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당히 진보적인 영화
"화면해설음성은 다른 해법이 필요해 보여"
지난 9월 23일, 목동 방송회관에서는 14회 장애인영화제가 열렸다. 5일간 열린 영화제에서는 공식경선부문에 출품된 총 56편의 영화 중 예선을 거친 27편의 영화가 상영되었다. 필자는 이 중 <낙원>, <그레이호프>, <더 캐리어2-투 몬스터즈(The carrier2-two monsters)>
1. 박현근 감독의 <낙원>(29분)

<낙원>은 지적장애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를 서늘한 시선으로 그린 영화이다. 영화는 무표정한 정민의 상반신이 흔들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윽고 정민의 발톱을 깎아주는 아버지의 우악스러운 손길을 비춘다.
경찰인 아버지가 나간 뒤 빈집에 홀로 남은 지적장애 여성 정민은 마당의 개와 함께 논다. 그런데 개 도둑인 경호 형제가 나타나 개를 트럭에 싣는다. 정민은 개를 따라 몰래 짐칸에 올라탄다. 도살장에 도착한 경호형제는 짐칸에서 정민을 발견하고 놀란다.
경호는 개를 목매달아 죽이고, 경호의 형은 정민을 방으로 데려가 추행하려 한다. 정민은 놀라 오줌을 싸버리고, 경호는 형을 때리고 경민을 데리고 달아나려 한다. 하지만 경민은 개를 찾아달라며 울먹인다.
겨우 정민과 도살장을 빠져나온 경호는 맨발인 정민에게 신발을 사 신긴다. 경호는 정민의 집을 찾아주려 파출소로 데려간다. 파출소에서 정민을 본 정민의 아버지는 정민을 이웃 여자라고 말하며 집을 찾아주겠다고 한다. 경호가 정민에게 돈이 들었다고 요구하자 정민 아버지는 불쾌해하며 내 딸이라고 말한다.
정민 아버지의 태도에 의심을 품은 경호는 이들의 뒤를 따라가 정민이 집에서 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경호는 정민의 아버지를 쳐 죽이지만, 정민은 경호를 따라가지 않는다.
정민은 바닥의 피를 닦아내고 무심히 혼자 밥을 먹는다. 달라진 것은 없다. 아버지와 함께 살 때는 TV의 소리가 켜져 있었지만, 정민이 혼자 살 때는 TV의 소리가 꺼져 있는 것 외에는.
<낙원>은 제목과는 반대로, 정민이 처해 있는 전혀 낙원 같지 않은 세계의 살풍경을 보여준다. 정민을 대하는 사람들 중 선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민을 보살피는 듯 보였던 아버지는 장애가 있는 딸의 존재를 숨긴 채, 근친 성폭행을 일삼는 자이다.
경호의 형은 정민을 보자마자 성폭행하려 하고, 경호는 성폭행당하는 정민을 두 번이나 구해주지만, 정민에게 사준 신발값을 굳이 받으려는 자이고 정민이 유일하게 사랑하는 개를 죽여 놓고 고백도 사과도 하지 않는 자이다.
정민은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마지막에 혼자 남은 정민의 무표정한 모습은 쓸쓸하면서도 담담해 보인다. 그가 더 이상 착취당하지 않고 혼자 살아갈 수 있을까.
2. 한성권 감독의 <그레이 호프>(6분)
![]() ▲한성권 감독의 '그레이 호프' |
애니메이션 <그레이 호프>는 암울한 미래세계를 보여준다. TV에선 반란 세력에 대한 뉴스가 끊임없이 나오는 동안 시각장애 소녀는 동화책을 펼치며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를 상상한다.
상상 속 세계는 무지갯빛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소녀는 수술을 통해 눈을 뜰 날을 고대한다. 마침내 수술을 마치고 안대를 푼 소녀는 엄마의 눈이 멀어 있음을 발견한다. 아울러 세계가 화염과 공해로 가득 찬 채 상상 속의 세계와 너무 다른 것에 절망한다.
3. 우창수 감독의

미모의 여성 지아 앞에 전동휠체어를 탄 뇌병변장애인이 다가와 “나는 당신의 정체를 안다”라고 말한다. 자신을 아마추어 프로파일러라고 말하는 이 장애인은 지아에게 당신이 휠체어에 장애인을 태우고 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일반사람들 눈에는 장애인을 돕는 착한 여성으로 보였겠지만, 휠체어에 태운 것은 시체였고, 당신은 독살 연쇄살인범으로 휠체어를 이용해 시체를 유기해 왔다고 말한다. 그는 휠체어에 탄 장애인은 사람들에게 인지되지 않는다는 특징을 이용한 것이라고 꼬집어 말한다.
그는 지아를 연구해 왔다며, 지아의 아버지가 지아의 애인을 살해한 일로 인해 지아가 연쇄살인범의 길로 들어섰다고 말한다. 지아는 자신의 애인이 장애인인 동생을 임신시킨 일로 인해 아버지가 애인을 죽이고 동생과 함께 자살한 뒤, 짐승 같은 자들을 죽이기 시작했다고 털어놓는다. 두 사람은 모처럼 자신을 이해하는 상대와 속 깊은 대화를 나눈 듯 흡족한 여운을 즐긴다.
마지막에 인용된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그 심연도 당신을 들여다본다”는 니체의 말처럼, 두 사람은 서로의 심연을 들여다 본 ‘두 괴물’이다. 가족을 잃고 연쇄살인범이 된 지아와 그를 연구해 온 인지되지 않는 존재인 장애인. 이들은 실로 얼마나 깊은 고독을 맛보았을까.
4. 김지현 감독의 <인어공주>(16분)

<인어공주>는 청각장애가 있는 여성 이란이 비장애인인 남성과의 연애에서 겪는 갈등을 그린 영화이다.
만난 지 1년 된 두 사람은 커피숍에서 다정하게 수화를 섞어 대화한다. 그런데 남자는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다는 사실을 숨긴다. 여자 친구를 보여 달라는 친구들의 성화에 청각장애인 여자 친구를 선뜻 소개하기가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이를 안 이란은 크게 실망한다. 남자친구는 이란을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에게 아직 소개한 적이 없다.
이란은 남자 친구가 감춘 그 모임에 나타나, 당황해하는 남자친구에게 수화로 “내가 장애인이라서 부끄럽냐?”라고 직격탄을 날린다. 이란은 “내 장애를 부끄러워 해본 적이 없는데 너 때문에 장애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내가 싫고 화가 난다”라며 자신의 진심을 수화로 말한다.
남자친구와 헤어져 홀로 고요한 물속에서 잠수를 하며 회상에 잠기는 이란. 뒤쫓아 온 남자친구는 이란과의 화해를 위해 수영도 못하면서 물에 뛰어드는 용기를 발휘한다. 그는 이란에게 계속 곁에 있겠다는 다짐을 들려준다.
<인어공주>는 장애여성과 비장애남성의 연애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나 이나영, 조승우 주연의 <후아유>를 환기시킨다. 특히 청각장애가 있는 여성이 수영을 즐기며 고요한 물속에서 잠수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라는 점에서 <후아유>를 떠올리게 하며, 장애여성이 사랑 앞에서 무척 당당하다는 점과 장애여성과의 사랑을 두고 내심 갈등하는 비장애남성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를 연상시킨다.
두 사람의 갈등은 장애로 인한 내적 갈등이 아니라, 장애인과 사귀는 문제를 둘러싼 사회적 시선의 문제이다. 두 사람의 소통에는 아무런 장애가 없으며, 수화와 음성언어 문자 등을 다양하게 활용해 여느 연인들보다 진심을 전달하고 이해하는 의사소통 능력이 뛰어나다.
단지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장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의 문제, 즉 장애인과 사귀는 것을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며, 그러한 편견 앞에서 두 사람이 얼마나 굳건하고 솔직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사회적 편견으로 인한 연인들 간의 갈등은 비단 장애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가령 장애라는 항목 대신 인종, 외모, 신분의 차이 등을 집어넣는다고 해도 갈등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인어공주>는 장애를 소재로 다루면서도, 서사의 흐름은 보편적인 멜로의 장르를 따른다. 즉 ‘사랑하는 두 사람 → 사회적 편견으로 인한 갈등 → 극적 화해를 통한 사랑의 재확인’의 흐름을 무난히 따르며, 감정선도 이를 따라간다. <인어공주>는 장애를 특별한 것으로 사유하거나, 장애인과 비장애인과의 연애를 예외적인 것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당히 진보적인 영화라고 볼 수 있다.
5. 한승훈 감독의 <엘리제를 위하여>(15분)

<엘리제를 위하여>는 몇 년 전 사고로 중도장애인이 되어 살아가는 청년의 하루를 비춘다. 한 청년이 바지를 다림질하더니, 앉은 채로 바지를 입는다. 의족을 한 절단장애인이다. 거울을 보고, 체중을 재며 외모를 가꾸던 그는 장애인취업박람회를 향한다.
그러나 가는 길이 만만치 않다. 전철역 계단을 오르기 힘들지만, 그는 장애인이라는 것을 티 내지 않으며 한 칸 한 칸 오른다. 마침 장애인이 되기 전 직장에서 알던 여성을 만난다. 여성은 그에게 “요즘도 축구하세요? 날아다녔잖아요?”라는 말을 들려주며 만나고 싶다는 뜻을 표하지만, 장애인이 된 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은 청년은 여자를 먼저 보내려고 하다가, 기어이 절름거리는 것을 보이게 된 후 자괴감에 휩싸인다.
마침 계단에서 휠체어를 탄 한 장애인이 리프트를 작동시키는 문제로 공익요원과 실랑이를 벌이며 “역장을 불러오라”고 한다. 청년은 휠체어를 탄 장애인에게 “장애인이 벼슬이냐?”라고 힐난한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은 격분하지만, 청년이 의족을 한 장애인임을 알고 화를 누그러뜨린다.
우여곡절 끝에 장애인취업박람회 도착한다. 실랑이를 벌이던 장애인도 같은 곳을 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채용은 마감된 상태이고, 청년은 급격한 피로와 허탈감에 딸꾹질을 해댄다. 청년은 중도절단 장애인으로, 느리고 불편하긴 하지만 의족으로 보행이 가능하다. 겉으로 보았을 때 크게 티도 나지 않으며, 다리 이외에는 아무런 장애가 없다.
그러나 그에게 장애는 큰 문제가 된다.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을 장애인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데서 일어나는 정체성의 문제와 장애에 대한 편견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롭지 못한 정신적인 문제이다. 과거에 축구를 하며 '날아다녔던' 그는 아마 자신이 장애인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장애인의 소외나 편견, 권리나 복지에 대해서도 거의 생각한 바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중도장애를 입은 후 의족보행에 어느 정도 적응한 상태이지만, 장애인이 된 자신에게 아직 적응하지 못한 상태이다. 자신에게 호감을 표하는 여성을 한사코 피하려고만 하며,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에게 연대와 공감하기 보다는 “장애가 벼슬이냐?”는 자기 비하와 냉소를 담은 언사를 표한다. 그는 자신이 장애인이긴 하지만, 저항하고 요구하는 사나운 장애인이 아니길 바라며, 가급적 장애인이라는 것이 드러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는 온갖 갈등을 겪고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취업박람회에 오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그에게 남겨진 일자리는 없다. 허탈한 이 결과는 그의 애매한 자의식에 어떤 각성을 일깨워주기 위한 서사적 장치일 수 있다. 마지막 그의 딸꾹질은 혼돈된 정체성 속에서 불확실한 의식의 흔들림을 암시하는 것으로 읽힌다. 그는 이날 겪은 ‘고난의 헛걸음’을 통해 장애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사회적 각성을 얻을 수 있었을까.
6. 박건춘 감독의 <17세의 여름>(18분)

<17세의 여름>은 힘겹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장애인 동생을 돌보며 살아가야 하는 청소년의 삶을 보여준다. 병욱은 지방소도시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밤에는 치킨집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며 살아간다. 치킨집 사장은 병욱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담임선생도 병욱을 탐탁지 않아 한다.
그는 휠체어를 타야 하는 동생을 맡기고 떠나버린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너무 힘들다고 말하지만, 해결될 기미는 없다. 동생은 하루 종일 빈집에서 혼자 놀며 남은 닭을 싸가지고 오는 병욱을 기다리고, 형이 시키는 데로 집으로 찾아오는 이들의 방문을 피해 숨기를 반복한다. 이들은 이것을 동사무소 놀이라고 부른다. 병욱에게 유일한 위로가 되는 친구는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고 학교에 다니는 혜진이다.
영화는 암울한 분위기가 계속되다가, 병욱이 마지막 월급을 털어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새로 하고, 혜진에게 빌린 책값을 갚고, 동생을 휠체어에 태워서 놀이공원에 놀러 가는 장면으로 마무리 된다.
이런 마무리는 묘한 여운을 남기는데, 어쩌면 동생을 놀이동산에 버리는 장면이 아닌지 조마조마한 기운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것이 공연한 오해인지, 사실인지 밝히지 않는다. 영화는 모호한 분위기 속에서, 설사 병욱이 동생을 버린다고 하더라도, 무턱대고 비난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영화는 장애인 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병욱의 입장에 주목하며, 상대적으로 장애인 동생의 입장에는 깊은 시선을 주지 않는다. 사실 이 모든 상황이 동생의 입장에서 더 고통스럽다. 엄마에게 버림받은 것도 형보다는 어린 동생이 느끼는 상처가 더욱 큰 법이며, 그것도 자신의 장애 탓이라고 자책을 하기 쉽다.
영화는 형 앞에서 미소 짓는 동생을 해맑게 그리며, 그의 내면적 그늘을 깊이 있게 조명하지 않는다. 영화는 외부 방문자를 왜 한사코 동생이 피해야 했는지 잘 설명하지 않는다. 형이 빈방에서 방치되다시피 한 동생을 위해 다른 사람의 폭넓은 도움을 받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는지도 보여주지 않는다.
<17세의 여름>은 동생의 입장에서 보면, 엄마에게 버려진 장애소년이 다시금 형에게마저 버려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을 보여주는 영화일 수 있다. 어쩌면 복지로부터 차단되고 가족에게 버림받아 결국 시설로 오게 되는 장애인들의 전사를 보여주는 서글픈 영화로 보이기도 한다.
7. 우문기 감독의 <서울유람>(21분)
![]() ▲우문기 감독의 '서울유람' |
<서울유람>은 부산에 사는 소년이 신경성난청을 진단받고 서울대병원의 진료를 받기 위해 상경해 겪는 일을 그린 영화이다.
서울에 온 진우는 명제 형의 마중을 받는다. 명제 형은 진우의 엄마가 재혼해 함께 살게 된 아버지가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두 사람은 서먹하고 말이 없다. 명제 형이 서울대병원을 찾아가야 하는 진우를 서울대학교로 안내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길을 헤맨다. 우여곡절 끝에 진료를 받은 진우를 명제 형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안내하지만 하필 휴관이다.
명제 형은 하릴없이 서울에 대해 아는 척을 하였지만, 진우가 예전에 서울에 살았었다는 말에 홀가분한 마음이 된다. 명제 형은 허세를 내려놓고 자신이 사는 산동네를 보여주겠다고 데려가 동네놀이터에서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명제 형은 오래된 롯데 자이언트의 팬으로서 옛날 경기를 기억하여 혼자 재연하고 중계하며 즐긴다.
진우는 명제 형과 한결 가까워진 느낌이 되어, 신경성 난청에 대해 “귀찮은 것 시키면 안 들리는 척한다”는 등의 농지거리를 한다. 고속버스터미널로 가는 버스에서 두 사람은 올 때와는 달리 나란히 앉아간다. 진우는 창밖에 얼굴을 내밀고 평온하게 바람을 느낀다.
<서울유람>에서 신경성 난청은 은유적으로 쓰인다. 분명 병원의 진단이 필요한 병이지만, 치료법도 없고 간혹 '어쩌다 보니까 고쳐지기도' 하는 터라, 의료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 장애이다. 신경성 난청은 결국 소통의 문제를 야기하는데, 진우는 농담처럼 “안 들리는 척을 하면 안 들리게 되더라”는 말을 한다.
이는 심인성 장애임을 암시하는데, 진우와 명제와의 만남에서 어떤 소통이 이루어지고, 명제가 그의 난청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자, 진우는 “잘 들리는 것 같다”고 느낀다. 진우에게 명제 형은 말로만 듣던, 아버지의 공부 잘하는 친아들로 심리적 압박과 경계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서울 산동네에서 혼자 놀기를 하는 명제형의 ‘허당스러운’ 모습에 어떤 연민을 느끼며, 심리적인 경계를 해제하게 된 것 같다.
영화는 진우가 명제와의 소통을 통해, 모처럼 심리적 압박을 벗고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진짜로 잘 들리는 것 같다”고 웅얼거리는 것에서 끝난다. 과연 진우의 난청은 “어쩌다 보니 고쳐질” 수 있을 것인가. 확실한 것은 없다. 다만 혼자 생각하며 경계심을 품었던 사람들 사이의 벽이 만남을 통해 허물어질 때, 난청이 상징하는 소통의 장애는 그만큼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8. 후기-화면해설음성과 한글·음향자막
장애인영화제의 영화들은 대부분 화면해설음성과 대사·음향자막이 함께 상영되었다. 영화 화면과 음향이 다 나오는 가운데,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화면 속 장면들을 짧은 문장으로 설명하는 해설음성이 큰 소리로 곁들여지고,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대사와 음향효과를 적은 한글자막이 화면과 함께 나온다.
비장애인이 처음 화면해설과 대사·음향자막을 포함한 영화를 보면 굉장히 부산스러워서 좀처럼 집중하기가 힘들다. 게다가 영상매체가 품고 있는 다층적이고 중의적인 이미지들을 짧은 문장으로 처리해 전달하는 해설음성에 반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시각 장애인들과 청각 장애인들이 영화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 이것이라는 생각에 곧 불평을 멈추게 된다. 그동안 화면해설음성과 대사·음향자막이 없는 영화들만 상영되는 극장환경에서 장애인들이 얼마나 배제되어 있었는지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문화생활을 향유할 권리는 복지의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일반상영관에서 상영할 때 최소한의 회수를 정해 놓고, 해당 회차에는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대사·음향 자막이 제공되게끔 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자막은 외화의 경우에서 경험하듯이 위치를 잘 잡고 마스킹을 잘한다면 비장애인의 관람에 크게 지장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음성은 스피커를 통해 나올 경우 비장애인들의 영화감상을 지나치게 방해하기 때문에 다른 해법이 필요해 보인다. 최소한의 회수를 정해놓고, 해당 회차에는 관람하러 온 시각장애인들에게 헤드폰을 지급해 특정 주파수에서 나오는 화면해설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장애인단체에서는 각 지역의 최소 몇 개 상영관의 몇 개 영화의 몇 회차만이라도 그런 서비스를 제공해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함께 영화를 즐기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