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라는 것에 대해서 자위적인 표현이라 여기는 것이 있다. ‘장애는 하늘이 준 선물’이니, ‘천사’라고 하는 것들이다. 왜 장애를 그렇게 표현할까? 순수하다는 이유로 그런다고 하는데 장애가 없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 정도의 순수함을 가진 사람들이 있지만 앞에 수식어가 붙는 경우는 없다. 아름다운 표현이기는 하지만 비틀고 뒤집어 생각을 하면 이 말들처럼 작위적인 표현이 없다.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 낸 이야기처럼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늘이 준 선물이라면 어디라도 내 놓고 자랑으로 여겨야 할 일이 아닐까. 그런데 그렇게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은 몇이나 있을까. 천사라고 이야기를 한다면 천사와 살고 있다는 것을 역시 자랑하며 지내야 하지 않을까.
식당에 가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사람들 많은 곳에 가고, 가족들 모두가 안쓰러움을 표현하지 않고, 자신의 일상을 담아내듯이 아이의 일상을 같은 무게로 담아 낼 수 있어야 하고, 학교에서도 자신 있고 당당하게 아이를 내세울 수 있어야 하고, 사회 속에서 한 사람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써 주어야 하는데 지금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장애라는 것은 늘 부담이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무거운 짐이다. 아주 현실적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덜어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장애라는 것을 놓고 이야기를 하면 늘 아름답게 포장을 한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이 등산을 하고, 마라톤을 하고, 수영을 하고, 피아노를 치고, 그림을 잘 그리면 역경을 딛고 일어선 ‘인간승리’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부러움을 표한다.
모순은 모순으로 들고, 또 모순은 다시 다른 문의 모순으로 안내를 한다. 어지럽다. 그냥 솔직하게 아이의 장애로 힘들고 어렵고, 징글징글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면 좋겠다. 그런 중에 즐거움이 존재하고 그 즐거움을 키우려 애쓰고 있다고 이야기 하면 정말 좋겠다.
장애를 하늘이 준 선물이라고 이야기 한다면 그 하늘에 대고 ‘당신이 한 번 내려와 키워보라’고 삿대질을 해대면서 고래고래 악을 쓰고 싶다. 그 천사를 당신이 데리고 있으면서 지금 우리 현실에서 한 번 함께 생활을 해 보라고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대들고 싶기도 하다.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답답하고, 얼마나 힘든지는 당장 문을 나서면서부터 부딪치는 현실이다. 그런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현실은 외면하고 포장을 하려 한다면 과연 그것이 올바른 방향이라 할 수 있을까.
이 나라에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의 시선, 대충 펼쳐놓은 시설환경, 안전한 이동수단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것은 고사하고 점점 자라가는 아이들이 한 사람으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학교에서는 천덕꾸러기로, 사회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갈 수 없는 참담한 이 현실에서 듣기 좋고, 말하기 좋은 그런 수식어는 필요치 않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장애인) 말했다.
“하고 싶은 것이 많다.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가고 싶은 곳이 정말 많다. 그러나 나는 어디에도 갈 수 없다.”
아픈 이야기다. 슬픈 이야기다. 우리가 지금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한 번의 외출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시간은 나가서 보내는 시간의 몇 배를 필요로 한다. 천사의 외출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심하다. 또 하늘이 준 선물은 빠르게 성장을 하면서 부담으로 다가온다. 힘에 부친 부모들은 괜찮은 시설을 알아보기 위해 입소문을 쫓아 발품을 판다. 이제 그런 수식어는 남아 있지 않은 상태다.
장애는 그냥 장애다.
거기에 자꾸 뭔가를 입히려 하지 말자. 있는 그대로 보고, 본대로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불편하면 불편한대로 갈 수 있도록 해 주면 된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이제는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장애라는 것을 감추려는 듯 표현되는 모든 것들을 걷어내고 차라리 현실의 문제들에 대해서 거품을 물고 토론하는 것이 내일을 만들어 가는, 실천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 한다.
장애는 그냥 장애다
불쌍하게 보는 시선, 달갑지 않게 보는 시선, 애처롭게 보는 시선을 거두었으면 한다. 장애를 가지고 땀 흘려 자신의 삶을 일궈가고 있고,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나서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영역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것을 ‘장애를 극복’했다고, ‘장애를 이겼다’고 설레발치지 말았으면 한다. 장애는 이기고,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장애일 뿐이다. 사람으로 살아감에 있어 조금의 차이가 있을 뿐이고, 살아가는 방식이나 행동이 조금 다를 뿐이다. 틀린 것이 아니다.
장애를 정말 이해하고 싶다면 가슴에 담고 있는 장애에 대한 모든 편견을 버리고 따뜻한 가슴으로 다가와 가슴으로 이야기를 하라. 장애를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장애를 가진 사람이 아무것도 못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으로 가지는 존엄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신의 몫을 수행해 가고 있으며 생각하고, 표현하고 행동하는 일반적으로 가지는 모든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격체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도 장애인이 하면 인간승리라고 추켜세우지 말고, 장애인이 합창을 하면 천상의 소리라고 눈물 찔끔거리지 말고 장애인들이 노력하는 만큼 변화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라. 이제 더 이상 하늘의 선물이니, 천사라느니 하는 식의 포장을 하려들지 말고 장애인이 이 사회에서 거침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자신의 뜻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장애인들이 어떤 불편도 없이 집을 나서고, 사람을 만나고, 술을 한 잔 하면서 여행을 하고, 일을 하고, 땀을 흘려가며 자신의 삶에 아름답게 색을 입혀 갈 수 있도록 제대로 된 환경이나 만들란 말이다.
장애는 그저 장애일 뿐 아무것도 아니니 이제 그만 곱지 않은 시선을 거두고 손잡고 함께 웃을 수 있는 마음으로 다가오길 바란다. 번들거리게 치장하고 매끈매끈하니 표현하는 모든 껍데기를 다 걷어내고 가슴과 가슴으로 마음과 마음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해 함께 땀이나 흘려보자.
최석윤의 '늘 푸른 꿈을 가꾸는 사람들' ![]() 복합장애를 가진 아이와 복작거리며 살아가는 정신연령이 현저히 낮은 아비로 집안의 기둥을 모시고 살아가는 다소 불충한 머슴. 장애를 가진 아이와 살아가면서 꿈을 꾼다. 소외받고, 홀대 당하는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한 가운데로 모이는 그런 꿈을 매일 꾼다. 현실에 발목 잡힌 이상(理想)을 꿈꾼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