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다.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저는 형의 신발은 늘 한쪽만 닳았다.
최소 1년은 신을 수 있었던 1970년대 그 시절 ‘검은 운동화’였지만 한쪽 발에만 체중이 실리는 형에게는 길어야 3개월밖에 신을 수 없었다. 한쪽 신발만 파는 가게는 없었기에 형님의 왼쪽신발은 아깝지만 늘 ‘새신’으로 버려졌다. 단, 형의 휘어진 발목에 맞추어야 했기에 ‘새신’은 어머님이 달아준 끈이 매달려있어 좀 너저분했고 휘어진 형의 발목에 적응되어 신발창이 초승달 모양으로 굽어져 땅바닥에 닿는 발가락 쪽만 좀 닳은, 아무튼 좀 그런 형태였다.

가난한 산동네 가마니골 둘째였던 난 용도파기된 넘쳐나는 형님의 왼쪽 ‘새신’들을 3개월 주기로 재활용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뭐 왼쪽 신발을 신은 내 오른쪽 발이 약간 불편해하긴 했지만 가격 대비 성능.... 신을 만했다.
난 기타를 좋아했고 또래에 비해 좀 잘 쳤던 것 같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네 친구가 기타를 가르쳐 달라기에 어느 날 방과 후 친구집에 갔었다. 어둑해질 때까지 친구방에서 기타를 가르쳐주면서 놀고 있는 즈음 문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퇴근 후 약주 한잔 하신 친구아빠가 들어오시면서 아들 방에 웬 요상하게 생긴 너저분한 신발이 있는 걸 보시면서 친구의 엄마를 나무라는 목소리였다. ‘친구를 사귀어도 좀 가려서 사귈 것이지....’ 라는 목소리가 쨍하게 들렸고 난 허겁지겁 새신을 신고 친구집을 나섰다.
알만한 건 나름 다 알 것 같은 사춘기 초입이었던 시절.... 친구가 사는 부자동네를 벗어나 외등도 없는 산동네 가마니골 집으로 가던 그 길이 난 참 서러웠다. 새신을 벗어 맨발로 뛰었다. 한참을 뛰다가 나도 모르게 북받쳐 멀리멀리 새신을 던져버렸다.
맨발로 들어온 내 꼬락서니를 보시고 어머님은 많이 놀라셨나보다. 누구랑 싸우고 왔느냐고 물어보시는 엄마에게 더러운 걸 밟아서 버렸다고 둘러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새신이야 뭐 집에 쌓여있으니....
50이 넘은 이 나이까지 난 이 사건(?)을 잊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은 나의 삶 곳곳에서 늘 나와 마주친다. 암튼 뻘쭘하긴 해도 나에게 있어서 노동운동과 장애인운동은 그 시절 ‘새신’의 아픈 추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비마이너닷컴...
비슷한 이름의 비마이너(Bm)는 기타 코드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는 개방현이 없는 하이코드로써 에이마이너(Am)에 비해서 잡기가 좀 쉽지는 않다. 기타 숙달에 있어서 하이코드 연습은 코드 에프(F)와 함께 가장 필수적이고 많이 쓰이는 코드다.
이제 비마이너닷컴(beminor.com)이 그 첫발을 내딛는다. 쉽게 쉽게 에이마이너(Am)만 선호하는 차별의 세상을 뚫고, 결코 지나치거나 넘어갈 수 없는 과정 비마이너(Bm)를 숙달하여 이 험난한 차별의 세상에 작은 등불이 될 것을 기대하고 또 다짐해본다.
비마이너닷컴!
이제 ‘새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김호철의 노래세상 자본의 목적에 의해 기획된 노래와 문화가 온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낮은 곳에서 울려 퍼져 민중들의 가슴속에 한이 되고 힘이 되고 밥이 되는 노래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노래 이야기를 중심으로 소시민의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대표곡:파업가, 단결투쟁가, 민중의 노래, 들불의 노래, 장애해방가, 장애인차별철폐투쟁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