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이는 헌법으로 보장하고 있는 기본적인 권리다. 하지만 장애인들에게는 그 동등한 권리가 마치 특혜를 입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장애인교육의 현주소가 그러하다. 우리 교육현장은 여전히 장애인들의 교육에는 미적대고 있으며 똥 누고 앉아서 뭉그적대는 모습으로 교육현장을 지키고 있다.

 

분명 ‘장애인등에 대한 특수교육법’으로 보장하고 있는 모든 권리를 똥 작대기 취급을 하고 있으며 장애인이 입학을 하려는 것을 여전히 꺼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장애인들에게 교육의 기회는 일반교육에 비해 손이 더 가는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그것은 특혜가 아니라 장애의 특성이나 정도에 맞게 교육을 받아야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자양분이 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교육은 장애가 없는 아이들을 중심으로 내용이 짜여지고 그 아이들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고 해도 허언(虛言)이 아니다.

 

특수교육법의 ‘개별화교육’은 장애를 가진 학생들의 개개인의 특성에 맞게 교육을 시행하고 효과를 키워가자는 것이다. 개개인의 특성에 맞는 교육이란 것이 어려운 것도 아니다. 장애의 정도와 특성을 고려해 그에 맞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제공하고, 그에 따르는 관련서비스들을 제공하면서 교육의 내용을 튼실하게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어느 학교에서도 개별화교육을 내실 있게 수행하는 곳이 없을 정도다. 부모의 교육 참여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고, 부모의 개별화교육 참여 기회를 제공하지 않으면서 학교에서는 특수교사 한 사람에 의해 모든 아이들의 교육프로그램을 만들어 부모들은 사인만 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그런 교육프로그램을 개선하자고 하면 마치 학교 행정을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여겨 따돌림을 놓고 있으며 부모들의 참여를 원천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직업교육도 마찬가지다. 장애가 없는 학생들을 위한 특별실은 아무리 만들어도 모자란 형편이고 그런 중에 장애학생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하면 학교사정을 앞세워 욕심을 부린다는 식으로 타박을 놓기 일쑤다.

편의제공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교육보조원이 학교에 배치가 된 상태이나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고, 급당 정원은 콩나물교실을 넘어 수용시설이라 해도 될 정도로 교사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 벅찬 지경이다. 초등학교를 거쳐, 중학교, 고등학교로 올라 갈수록 그 사정은 열악하기 짝이 없으며 이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은 봄날 지나는 볕에 지나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교육당국은 여전히 현실을 외면하고 있으며 대안이 없다는 식이다. 일반학교의 사정이나 특수학교의 사정이나 별반 차이가 나지 않고 있으며 점차 심각한 수준으로 변해가고 있지만 답을 내지 못하고 있고, 그 피해는 부모와 장애학생의 몫이 되고 있다. 이런 환경이 만들어 지는 가장 큰 요인은 인식부족이다. 모든 교육이 성적을 앞에 두고 이루어지다보니 장애를 가진 학생들에게 제공해 줄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의 중요성을 단지 성적으로 가늠하다보니 장애를 가진 학생들에게 투자할 돈이면 장애가 없는 학생들에게 하나라도 더 해주고 생색이나 내겠다는 것으로 여겨질 정도다. 장애를 가진 학생들이 제대로 교육받고, 훈련받고 자신의 능력이나, 기능적인 면을 키워갈 수 있도록 해 주어야 사회에 나와 제 역할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으련만 교육 행정가들은 그런 생각은 아예 가지지 않고 있다. 마치 ‘가르쳐봐야 아무 쓸데가 없다’는 식으로 여기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과밀학급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라고 아무리 요구하고 주장을 해도 당장 답이 없다고 하는데 이는 발상의 전환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해결을 할 수 있는 문제다. 현재 학교마다 급당정원이 줄고 있으며 학생 수가 부족해 인근학교와 통합을 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는데 이를 적절하게 이용한다면 특수학교를 만들어 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땅을 사고 건물을 지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현 상황들을 적절하게 활용한다면 특수학교의 과밀현상이나, 일반학교의 과밀현상은 자연스럽게 해소가 가능하다. 개별화교육이나, 기타 환경들도 마찬가지다.

 

다른 요인을 꼽자면 부모들 스스로에게 있다. 분명 교육을 받는 것은 하나의 권리이고, 어떤 경우에도 그 권리는 침해받거나 배제,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런 피해가 만들어 진다거나, 혹은 크든 작든 차별일 수 있다고 여겨지는 일들을 당하고도 교사와의 관계, 학교와의 관계를 내세우며 적당히 얼버무려 못 본 척, 못 들은 척 하면서 넘어가니 교육환경이 나아질 수 없는 것이다.

 

작은 권리를 찾아오면 큰 권리는 당연히 따라오게 돼 있음에도 작은 권리를 포기하고 만다. 이런 현상들이 쌓이고, 쌓이다보면 학령기를 지난 이후의 삶이 어둡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눈감아주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다보면 성인기에 들어서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학교와 사회는 외견상의 덩치차이도 있지만 문제가 발생 할 경우 한 곳에서 해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불려 다녀야 하고 그러다보면 쉽게 지치고, 결국은 또 포기를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한 번 제대로 싸움을 해 보지 못하고 포기하면 모든 것이 편하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지금의 특수교육현장을 어지럽게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부모의 인식이 변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완벽한 법이 만들어 진다해도 그것을 제대로 세울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그 피해는 모두 아이들의 몫이 되는 것이고, 사회는 장애에 대한 인식을 바꾸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결국 사회 속에서 밀려나 고립되는 결과가 생겨 날 것이다.

 

 

장애인에게 교육은 단순하게 지식을 전달받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스스로 살아가기 위한 훈련의 과정이어야 한다. 직업을 가질 수 있는 훈련이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한 훈련이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위한 훈련과정이어야 한다. 교육을 단순하게 글자나, 숫자를 가르치는 것으로만 여기는 것은 장애가 없는 아이들에게 제공되어야 할 것들이고, 장애가 있는 학생들에게는 그 외에 살아가는 도구로 활용하기 위한 프로그램들이 제공되어야 한다.

 

전제는 ‘애들이 뭘 할 수 있겠어?’가 아니라 ‘이 아이들에게 뭐가 필요할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런 속에서만이 장애학생들을 위한 교육정책들이 생산가능하고, 그렇게 할 때 지금보다 더 나은 환경들이 만들어져 실질적인 장애인교육이 펼쳐질 것이다. 장애인식개선이나 장애이해교육은 교육공무원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제대로 장애를 이해할 수 있어야 정책을 만들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장애인의 관점에서 모든 것들이 생산 가능 할 것이다. 제대로 된 장애인교육을 통해 장애학생들이 성인기에 접어들면서 공백 없이 사회 속으로 들어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런 날을 기대해 본다면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는 것을 바라는 것과 같은 것일까?

 

 

최석윤의 '늘 푸른 꿈을 가꾸는 사람들'
 
 
복합장애를 가진 아이와 복작거리며 살아가는 정신연령이 현저히 낮은 아비로 집안의 기둥을 모시고 살아가는 다소 불충한 머슴. 장애를 가진 아이와 살아가면서 꿈을 꾼다. 소외받고, 홀대 당하는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한 가운데로 모이는 그런 꿈을 매일 꾼다. 현실에 발목 잡힌 이상(理想)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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