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애인의 연극

▲연극 <손님>의 한 장면 ⓒ극단 애인
극단 '애인'은 지난 12월 5일부터 15일까지 대학로 달빛극장에서 장애인 자녀를 위한 엄마의 '가족 모집 프로젝트'를 다룬 연극 '손님'을 무대에 올렸다.
 
신체가 행하는 같은 동작이라고 해도 그 의미가 모든 사람에게 같은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비장애인에게 ‘뛴다’는 것은 ‘바쁘다’라고 연상되기도 한다. 매일 아침 울리는 알람을 무심결에 꺼버린 채 30분을 훌쩍 넘겨 잠을 더 자 버리면 한 시간쯤 뒤에는 ‘뛰어야’한다.
 
하지만 극단 ‘애인’의 연극 <손님>은 ‘뛴다’라는 행위를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는 신체가 있음을 알려주는 대화로부터 시작된다.

 

뇌병변장애가 있는 두 남자 배우가 무대 위에 서서 대화를 나눈다. 한 번도 달려본 적이 없는 동생이 형에게 묻는다. 뛰면 뭐가 좋으냐고. 형은 대답한다. 뛰면 바람을 가르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고. 하지만 뛸 수 없는 동생이 무슨 수로 바람을 가르는 기분을 느낄 것인가.

 

뜻밖에 형의 결론은 간단하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면 된다. 물론 추락에 대비해 누군가가 대신 119에 미리 신고해서 에어매트를 깔아달라고 하면 다칠 위험도 없다. 그러나 베란다 난간 위로는 무슨 수로 올라갈 것인가. 이 좌절된 상황 앞에서 형은 노래를 부른다.

 

“지금 이 순간, 마법처럼~ 날 묶어 왔던 사슬을 벗어던진다. 지금 내겐 확신만 있을 뿐. 남은 건 이제 승리뿐”

 

형은 뭘 믿고 승리를 확신한다는 걸까. 형은 베란다라도 안 되면 절벽에 기어서라도 올라가면 된다고 쿨하게 말한다. 이 말에 용기를 얻은 동생은 절벽을 오르기 위해 열심히 신체를 단련한다. 승리의 절벽. 바람을 느낄 수 있는 절벽을 향해.

 

그러나 어쩌면 절벽은 그들의 일상에 이미 가까이 와 있는 듯하다. ‘뛴다’에서 ‘바람을 느낀다’로 이어지는, 비장애인의 신체가 갖는 감각을 열망하는 두 형제는 10분도 채 안 되는 대화 속에서 이미 수많은 절벽과 만났다.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다.

 

“장애를 ‘극복’해 절벽에 기어서라도 올라가자.” 그곳에 올라서면 형제가 일상에서 만났던 절벽들을 기꺼이 비웃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승리를 확신’하는 게 괜한 허풍은 아닌 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욕망이 ‘뛰는’ 일처럼, 자기 신체가 홀로 경험하는 일을 넘어서게 된다면? 이를테면 사랑을 하고, 섹스를 하는 일에 대한 것이라면? 두 형제의 대화가 여기까지 미치자 이야기는 사뭇 복잡해진다.
“우릴 위해 살아야 해, 여기서 영원히…”
‘손님’이 필요한 ‘가족’, 위태롭고 잔혹한 판타지
 
동생은 또 형에게 묻는다. 여자랑 자 본 적 있느냐고. 형은 있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형은 거금을 들고 집창촌을 찾았으나 장애를 이유로 거부당했다. 다만 그날, 형에게는 ‘여자와 자는 것’에 버금가는 ‘성적 판타지’를 채워주는 이가 나타났다. 물론 그는 술 취한 형을 모텔로 데려가 다음 날 아침 지갑을 털어 달아났으나 형에게 최초로 ‘여인의 향기’를 느끼게 해 줬다는 점에서 잊을 수 없는 존재로 남았다. 여기서 그가 ‘여장 남자’라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형의 성적 판타지의 유지를 위해서 이 ‘도둑 손님’은 영원히 여자로 남아 있어야만 했다.
 
▲연극 <손님>의 한 장면 ⓒ극단 애인
이 형제에게는 시각장애가 있는 누나와 삼 남매를 홀로 키우는 엄마가 있다. 병에 걸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엄마는 세 남매가 자신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도록, 딸을 결혼시키고자 한다. 방법은 인터넷에 가족 모집 광고를 하는 것.
그러나 가족 모집 광고를 보고 찾아온 손님은 이 가족을 쉬운 상대로 여긴 도둑이었다. 하지만 이 수상한 손님이 칼로 가족들을 위협했음에도, 끝내 이들을 제압할 수는 없었다. 패물이 진짜냐 가짜냐 묻는 도둑의 질문에, 엄마가 “가짜에요, 진짜 가짜에요.”라고 대답하는 순간부터 도둑은 혼란스러워진다. 패물뿐만이 아니다. 엄마의 삶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다.
 
“야, 집안 꼴을 봐라. 이게 사는 거니? 남편 도망가고 얘들 혼자 키우면서,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

 

스스로 ‘이상한 가족’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신세 한탄을 듣다가 도둑은 결국 이들 가족에게 제압당한다. 그리고 세 남매를 위해 영원히 이 가족과 함께 살 것을 강요받는다. 엄마 없는 세상에서도 남매가 유일하게 살 길은, 그 과정이 아무리 괴기스러워 보일지라도 결혼을 통해 가족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 ‘도둑 손님’이 사실은 가족이 아니라 개처럼 끌려다니는 노예가 될지라도.

시각장애인 딸은 이 ‘도둑 손님’을 통해 처음으로 성적 접촉을 경험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엄마가 감시하는 조건에서, 성적 대상이 철저하게 도구화된 채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딸의 성적 욕망은 엄마의 가족 판타지가 만들어 놓은 거푸집에 맞춰 만들어졌을 뿐이었다. 옆에서 바라보던 누나의 첫 성적 접촉을 바라보던 동생이 “그건 폭력이야”라고 아무리 외쳐도, 그녀는 “아니, 이 사람도 좋다고 했어. 우리 모두 살아야 해. 그게 엄마의 뜻이야.”라고 반박한다.
▲연극 <손님>의 한 장면 ⓒ극단 애인
큰아들에게 ‘도둑 손님’이 그가 진짜 여성이건 아니건 간에 자신의 성적 판타지 유지를 위해 떠나서는 안 되는 존재였던 것처럼, 엄마에게 ‘도둑 손님’도 자신의 ‘가족’이라는 판타지 유지를 위해 떠나서는 안되는 존재였다. 물론 딸에게도 첫 성적 접촉을 선사해준 이로써 ‘도둑 손님’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이 ‘도둑 손님’이 엄마에게 완전히 복종해 쇠사슬에 묶인 개가 되고, 엄마의 염원대로 가족의 구성이 완료되었을 때, 오히려 이 가족은 더 위태로워진 듯 보였다.
장애인 삶의 욕망에 솔직하게 답하기 위하여
연극 <손님>은 장애인인 세 자녀와 그들의 엄마가 갖는 욕망, 그리고 이 욕망이 부딪치는 장벽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들의 욕망을 좌절시키는 장벽은 대체 무엇인가.
가족 네 명 모두는 각자의 독립적인 삶을 살고 있지 못하다. 엄마는 자녀들 수발에 자신의 모든 시간을 쏟아부어야 했고, 장애가 있는 세 자녀는 엄마 없이는 온전한 삶을 살 수 없다. 이 가족은 서로에게 삶을 완전히 기댄 채 살아가고 있지만, 그 의존된 관계 덕분에 서로 쇠사슬처럼 옥죄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어떻게든 쇠사슬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사실상 이 가족의 생존을 책임져 온 엄마가 죽음에 다가가고 있기에 어떻게든 다른 삶의 방식을 택해야만 했다. 하지만 엄마에 의해 강제된 다른 삶의 방식도 결국 결혼과 가족의 구성이었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진입이 쉽지 않은 딸을 결혼시키기 위해 엄마는 새로운 가족 구성원을 ‘공개모집’했지만, 그것은 그를 하나의 ‘도구’로 만들어버리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결국 새롭게 구성된 가족은 전보다 더 위태롭고 아슬아슬하게, 각자의 판타지를 이 ‘도둑 손님’에게 투사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고 말았다.
장애인 일상의 욕망, 그것도 사랑과 섹스, 결혼이라는, 나 아닌 다른 타자와 만나는 과정으로서만 가능한 욕망의 충족이 얼마나 험난한 일인지 연극 <손님>은 아주 그로테스크하게 묘사하고 있다. 재밌는 것은 이 그로테스크함이 그저 장애인이 사랑하고 섹스하고 결혼하는 일 자체가 어렵다는 사실로부터 나온다기보다는, ‘가족’이라는 관성화된 판타지에 기대는 순간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극 중의 엄마는 자녀를 살아가게 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주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역설적으로 세 남매가 가족 이외에 열린 더 많은 만남과 사랑을 접할 기회를 차단하는 잔혹한 판타지였다. 그리고 장애인인 세 남매를 더욱 가족 안에 묶어두는 무시무시한 쇠사슬이 되어 그들을 더 옥죄게 될 것이라는 불안한 예감마저 들게 한다.
 
이제 장애인 삶의 욕망에 더욱 솔직하게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가족’이라는 판타지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가져야 하지 않는가. 이것이 연극 <손님>이 역설적으로 남긴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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