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평등하게 사는 날이 빨리 올 수 있도록 함께 해주길

나는 1969년 8월5일 서울 왕십리에서 2남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임신하고 계셨을 때 연탄가스를 마시고 중독되어 잠시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셨으며, 그로 인해 태어나면서부터 뇌성마비 장애를 갖게 되었다.

 

6살 때 경북 함양으로 온 가족이 이사해서 함양에서 살았다. 12살이 되던 해 부모님은 자식들 교육을 위해 서울 마천동으로 이사했다어렸을 적 나는 아주 궁금한 것이 있었다. 나를 제외한 형제들이 아침에 가방을 메고 나가서 저녁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나는 새 옷과 새 신발과 새 가방을 메고 나가는 형제들이 그저 부럽기만 했다.

 

15살 때 즈음 돼서야 형제들이 학교라는 곳에 가는 거라고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집에서만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내 친구라고는 TV와 라디오가 전부였다. 웃기는 말이지만 15살 되던 해 나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러 온 학생들로 인해 처음 집 밖으로 나오게 되었고 그때 하늘을 내 눈으로 처음 보게 되었다.

 

▲15살때쯤 찍은 사진입니다. 동생들이 강아지랑 사진을 찍고 있고, 오른족 구석 소파 뒤에 머리만 보이는 사람이 저입니다. ⓒ이규식

19살 때 가벼운 장애가 있는 친구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교회에 나가게 되면서 정기적인 외출을 할 수 있었다. 20살 때 교회 목사님의 소개로 집을 떠나 의정부에 있는 장애인 공동체에서 4년 동안 있게 되었지만, 그곳에선 특별히 먹고 자는 것 외에 하는 것이 없었고 가족들과 지내고 싶어 많이 힘들었다. 아무런 의미 없는 생활 속에 집에 다시 들어갔지만 결국 다른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었고, 역시 반복되는 생활에 지쳐 집에 가고 다시 공동체 시설에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장애인 공동체에서 생활하던 27살 때 여대생 자원 봉사자를 짝사랑하기도 했다. 죽기 살기로 그녀를 쫓아다녔는데 그녀는 항상 피하기만 했다. 내가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그녀는 '그냥'이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함께 생활하며 친하게 지내던 장애인 형에게 그녀 이야기를 했더니 그 형은 “야 이 병신아! 우리 같은 병신을 어떤 여자가 좋아하겠냐?”였다. 멍해진 난 그때서야 내가 장애인임을 깨달았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한 달 정도를 밥도 안 먹고 천장만 멍하니 바라보며 누워 있었던 적도 있었다.

 

시간이 그렇게 흘러가면서 시설 생활이 너무 무의미하고 가치가 없어서 나가서 내 삶을 살고 싶었지만, 사업실패로 힘들었던 집에 들어가기도 눈치가 보였고 공동체에서는 만족을 느낄 수 없었고 무의미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혼자 살 수는 없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지내게 되었다. 마지막 있었던 시설의 후원자 도움으로 스쿠터를 구하게 되었고,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어 좋았다.

 

2년 만에 다시 서울에 올라왔다. 여기저기를 혼자 다닐 수 있어 너무 좋았지만 그 생활도 곧 무의미해졌다. 그때 생각이 든 게 ‘이렇게 쓸데없이 돌아다니기만 할 것이 아니라 뭔가 의미 있는 일로 돌아다녀야겠다! 뭐든지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문득 집 근처에 있는 정립회관을 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정립회관의 소개로 노들야학에 입학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공부하기 시작했고 더불어 20일 만에 집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노들장애인야학

1년 후 한 사건이 벌어지는데, 혜화역 리프트를 타다 떨어져 전치 3주의 부상을 당했고, 그것을 보고 노들야학을 중심으로 어려 단체에서 함께 운동을 해줬다. 그래서 각 언론을 통해 공식 사과를 받았고 혜화역에 우리나라 최초로 양 방향 엘리베이터가 생기게 되었다.

 

노들야학에서 공부하면서 미국과 일본에서 펼쳐진 자립생활에 관한 비디오를 보게 되었고 정부에서 지원받아 자립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20년 넘게 밥만 먹고 잠만 자던 내게 꿈이 생겼고 공부를 계속하면서 자립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 꿈은 나만 자립생활 하는 게 아니라 시설에서 살고 있는 중증장애인들에게도 이 제도를 알려주고 함께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도록 알려줘야 하겠다는 뜻을 품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활동가 이력은

2001. 1. 30 서울역 천막농성을 시작으로

2001. 4. 19 이동권연대 투쟁국장을 맡았고

2005~2007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투쟁팀장 일을 하며 장애인 인권을 위해 뛰었고 현재는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의 상임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내가 삶에 희망을 가지지 않고 살았다면, 아예 세상이 어떤 곳인지 모르고 방 안에서만 몇십 년을 지내며 인생을 마무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삶을 추구하면서 도전했고 이루어냈으므로 인해 진정한 삶을 장애인도 살 수 있다고 외칠 수 있고 그 꿈을 가지고 있는 장애인들에게 실질적으로 할 수 있다고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 되었다.

 

장애인도 많은 것을 이뤄낼 수 있다는 것을 나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나는 장애인도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시설에 사는 장애인들에게 보여주고 느끼게 해줌으로써 그들에게 더욱 큰 힘을 불어넣어 주려 노력하고 있다.

 

▲ⓒ노들장애인야학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나와 함께 뛰었던 동지들이 10년째 새로운 사람들이 많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을 자립생활로 이끌었고 쟁취를 위해 엄청 달려왔지만, 아직까지 기초적인 교육조차 받지 못한 장애인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장애인 스스로 자신은 할 수 없다고 느끼고 비장애인이 원하는 대로 끌려다니고 있다.

 

이런 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왜 자립생활 운동을 하는가 싶기도 해서 기운이 빠질 때도 있다. 애완동물처럼 끌려다니지 않으려고 나와서 이렇게 피 터지게 싸우고 있는데, 나와도 '그냥 나왔으면 됐지' 라는 생각으로 사는 친구들이 많아서 화가 난다.

 

이 자리를 빌려 말하고 싶은 것은 일찍 나는 새가 먹이를 잡을 수 있으며, 아는 만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립생활을 해서 시설에서 나와 살고 있는 장애인이나 시설에서 거주하고 있는 장애인이나, 자아를 깨닫고 열심히 세상에 외쳐주었으면 한다. 피 터지게 싸우고 들이대며 끌고 끌려다니는 세상이 아니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진정으로 평등하게 사는 날이 빨리 올 수 있도록 함께 해주길 간절히 바라고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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