 얻는 이론이 나타나 장애에 대해 불리한 결론을 내릴 때, 우리들의 존재 이유는 부정되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과학의 유리한 결론은 취하고 불리한 결론은 배척하는 방법은 너무나 위태로워서 우리의 존엄함이 기초하기에 취약하기 그지없다.
나는 <원영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연재할 초쯤, ‘괄호 넣기’라는 칼럼을 쓴 바 있다. 거기서 괄호 넣기라는 것은 어떤 태도를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중요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자연현상, 또는 사회현상으로서 손상이나 장애를 바라볼 때, 우리는 윤리에 대한 생각을 괄호 안에 넣어야 한다. 즉 윤리를 철저히 배제하고 그에 대한 어떤 판단도 중지해야 하는 것이다. 윤리가 개입되면 우리가 원하는 결론만을 취하려는 유혹에 빠져 실재적인 사실의 모습을 외면하기 쉽다. 반면 우리가 윤리적 입장을 말할 때는, 과학적 사실을 철저하게 괄호에 넣어야 한다. 이 괄호 넣기에 실패하면 바로 ‘자연주의의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美)의 차원은 어떨까. “우리가 존엄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자연적으로 매력 없는(섹시하지 않은) 존재라는 사실은 변함없는 것인가!”라는 한탄에 빠져야 할까? 그렇지 않다. 나는 오히려 자연적인 존재로서의 우리 몸에 대한 인식, 윤리적인 입장, 미적인 태도를 철저히 구별하지 못한(즉 괄호넣기 하지 못한) 것이 우리 몸을 덜 관능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진화론자들의 인류학 연구 결과가 손상입은 몸에 대해 보편적으로 낮은 선호도를 보고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장애인들이 생산력이 낮고 생존가능성이 낮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몸이 그렇게 보인다는 것, 그래서 불쌍하고, 비참하며, 때로는 그렇기에 더욱 영웅적으로 보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관능미를 포함한 우리 몸이 가진 다양한 매력은 오히려 우리의 몸에서 철저히 윤리를 배제하고, 동정심과 (정반대인) 고상함을 배제할 때 드러난다. 질병에 허덕이는 비극적 주체이든 그것을 모두 극복하는 영웅적 주체이든, 또는 윤리적 주체이든 어느 쪽도 섹시함의 대상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요컨대 괄호넣기의 태도를 전제로, 우리가 자연적 존재로서의 손상입은 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진화적 관점을 우리가 정면으로 취하면 취할수록 우리는 확고하게 존엄한 존재로서, 그리고 오염되지 않은 관능미를 가진 몸으로서 동시에 존재할 가능성이 열린다. 용감하고 철저한 자연주의적 태도(예컨대 우리가 다윈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는 존엄하고 관능적인 우리 몸의 반성적 조건인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다윈의 진화론은 몇 가지 위험을 가지고 있음에도 위와 같은 이유에서 그 자체로 우리에게 불리하지 않는 형이상학적 전제를 던져주기도 하고, 생명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촉진하면서도 자연주의적 오류에 빠지지 않는 ‘괄호넣기’의 계기를 제공한다. 이 계기를 통해서, 우리는 다윈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존엄하며 관능적이면서도 손상의 내밀한 체험을 동시에 간직한 내 몸을 어느 때보다 솔직하게 응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다윈의 진화론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유인 것이다.
진화의 세계는 때로 우아하게 생명현상을 설명하면서도 냉혹한 자연을 말한다. 그러나 나는 장애학을 포함해 장애를 연구하고 이해하고, 장애인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모든 존재들의 근본적 토대는 바로 자연이 장애인에게 최악의 결론을 속삭이는 시점에 세워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닐까. 즉 우주의 모든 법칙과 이론과 사실들이 장애인은 도태되어도 된다는 극단적인 결론을 내린다고 가정할 때에도, 우리들이 왜 존엄하고 아름다우며 평등하게 존재할 수 있는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윈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는 것은 이를 위한 첫 번째 작업이다.
참고한 책: 가라타니 고진, 『트렌스크리틱』, 한길사, 2005
슬라보예 지젝, 『시차적 관점』, 마티, 2009
P.S
3회에 걸친 다윈 칼럼을 마칩니다. 세 번째 칼럼이 필자의 사정과 게으름으로 오래 지연되었습니다. 독자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지체장애인. 올해가 20대의 마지막. 지하생활자로 15년간 살았고 세상으로 나온지 올해가 지나면 15년이 된다. 한국사회의 장애인치고는 운이 좋아서 대학을 지나 대학원까지 왔다. 관심사는 연극, 장애학, 생물학, 드라마, 소설, 진화론 등 다양하다. 까칠한 말투로 종종 비난을 듣는다. 스스로를 섹시하다고 공언하고 다닌다.
원영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


사실 전의 칼럼 두 회를 읽으면서, 진화론의 사실들을 어떻게 과학적으로 유리하게 사용될 수 있을까를 기대했었습니다. 진화론이 원형을 가정하지 않는다는 점이 장애학에서 굉장히 흥미롭게 받아들여질 수 있겠지만, 다른 측면에서 결국 '시점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결론이네요. 이 결론이 조금은 우울하고 비관적이지만, 원영님의 말처럼 "과학의 유리한 결론은 취하고 불리한 결론은 배척하는 방법은 너무나 위태로워서 우리의 존엄함이 기초하기에 취약하기 그지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위니안 페미니즘이나 인종차이에 대한 생물학의 연구처럼, 유리하게 사용될 수 있는 연구를 더 진행해야 하겠지요.
한국의 장애 운동은 지나치게 현장 중심으로 이루어져 이론적 연구를 간과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소 초보적이고, 시론적인 시도에 불과할지라도 원영님의 글처럼 장애학이 다양한 학문의 결과들을 받아들이고 비판하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원영님의 표현처럼 이러한 시도들이 우리 몸 뿐만 아니라 장애학의 '견고한 토대'가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원영님과 앞으로 장애학에 용감한 연구를 시도할 연구자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