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영주 활동가를 추모하며

지난해 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너무나 밝았던 녀석이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보같이 난 눈치채지도 못하고 앞으로 있을 영원한 이별의 전주곡이었음을 예상하지도 못했다. 그 후로 영주는 한 달 반 동안 사무실에 나오지 못했고, 밥을 조금만 먹어도 다 토해버려 음식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했다고 한다.

 

며칠 후 영주가 미음이라도 먹게 될 정도로 몸이 좋아졌다는 소식에 조용히 병문안을 갔었다. 집을 몰라 조금 헤맨 끝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낮이었지만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집안이 온통 캄캄했으며 그 어두운 방구석에 영주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방에 있는 현관 불을 켜고 바라본 영주의 모습은 씻지 못해 때가 낀 검은 손과 그렇지 않아도 마른 체형임에도 더 말라버린 얼굴, 너무나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영주야, 아들 은호가 걱정되어 병원 가는 걸 주저하고 있는지 알지만, 네가 건강해야 은호도 지킬 수 있는 거야, 어서 병원 가 입원해라.”라는 내 잔소리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영주…

 

그 후 건강이 잠시 좋아져 며칠 사무실에 나오던 어느 날 “소장님 염증 수치가 많이 높아져 입원해야 할 거 같아요”라며 병가를 낸 그녀는 며칠 후 우리 곁을 떠났다. 사무실에 나온 그 며칠이 영주와 마지막으로 같이 했던 시간이었다.

 

고 이영주활동가 빈소 사진
고 이영주활동가 빈소 사진
▲지난 4월 6일 고 이영주 활동가가 건강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6년 전, 그녀를 만나다.

 

4월 6일 출근길 지하철에서 한통에 다급한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소장님 아무래도 영주가 죽은 거 같아요!” 이 황망한 소식에 급히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고 어머니는 영주가 새벽에 은호의 손을 잡은 채 눈도 감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심장이 뛰고 손이 떨렸다. 그리고 더디기만 한 지하철을 원망하면서 잠시 눈을 감으며 영주와의 예전 생각을 떠올렸다.

 

스물아홉의 짧고 힘든 생을 살았던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아마도 2006년 말일 것이다. 사실 정확히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 또렷이 기억나진 않는다. 그나마 희미하게 생각나는 것은 그녀가 ‘장애인문화공간’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서로 목 인사만을 나누었던 모습이다. 그랬던 그녀와 친해지게 된 계기는 당시 남자친구(지금의 은호 아빠)가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우동민 열사의 활동보조인이 되면서 자연스레 성북센터 활동가들과 교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성북센터의 사무국장이었다.

 

당시 그녀는 장판(장애인운동판 줄임말)에서 새로운 얼굴이었고 활동가들 중 막내쯤 되어 친하게 지냈다. 다소 어려움이 있었지만, 늘 밝은 얼굴로 인사하던 모습은 그녀만의 트레이드 마크(?)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그녀는 나이가 어려, 혹은 경험이 부족해서인지 몰라도 그녀의 활동에 대해 몇몇 선배들의 평가가 좋지 않았고 장판 활동가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2007년으로 기억한다) 그녀는 얼마 동안 활동을 하다가 장애인문화공간을 그만두고 홀연히 우리 기억에서 사라지게 된다.

 

강동센터에서의 재회.

 

2010년 12월, 나는 5년간의 성북센터 활동을 마무리하고 강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 2대 소장으로 활동의 공간을 옮겼다. 그리고 다음 해 1월 그녀와 다시 강동에서 재회하게 되었다.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우선 한 아이의 엄마였고 그것도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또 너무나 당당했던(다소 가볍게 행동하던) 모습이 아닌 아직은 어린 나이임에도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는지 삶의 흔적이 묻어나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지만 아이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적지 않아 자기 힘으로 조금이나마 벌어야겠다며, 적어도 좋으니 센터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부탁하러 온 것이었다. 사실 예전 장애인문화공간에서 활동했을 때 그다지 신뢰를 주지 못했던 부분이 있어서 조금 망설였지만, 아이를 혼자 키운다는 이야기에 한 번 같이해 보기로 마음먹고 그해 3월부터 함께 활동하기 시작했다.

 

너의 흔적이 영원히 강동센터에…

 

영주랑 함께한 1년의 시간, 그때 강동센터는 재정적으로나 환경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센터에 부채도 있었고 활동가들에게 비록 적은 액수지만 활동비를 안정적으로 주기도 벅찼다. 사무실에 장애인이 들어갈 수 있는 화장실이 없어 전동휠체어로 10분 정도 떨어진 인근 상가 건물을 이용해야 했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도 영주는 센터 활동가들 사이에 분위기 메이커였고, 맡은 업무에 성실했고 즐겁게 일을 했었다. 그리고 술을 좋아해(?) 활동가들과 자주 술자리를 갖으면서 어울렸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내가 아플 때마다 걱정해줬던 영주의 기억은 늘 가슴속에 감사함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난 그녀의 개인적인 아픔이나 고민에 대해 함께 나누지 못했다. 오히려 무심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녀는 센터 사람들 일에 앞장서고 일이 있을 때는 따뜻한 상담가로서, 때론 동생으로 감싸 주었고 센터 막내로서의 역할도 잘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가 없는 센터가 아직은 적응이 되지 않는다. 특히 새롭게 이사 온 성내동 사무실을 보며 넓은 곳에서 일하게 되었다면서 좋아했던 모습은 잊히지 않는다. 특히 몸이 좋아졌다가 3월 26일 장애인대회에 참가한 뒤 다시 아프게 되어 소장으로서, 선배로서 그녀 앞에 머리를 들 수가 없다. '그때 무리를 시키지 않았더라면…'

 

어느덧 사십구재도 지나고 영주가 떠난 지 석 달이 되어간다. 시간이 흐르면 많은 이들에게 잊힐지 몰라도 혹여 우리 센터 활동가들도 또는 나도 그럴지 모르겠지만, “영주야 너의 흔적이 영원히 강동센터에 남아 있을 것이며, 하늘에서도 네가 센터를 위해 힘껏 응원해 줄 것이라 믿고, 마지막으로 나중에 다시 만나 쇠주 한잔하고 싶다”란 말을 건네고 싶다. (영주 가는 날, 함께해주신 동지들께 감사드립니다.)

 

박현의 동자스님의 꿈 바라기

어릴 때 어머니께서는 날 두고 전생에 동자스님이라 했다. 보통 동자스님은 어릴 적 가족과 헤어져 절에 맡겨진다. 그리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을 벗 삼아 수행하지만 늘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어떠한 것을 꿈꾸며 희망을 바란다. 그래서 그런지 나도 운명처럼 장애인운동을 하게 되었고 많은 소수자를 보면서 장애인운동을 평생의 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금은 강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내세울 거 없고 잘난 거 없지만, 또한 무언가 내 힘으로 바꾸고 싶고 변화시키고 싶지만, 현실의 한계에 부딪혀가며 갈등하는 완성되지 않은 덜 자란 동자이다.

 

* 이 글은 강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식지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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