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시일반 음식연대 밥묵차 대표 유희, 6월 18일 별세
“1995년 최정환 열사 투쟁이 밥묵차 활동 시초”
투쟁 현장 찾아가 수년간 ‘밥나눔’ 활동
탁월한 선동가는 어쩌다 ‘밥주걱’을 들게 됐을까

지난 6월 18일, 십시일반 음식연대 밥묵차 유희 대표가 별세했다. 서울장례식장에 마련된 유희의 빈소. 전국의 투쟁현장을 돌아다니며 밥나눔 활동을 한 그는 ‘밥은 하늘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사진 강혜민
지난 6월 18일, 십시일반 음식연대 밥묵차 유희 대표가 별세했다. 서울장례식장에 마련된 유희의 빈소. 전국의 투쟁현장을 돌아다니며 밥나눔 활동을 한 그는 ‘밥은 하늘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사진 강혜민

- 보고 또 보고, 보고야 말았다

“강남병원 응급실에서, 분신한 사람을 난생처음 본 거지. 그날 밤새 최정환 열사의 화상 입은 모습이 꿈에 화악 왔다가 사라지고 화악 왔다가 사라지고. 밤새 시달렸어. 내가 이런 벽 하나 못 넘는구나, 이걸 뛰어넘지 못하면 나는 운동 못하겠다, 그러니 내가 담당해서 면회하겠다 했지. 그 사람 보고, 면회 시간 되면 또 보고, 계속 봤어. 내가 본부에서 녹음기를 가지고 들어갔을 거야.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디다. 우리가 싸움에 쓸 수도 있습니다’ 해서. 내가 좀 독해요. 그런 거로는.”

2020년 5월,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유희를 만났다. 비마이너에서 기획한 ‘장애해방열사’ 취재를 위해서였다. 그날 그 이야기를 하는 그의 망막에는 여전히 온몸에 붕대를 감은 최정환이, 이덕인의 갈기갈기 찢긴 몸이 새겨져 있는 듯했다.

1988년 청계천에서 공구 노점을 하던 유희는 폭력적 단속에 맞서 싸우다가 노점상 투쟁과 빈민 운동을 시작하게 됐다. 1991년 전국노점상연합에 가입해서 1995년 여성부장을 거쳐 부의장으로 3년간 활동했다. 1995년에는 그의 삶에서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최정환과 이덕인 열사 투쟁이 있었다.

그해 3월, 양재역 인근에서 카세트테이프 노점을 하던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이 서초구청의 단속에 항의하며 분신했다. 최정환 열사는 “400만 장애인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 복수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유희가 그의 유언을 끌어내 담았다.

30대 중반의 유희는 낮에는 강남사거리를 장악한 채 마이크를 잡고서 사람들을 선동했다. 그의 호령에 병원 경비초소에는 씨뻘건 불길이 치솟았다. 그러면서 끼니때가 되면 밥을 지었다. “전국에서 장애인들이 많이 왔어요. 일단 뭘 먹어야 하잖아. 뭘 멕여야 할까. 큰 솥에 소고기 사다가 밥해가지고. 영안실에서 쌀 씻고 그랬어. 그날 천여 명 밥을 하고 차에 가서 기절했지. 밥하다가 죽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그때 처음 들었지.” 그는 그때를 “십시일반 음식연대 밥묵차 활동의 시초”라고 했다.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가 펴낸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 열사 분신관련 투쟁기록집’. 1995년 3월 25일 노제 사회자에 ‘유희(전노련 여성부장)’라고 쓰여 있다. 최정환 열사 투쟁 당시 유희는 전노련 여성부장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부의장으로 선출됐다. 출처 민주화운동자료관추진위원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가 펴낸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 열사 분신관련 투쟁기록집’. 1995년 3월 25일 노제 사회자에 ‘유희(전노련 여성부장)’라고 쓰여 있다. 최정환 열사 투쟁 당시 유희는 전노련 여성부장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부의장으로 선출됐다. 출처 민주화운동자료관추진위원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하지만 싸움의 끝은 허무하고 허탈했다. 일부 장애인단체(성인장애인복지협의회)가 돈을 받고 최정환 시신을 경찰에 팔아넘긴 것이다. 탈취당한 열사의 시신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새까만 캐딜락에 실려 병원을 빠져나갔다. 그날 유희는 매캐한 최루탄 연기가 하늘을 뒤덮던 연세대에서 최정환 열사 노제 사회를 봤다. 18일에 걸친 장례투쟁이 끝나고, 그해 11월엔 또 다른 장례 투쟁이 시작됐다.

인천 아암도 해안가로 떠밀려온 이덕인의 시신을 보았다. 두 손이 밧줄에 묶이고 온몸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 경찰이 인천 길병원 영안실 콘크리트 벽과 유리창을 깨부수고 쳐들어와 그 시신을 탈취해 가는 모습을 보았다. 국가는 이덕인의 몸에서 창자까지 빼간 채 거죽만 돌려보내며 사인은 ‘익사’라고 했다. 믿을 수 없었다.

유희와 함께 최정환, 이덕인 장례 투쟁을 함께한 최인기(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는 그 시대에 유희만큼 탁월한 선동가를 보지 못했다. “최정환 열사 투쟁 당시 노점 쪽에선 유희가 주축이었죠. 노점 쪽은 여성분이 많아도 남성중심 문화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유희가 등장하면서 기존 남성 문화를 싹 제압했죠. 전 그 시대 유희만큼 탁월한 선동 능력을 가진 사람을 못 봤어요. 척박한 빈민운동 진영에선 여성 리더쉽을 만들어낸 분이에요. 본능적으로 중요한 것들을 빨리 캐치해내죠. 그러면서 열사 투쟁하면 가족들을 굉장히 섬세하게 챙겨요. 이덕인 열사 때도 그랬죠.”

장례투쟁은 6개월간 이어졌다. 이듬해 4월까지 유희는 또다시 집에 들어가지 않은 채 영안실을 지켰다. 유가족의 곁에서 ‘밥 당번’을 자처했다.

30대 중반의 유희 모습. 사진 촬영 시기는 1996년으로 추정된다. 사진 전국노점상연합
30대 중반의 유희 모습. 사진 촬영 시기는 1996년으로 추정된다. 사진 전국노점상연합

- 탁월한 선동가는 어쩌다가 ‘밥주걱’을 들게 됐을까

가난하고 바쁜 시절이었다. 노점상에 대한 탄압을 약해진 사회적 연대로 막아내긴 역부족이었다. 투쟁할 사안은 많았기에, 끼니 거를 핑계도 많았다. 사정을 뻔히 아는 유희는 “밥 먹었냐”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농성으로 바쁠 때도 사람들의 밥을 지어 먹여야 직성이 풀렸다. 언젠가부터는 ‘집밥’을 해서 전국 각지의 농성장을 돌아다녔다. 2016년에는 밥묵차 푸드트럭까지 마련했다. 그의 활동을 응원하는 많은 사람들의 후원 덕분이었다.

유희에게 열사 투쟁과 밥나눔은 대척점에 있지 않았다. “당시 활동하던 사람들이 옛날 회상하면 ‘유희 부장이 영안실에서도 밥 챙겨주고 그랬지’ 이런 얘기 많이 해요. 우리가 이념을 먹고 싸우는 게 아니라 밥을 먹고 싸우잖아요. 배고픔은 인간의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부분이니까.” (최인기)

자기 몫의 자리를 잃고 쫓겨난 사람들이 지붕 없는 하늘 아래 내던져졌다. 국밥 한 개에 김치 한 개, 단출한 식사에 마른 몸은 더욱 앙상해진다. 거친 밥알을 자동차 매연에 비벼 먹고, 대중의 무관심을 꿀떡 삼키다 보면 어느덧 농성장의 천막은 시간의 풍화에 해져 있었다. 그 거리 위에서 유희 또한 밥을 먹으며 힘내 싸우는 게 가장 필요했던 걸까.

유희는 빈민 운동을 중심축에 두고 큰 솥에 국자를 담가 휘젓듯, 동심원을 그리며 연대 활동을 넓혀나갔다. 그날 우리가 먹은 밥은 그의 활동 덕에 ‘십시일반’하여 차려진 밥상이었다. 그 밥을 먹은 이들이 ‘밥심으로 싸워 이기리라’ 다짐하게 됐던 것은 밥을 차린 이가 그런 맛을 냈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에 투쟁하는 이들의 승리를 기원하는 기도문을 부지런히 올리던 그 손으로 지어진 밥이었다.

‘십시일반 음식연대 밥묵차’ 유희 대표가 밥차 트럭에서 국을 푸면서 브이(V)를 하고 있다. 사진 김소연
‘십시일반 음식연대 밥묵차’ 유희 대표가 밥차 트럭에서 국을 푸면서 브이(V)를 하고 있다. 사진 김소연

- 경찰 뚫고, 예고 없이 따뜻한 밥이 찾아왔다

힘찬 유희는 힘차게 밀고 들어 왔다. 장례식장에서 정다운(당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이 전을 집으며 하나의 기억을 떠올렸다. “언제였는지, 자세히는 기억이 안 나. 전장연이 광화문 해치마당에 갇혀 있었어요. 그때 유희가 국자 들고 투쟁해서 뚫고 들어왔지. 경찰이 막아서서 밥이 못 들어오게 하니깐 해치마당 안에 있던 우리도 더 흥분해서 싸우고. 음식 맛 변하는 걸 많이 신경 쓰셨어요.”

국을 떠먹던 이형숙(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이 그의 말을 받았다. “그때도 뚫고 들어왔어.”

2016년 장애인콜택시 요금 문제로 경기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성남시청을 점거했다. 당시 이재명 성남시장이 공무원을 동원해 이형숙의 사지를 들어 폭력적으로 끌어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SNS는 뜨겁게 끓어 올랐다. 유희가 성남시청에 있는 이형숙에게 전화해 인원수를 물었다. 얼마 안 있어 유희가 뜨끈한 밥을 지어왔다. 경찰이 막아서자 유희는 그날도 뚫고 들어왔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밥은 따뜻할 때 먹어야 한다.”

이 또한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이 없지만, 언젠가부터 전장연 집회 대오의 맨 끝엔 늘 밥묵차가 있었다. 유희는 말했다. “어디 가서 발언하라고 하면 그런 이야길 해요. 우리나라에서 최고 잘 싸우는 조직이 전장연이다, 전장연 싸우는 거 봐라! 제가 유일하게 밥해달라고 하면 거절 못 하는 곳이 전장연입니다.” (2022년 6월 2일, 인천시청 앞 《유언을 만난 세계》 북토크)

유희의 밥을 먹고 전장연은 무럭무럭 커졌다. 과거 100~200명분을 주문하던 전장연은 이제 400~500명, 700명, 때로는 1000명분을 주문한다. 시간 밭게 주문해도, 다른 단체와 주문일이 겹쳐도, 밥값 좀 깎아달라는 요청에도 유희는 거절한 적이 없었다.

6월 20일, 유희의 장례식장에서 전장연 활동가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6월 20일, 유희의 장례식장에서 전장연 활동가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 밥 멕이고 노래하고 유희의 현장

지난 4월 작고한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은 "몸 자리의 궤적이 그 사람의 삶이다"라고 했다. 유희의 몸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싸우는 현장에서 밥을 짓고 있었다. 서울에서 제주 강정까지, 지역과 부문을 가리지 않았다. 영주댐 철거를 외치는 현장에서,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투쟁 승리를 기원하며, 평등교육 실천을 위해, 사드기지 반대를 외치며 농성하는 이들 곁에, SK케이블 하청 노동자들 곁에, 해군기지 반대를 외치는 이들 곁에 그가 먼저 찾아갔다.

차헌호(아사히비정규직지회 지회장)는 2016년 광화문 광장에서 유희의 밥을 처음 먹었다. 장기투쟁하는 노동자들이 모여 공동투쟁을 하던 때였다. 기억나지 않는 과거 어느 시절부터는 밥묵차가 주기적으로 아사히 농성장이 있는 경북 구미로 와서 문화제를 마친 해고노동자들의 끼니를 챙겼다. 국밥 한 개로 헐거웠던 식탁이 유희가 오는 날이면 집에서 해 온 반찬들로 빽빽해졌다.

유희의 밥은 “레스토랑에서 먹는 밥에도 견줄 수가 없”을 만큼 특별했다. “경찰과 싸우다가, 집회하다가 동지들과 먹는 그 밥맛은 당사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데, “특히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유희의 애정 어린 눈빛”이 맛의 비법 중 하나였다.

장례식장 한쪽 벽면에 전국을 돌아다니며 밥나눔 활동을 한 유희의 사진이 걸려 있다. 사람들이 유희의 쾌유를 빌며 2023년 1월 인천에서 행사할 때 만든 현수막이다. 사진 강혜민
장례식장 한쪽 벽면에 전국을 돌아다니며 밥나눔 활동을 한 유희의 사진이 걸려 있다. 사람들이 유희의 쾌유를 빌며 2023년 1월 인천에서 행사할 때 만든 현수막이다. 사진 강혜민
6월 20일, 한국지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유희의 장례식장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유희는 밥도 잘하지만, 노래도 잘했다. 재주꾼이었다. 차헌호는 투쟁 현장에서 유희가 부른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는 노래를 특히 좋아했다. 유희는 노래하다가 울컥 울기도 했다.

SNS에서는 어렵지 않게 유희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짧은 숏커트, 붉은 립스팁, 수려한 손끝을 더욱 화려하게 보이게 하는 매니큐어, 큰 목걸이에 길게 내려오는 귀걸이, 미니스커트에 무릎까지 오는 롱부츠. 태생적으로 어떠한 반짝임을 겸비한 유희는 노래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밥나눔만큼이나 요양원에서 노래 봉사하는 것이 그의 업이었다. 요양원에서도, 투쟁 사업장에서도 주체할 수 없는 끼는 노래로 흘러나왔다.

“이길 때까지 싸울 거야, 이런 오기밖에 없잖아! 파이팅!” 2019년 소성리 효콘서트에서 노래하는 유희가 마이크를 쥐고 외쳤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노란리본을 가슴에 달고서. 그의 노래에 맞춰 오랜 투쟁에 지친 이들이 박수 치고 함성을 내지르며 춤을 췄다. ‘사드 가고 평화 오라’고 외쳤던 이들이 그 시간만은 유희를 향해 “앵콜”을 외쳤다.

“어서 와. 절하고 얼른 밥 먹어!” 빈소로 들어가는 벽면 왼쪽에는 밥묵차를 상징하는 주황색 앞치마를 입고 환히 웃는 유희의 모습이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그 양옆으로는 시민사회단체 이름이 적힌 하얀 리본이 벽면에 빼곡히 걸려 있다. 사진 강혜민
“어서 와. 절하고 얼른 밥 먹어!” 빈소로 들어가는 벽면 왼쪽에는 밥묵차를 상징하는 주황색 앞치마를 입고 환히 웃는 유희의 모습이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그 양옆으로는 시민사회단체 이름이 적힌 하얀 리본이 벽면에 빼곡히 걸려 있다. 사진 강혜민

- 유희의 몸 자리

유희는 2022년 11월 췌장암 선고를 받았다. 4기였다. 수술할 수 없는 몸은 항암 치료를 받아들였다. 지난 5월, 복수가 차서 국립암센터에 입원했다. 퇴원하지 못하고 2024년 6월 18일 사망했다.

6월 20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호실. 정오가 조금 안 된 시간에도 장례식장은 북적였다.

“어서 와. 절하고 얼른 밥 먹어!” 빈소로 들어가는 벽면 왼쪽으로는 밥묵차를 상징하는 주황색 앞치마를 입고 환히 웃는 유희의 모습이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가장 유희다운 인사가 뭘까, 고민하던 끝에 민중가수 지민주의 아이디어로 지어진 문구다.

그 양옆으로 시민사회단체 이름이 적힌 하얀 리본들이 북적이는 장례식장 신발장처럼 빼곡히 걸려 있었다. 더는 근조화환을 둘 자리가 없어 보낸이가 적힌 리본만 떼어다 벽면에 걸은 것이다. 어림잡아 50개가 넘는다.

장례식장에서는 야간 업무를 마치고 한걸음에 달려온 쌍용차 전 해고노동자들이 밥을 먹고 있었다. 곧이어 노들장애인야학 교사와 학생들이, 한국지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전장연 활동가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투쟁 승리로 밥값 하겠다.” 장례식장에 찾아온 이들이 한쪽 벽면에 인사를 남겼다. 노동자, 농민, 장애인 등 투쟁 현장에 찾아가 ‘밥나눔’ 활동을 하던 밥묵차 대표 유희의 장례식장, 그가 찾아갔던 모든 이들이 이곳으로 찾아오고 있었다.

이제 그의 몸은 마석모란공원, 이덕인 열사 곁에 있다.

노들장애인야학 교사가 포스트잇에 유희에게 전하는 인사를 적고 있다. 사진 강혜민
노들장애인야학 교사가 포스트잇에 유희에게 전하는 인사를 적고 있다. 사진 강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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