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몸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만약 내 다리가 정형외과 침대 위에 있다면, 내 다리는 그저 하나의 ‘고쳐야 할 기계’정도의 의미를 가질 것이다. 우리 어머니에게 내 다리는 자신의 30대를 모조리 바친 젊음의 기록이다. 어린 시절 내 다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는 눈물을 흘렸고, 내 다리의 수술자국들,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가늘고 구부정하게 굳어버린 다리를 교정하기 위해 모든 재산과 시간을 바쳤다. 내 다리는 그녀에게 아픔이고, 안타까움이고, 자신의 운명이며, 하늘에 대한 원망이자 절절한 사랑의 대상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내 다리의 피부를 절개하고 내부의 뼈를 바로잡는 수술을 해야 할 정형외과 의사가 우리 어머니가 보는 것과 같은 의미로 내 다리를 바라본다고 하자. 내 다리에 새겨진 투병의 기록과 경험들을 읽어낸다면 의사가 내 다리뼈를 조각내고 다시 곧바로 연결하는 외과수술을 할 수 있을까? 아마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의사는 내 다리를 하나의 고쳐야 할 ‘기계’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의사들은 인간의 몸을 그렇게 보도록 훈련받은 존재들이다. 만약 의사가 그런 태도를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다면, 남성 의사가 산부인과 전문의를 하거나 여성의사가 비뇨기과 전문의로 있는 병원에 가는 것은 수치스럽고 위험한 일이 될 것이다.
일본의 한 사상가는 이러한 우리들의 선택과정을 이른바 ‘괄호넣기’라고 부른다. 요컨대 의사는 내 다리를 수술할 때, 내 다리가 가지는 고통과 인간적인 경험들을 ‘괄호에 넣어’서 없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의사는 차마 내 다리에 칼을 댈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장애인들의 몸이 사랑을 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도 이와 관련된다고 생각한다. 장애인의 몸을 고통과 차별의 기억으로 인식하는 한 우리는 결코 사랑을 나눌 수 없다. 장애인의 몸은 명백히 매우 정치적이며, 그 안에 많은 사회적인 의미들이 녹아있다. 그러나 사랑을 하는 순간에는 그러한 의미들을 ‘괄호에 넣어야’ 한다. 그럴 때야말로 비로소 ‘섹시함’이 드러난다. 우리의 몸은 정치적이며, 고통에 대한 저항이고, 경우에 따라 숭고함이기도 하다. 그러나 또한 우리의 몸은 스포츠선수의 몸이며, 연극배우의 몸이기도 하고, 섹스를 나눌 수 있는 에로틱한 몸이기도 하다. 그 모든 것들은 다 진실이지만, 어떠한 진실들을 ‘괄호’에 적절히 넣고, 또 어떠한 진실들을 적절히 벗기는가에 따라서 다르게 드러날 뿐이다.
지금까지 장애인의 몸은 ‘시혜와 동정의 대상’일 뿐이었고, 그 이외의 것들은 모두 괄호 안에 넣어졌다. 하지만 이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서의 몸을 집어던지기 위해 강력한 정치적 주체로서의 장애인이 등장했다. 나는 이러한 장애인의 몸들을 존경한다. 그러나 정치적 주체로서의 몸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우리가 가진 다른 몸의 모습들이 또 한편 다른 괄호 속으로 갇혀버린 것은 아닌가? 사랑을 하는 몸. 연극배우로서의 몸이 되려면, 우리는 때로 ‘투쟁하는 동지’로서의 몸도 괄호 안에 넣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몸은 분명히 정치적이지만, 그렇다고만 말하기에 우리들의 체험과 내면적 욕구는 늘 다양한 가능성들로 춤을 춘다.
지체장애인. 올해가 20대의 마지막. 지하생활자로 15년간 살았고 세상으로 나온지 올해가 지나면 15년이 된다. 한국사회의 장애인치고는 운이 좋아서 대학을 지나 대학원까지 왔다. 관심사는 연극, 장애학, 생물학, 드라마, 소설, 진화론 등 다양하다. 까칠한 말투로 종종 비난을 듣는다. 스스로를 섹시하다고 공언하고 다닌다.
원영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