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관계, 강요는 또 다른 폭력
희한한 것은 가족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에 ‘처음부터 부유했던’ 사람들이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인생역전에 가족이 얼마나 공헌하고 있는가를 역설하는데 치중하고 있고, 솔루션프로그램의 궁극적인 목적은 갈등을 통해 상처받은 개인들의 치유가 아니라 갈등의 원인이었던 가족관계의 복원에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문제의 ‘1차 원인’(이렇게 표현한 것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설명하겠다)인 ‘가족’은 제거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곳에서만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여기서 문제는 증폭되고, 재생산되는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가족을 선택이 아닌 삶의 필수요소로 규정하고 그것을 구성하고 유지하는데 목숨을 거는 걸까? 사람들이 느낀다고 하는 가족애라는 것이 과연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의 삶에서 ‘관계’를 제거한다면 살아 있는 시체, 좀비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 관계의 기본이 반드시 ‘가족’이어야 할까? 인간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맺는 관계가 ‘가족’임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관계가 죽을 때까지 단절할 수 없는 기본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라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은 내가 선택하고 결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런 관계를 유지하라고 강요한다면 그것은 폭력이다.
그런데 이놈의 사회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가족’이라는 관계를 제도적, 문화적으로 강요하고 있다. 미성년자는 반드시 (혈연으로 구성된) ‘가족’이 돌봐야 하고, 그 ‘가족’이 없으면 경제적인 능력이 있는 ‘정상가정’에 맡기거나 고아원, 보육원 등 돈이 덜 들어가는 집단수용시설에 ‘버려’진다.
또 성인이 되어서는 나이가 들어 경제적 능력이 없어진 부모를 부양‘해야’ 하며, 그렇지 않더라도 결혼이라는 것을 통해 새로운 가족을 구성하고 그 구성원들을 부양할 것을 강요받는다. 독립하기 위해 전월셋방이라도 구하려고 대출을 받을 때도 1인 가구(1인을 굳이 ‘가구’로 규정하는 것도 우습지만)에 대해서는 혜택이 전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더불어 동성커플이나 개인은 아이를 입양하고 싶어도 법적으로 입양할 수 없다. ‘정상가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장애인 부부가 있다. 둘이 참 예쁘게 사는 것 같고 결혼한 지 꽤 오래됐는 데 아이가 없어 물어봤다. 경제적인 이유로 아이를 갖지 않는 거냐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아이를 원했지만 장애 등의 문제로 가질 수 없었고, 심지어 입양까지 알아봤지만 수급권자라 자격이 안 된다고 했다는 거였다. 이는 결국 이들 부부가 아이를 낳거나 입양할 경우 그 아이의 양육책임을 전적으로 그들 부부가 져야 한다는 전제하에 부양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최근 광주 인화학교 성폭력사건을 배경으로 한 작가 공지영의 실화소설 ‘도가니’가 영화화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도 가족이라는 족쇄가 얼마나 잔인한 폭력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그들의 아버지는 자리에 누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고, 할머니는 나이가 많아 판단능력이 부족하다. 먹고 살기 위해 돈 몇 푼이 아쉬운 이들은 교장 등 가해자 일행이 건네주는 돈 몇 푼에 상처와 죽음으로 만신창이가 돼버린 아이들의 권리를 팔아넘긴다. 법원은 가해자들의 인면수심 범죄행위에도 이들의 합의를 받아들여 재판을 종료한다.
이를 전해 들은 청각장애 소년은 울며 절규한다. “그놈들이 내 동생을 죽였어!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그놈들을 용서해!” 결국 소년은 동생을 데려간 그 기차 밑으로 변태 교사를 끌어안고 함께 몸을 던지는 것으로 마지막 분노를 표출한다.
과연 가족이라는 것이 아동, 장애인, 노인 등 사회적인 약자들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절대적’ 사회구성 단위인가? 오히려 그것이 가난과 관계의 올가미로 변해 그들을 일상적 폭력으로 내모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지는 않은가?
이 칼럼을 통해, 그리고 페이스북 논쟁('외롭다'는 내 카카오톡 대화명에 '가족사진'을 보내신 아버지에 대한 비판을 계기로 이루어진 댓글논쟁. 궁금하신 분은 내 페이스북을 방문해보시라.)을 통해 나는 아버지의 가부장성과 가족주의에 대한 강요적인 태도에 대해 몇 차례 비판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이것에 대해 적지 않은 반발이 있는 것으로 안다. 심지어 내가 지방선거 후보시절 아버지가 선거법을 위반하면서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니시며 동네 지인들에게 명함을 나눠주시더라, 정치적 견해가 다른데 가족이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있겠냐, 아버지의 진심을 이해하라며 가족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더는 쓸데없는 오해 때문에 간지러운 귀를 참을 수 없어 이 부분에 대해 일단 해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는 가족이라는 관계가 무조건 나쁜 관계며, 성인이 되면 무조건 끊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미리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가족관계도 다른 관계처럼 선택할 수 있어야 하고, 법적, 제도적, 윤리적으로 강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이러한 주장은 우리 가족의 상황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오히려 나는 정서적으로 매우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관계에 대한 불만은 별로 없다. 아버지에 대해 비판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그 나이대의 다른 아버지들에 비하면 비교적 민주적이라 생각한다. 다만 내가 여러 경험이나 매체 등을 겪고, 고민한 결과가 그렇다는 거다. (다음 회에 계속)
김주현의 경계에서 언어장애를 동반한 뇌성마비 장애인. 대학에서 천문학을 전공했지만, 먼 ‘하늘’보다 가까운 ‘사람’에 대한 관심이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활동가의 길에 들어섰다. 한국뇌성마비장애인연합, 시설공대위, 관악사회복지 등 여러 장애인운동단체와 지역운동단체에서 활동했고, 두 차례에 걸쳐 각각 다른 이름의 진보정당에서 각각 다른 지역의 기초의원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현재는 진보신당 대외협력실 국장으로 일하며 주로 장애인운동과의 연대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30대 중반의 중견(?)활동가인 현재까지도 중증과 경증의 경계, 이성과 감성의 경계, 장애인운동과 정치운동, 중앙과 지역의 경계에서 좌충우돌 고민과 실천을 통해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