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공대 탈시설장애인활동가 장례 치러

 

故 김공대 활동가의 영정. 사람들은 그를 "언제나 웃고 있던 맑은 청년"이라고 말했다. 영정 앞에는 평소 고인이 좋아했었던 커피들이 놓여 있다.

 

지난 8일 오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등진 경산장애인자립생활센터 故 김공대 활동가(31세)의 장례가 10일 이른 8시경 경산삼성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러졌다.

 

고인은 무연고로 3살 때부터 '성락원'이라는 장애인생활시설에서 자라나 28년 동안 시설에서 생활하다가 지난 2010년부터 자립생활센터 활동에 동참하며 탈시설의 꿈을 키워왔다.

 

고인은 장애인운동에 참여한 뒤 활동보조서비스 살리기, 헌병철 국가인권위원장 퇴진, 국민기초생활보장법 개정, 도가니사건해결 및 사회복지사업법 개정투쟁 등 장애인차별철폐와 탈시설-자립생활 권리 확보를 위해 활발하게 활동해 왔으며, 경북 경산지역의 장기투쟁사업장 등에 실천적으로 연대하며 헌신적인 활동가의 모습을 보였다.

 

특히, 고인은 최근 탈시설장애인 자조모임인 '삐딱이'를 결성해 경산시청에 탈시설 및 주거권 대책을 촉구하는 1인시위에 나서는 등의 활동을 해왔으며, 그 결과로 시청 측으로부터 내년에 안정적인 자립생활 체험홈 운영 등의 정책을 약속받은 상태여서 주위에 안타까움을 더했다.

 

어렸을 때부터 시설생활을 함께해왔으며, 고인이 친형처럼 따랐던 김종한 씨는 "내년이면 (시설에서) 나올 수 있었는데, 갑자기 떠나보내게 되어서 미안하고 안타깝다"라며 먼저 보낸 미안함과 자괴감에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장례식을 마친 고인의 유해는 경산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무실에서 노제를 치른 뒤 화장 후 경산시 남천면 장미공원 납골당에 안장됐다.

 

한편, 함께 시설에서 생활하는 이들과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대구장차연), 대구 경산지역 시민사회단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 50여 명은 9일 저녁 '故 김공대 활동가 추모제'를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김종한 씨는 고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라고 말하고 "네가 이루지 못한 꿈, 우리가 이룰 수 있게 열심히 하겠다"라고 다짐했다.

 

대구장차연 박명애 대표 역시 "고인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여기 모인 사람들이 더 열심히 싸워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고인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삼성병원 앞에서 병원을 상대로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단식투쟁 중인 김헌주 소장은 "공대는 맑은 아이였고, 항상 누구에게나 웃는 아이였다"라고 회고하고 "그동안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하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경산장애인자립생활센터와 장애인운동을 지지하는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장례위원회(위원장 김헌주)는 고인의 정신을 이어받아 장례식에서 모인 후원금 등으로 탈시설을 희망하는 장애인들을 위한 지역사회 주거공간을 마련하는 방향을 논의하고 있으며, 앞으로 탈시설-자립생활을 위한 투쟁에 힘을 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12월 9일(금) 오후 7시께 진행된 故 김공대 활동가 추모제. 현재 시설에 거주하고 있는 벗들을 포함해 경산지역의 시민사회단체와 대구지역의 장애인단체, 시민사회단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등 50여 명의 이들이 고인을 기억하기 위해 모였다.

▲추모사를 하고 있는 김헌주(경산이주노동자센터 소장), 김종한(경산장애인자립생활센터 부소장, 고인의 시설 동료), 박명애(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왼쪽부터)

▲10일(토) 오전 9시 30분경 발인예배 후 화장장으로 이동하기 위해 고인의 운구를 들고 나오는 모습. 일렬로 늘어선 행렬 사이로 고인이 나오고 있다.

▲무연고인 고인이 자라났던 장애인생활시설로 운구차가 들어섰다. 건물 앞에서는 생활시설의 직원들과 동료들도 나와 마지막 길을 슬퍼했다.

▲화장장으로 가기 전 들른 경산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무실. 고인이 탈시설 자립생활을 꿈꾸며 활동하던 공간에서 노제를 대신하여 짧은 추모식이 진행되었다.

한 줌의 재로. 고인의 이름이 전광판에 들어왔다.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살아보기 위해 몸부림쳤던 '맑은 꽃'은 피지도 못한 채 그렇게 시들었다.

안치. 경산시 남천면 장미공원 납골당에서 고인은 영면에 들어갔다. 시설에서 나와 자립생활을 하려던 고인의 삶은 그렇게 끝이 났다. 조문객들은 '피어보지도 못하고 졌다'는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 땅의 수많은 김공대'를 위한 투쟁은 끝나지도, 끝내서도 되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야구장에서 탈시설을 희망하며 지역사회로 나온 동료들과 함께. "평소 야구를 좋아하는 공대가 얼마 전부터 한국시리즈 같이 보러가자고 노래를 부르는 거에요. 근데 제가 한국 시리즈가 올해만 있냐고, 지금은 바쁘니까. 내년에도 있고, 후내년에도 있고. 다음에 같이가자고... 근데 그게 지금 너무 후회가 되요." (시설동료의 말 중)

故 김공대 활동가의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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