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99년 혹독한 IMF 후유증으로 지인들과 같이 운영했던 기획사는 결국 문을 닫게 되었고 거지 중에 상거지(?)가 된 나는 장애인에게 머니머니해도 머니(money)가 최고지만, 그래도 공부는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직장생활로 인해 잠시 접어둔 검정고시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6개월여 공부한 끝에 독학으로 중등과정은 마칠 수 있었지만, 고등과정은 텅빈 머리로는 혼자 불가능 하다는 판단 끝에 서울에 가서 인터넷으로 사상이 의심(?)스러운 글을 자주 올리던 노들야학(박경석)을 찾아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무리하게 올라왔다. 

 

▲2001년 노들야학 모꼬지 때 모습. ⓒ노들장애인야학

▲ 사진 맨 앞이 박현 씨. ⓒ노들장애인야학

인터넷 동호회 활동으로 인해 서울에 자주 놀러왔기에 아는 이들도 많고 낯설지 않았기에 서울 상경이 무리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단지 친인척이 없는 것이 다소 부담스러웠지만, 어린 나이에 일찍 집을 나온 터라 “괜찮겠지”라고 치부해 버렸다. 서울에 올라와 몇 달간 지인들에게 더부살이 하다가 그해 여름 천호동 문구 골목에 반 지하 방을 구해 드디어 서울살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바로 노들야학을 찾아 가게 되었는데 나를 맞이해 준 이가 바로 영감님이라고 부르는 박경석 교장선생님이었다. 백발에 긴 머리카락과 큰 머리에 꺼벙꺼벙 눈을 깜빡이며 나를 내려다 보던 그 눈빛은 내 평생 몇 안되는 충격으로 남아 있다. 하여튼 그 후 난 노들야학을 1년8개월 남짓 다니게 되었다. 야학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참여한 메이데이 때 전투경찰에 고립되어 보기도 했고 에바다 투쟁(천막농성)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지지방문 갔다가 평택시 공무원들에게 끌려나오기도 하였다. 당시 야학 분위기는 무슨 집회가 그리 많은지 뻑하면 수업이 취소되어 자습시간이 많았는데 그러한 부분에 비판을 많이 했던 내게 곱지 않은 시선들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집회도 좋고, 투쟁도 좋고, 옳지 않은 것에 대해 지적을 하는 행동도 아주 좋은 거지만, 나도 그렇고 학생들도 늦은 나이에 배움 욕구를 풀기 위해 어렵게 야학을 선택하고 자신들의 계획을 성취하려는 마음과 그 시간들도 존중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 후 2001년 4월 그처럼 바라던 고등검정고시를 합격하고 야학 졸업을 앞두고 있을 쯤 같이 야학을 다니던 형들과 같이 창동에서 살게 되었고 야학 식구들을 초대해 집뜰이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야학식구들과 함께 온 교장샘이 “현아 우리 시청앞에서 천막 치고 잼나게 놀아볼래?, 내가 너에게 천막을 관리할 수 있는 반장 자리 줄테니 같이하자!”라고 하시며 매우 들뜬 어조로 이야기 하시는 게 아닌가? 역시 그때도 난 아무 생각 없이 좋다라고 쾌히 승낙을 했다. 검시가 끝나 주체하기 어려운 시간도 부담스러운데 잘 됐다. 머 이런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삶을 완전히 바뀌게 될 일이 될지 누가 알았겠나!?!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지만) 7월 어느 날 약간 부슬부슬 비가 오는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장애인 이동권확보를 위한 기자회견(기자도 별루 없었지만)을 한 후 버스를 타고 서울시청까지 이동했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교장샘의 신호에 따라(무슨 군대 온 줄 알았다)대열을 맞추고 쇠사슬로 휠체어를 서로 연결한 후 텐트를 가지고 와서 치려는 순간 경찰들이 몰려나와 우리 대오와 몸싸움이 일어났고 2박3일간의 처절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바로 2001년 오이도추락참사를 계시로 시작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사회에 제대로 알리게 된 시청앞 노숙투쟁 및 서울역 농성투쟁의 서막이었다. 깨지면 또 치고 그리고 또 깨지고 그러다 좀 쉬었다가 또 치고 또 깨지고 2박3일은 누가편이 이기느냐하는 싸움과 같았다. 결국 노숙투쟁 3일째 되던 날, 우리는 천막을 다시 치기 위해 시도하였고 그로 인해 나를 비롯한 몇 명만 남기고 전원 연행을 당했다. 머리털 나고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시민들의 친절(?)한 지팡이라고 배워왔던 경찰이 정당한 요구를 하고 있는 우리들을 그것도 장애인들을 무참히 연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고 끌려가는 야학식구들을 붙잡고 싶었지만, 무서워서 말 한마디도 못하는 내 모습이 서러웠다. 그리고 눈물이 나왔다. 그것도 서러운 눈물이…

 

▲2002년 시청역 철로 점거 당시.

며칠 후 서울역에서 농성을 다시 하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바로 서울역을 찾아 갔다. 그리고 23일간의 서울역 천막농성 및 선전전이 시작되었고 선전전과 수많은 투쟁들도 이어졌다. 그때 불볕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8월이었고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체감 더위는 장난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 동지들은 피곤한 몸을 뒤로 한채 한치의 스케줄도 빠짐없이 소화해 냈다. 아침 먹고 선전전, 점심 먹고 선전전, 그리고 중간 중간에 있었던 시청 진격 투쟁 및 여러 가지 투쟁들을 다 소화해 내었다. 그때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행가기 딱 좋은 바캉스시절에 우리는 너무나 당연한 권리를 외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가족들과 연인들과 친구들끼리 여행가기 위해 우리들을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것을 보면서 “이 사회에는 무엇이든 장애인은 예외구나 휴가철이다 여행 시즌이다라고 하는데 거기에 장애인은 예외구나”, “그래 운동을 해야 겠다. 얼마나 갈지 몰라도 적어도 이동권이 보장 될 때까지는 운동해야 겠다”란 생각이 들었고 그런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나름의 약속 행위로 갈롱 부린다고 기른 긴 머리를 스포츠형으로 짧게 잘라 버렸다.

▲13년 전 모습.

그것이 본격적으로 장애인운동을 하게 되었던 계기였다. 그 후 장애인이동권연대 조직국장을 맡게 되었고 2003년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엉겹결에 사무국장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자립생활을 접하게 되었고 시청 앞 지하철 선로 점거 투쟁, 내 인생을 또 다시 변하게 하였던 정립투쟁, 이동편의증진법 제정, 활동보조제도화 43일 노숙투쟁 등의 성과를 만드는 투쟁의 공간에 함께 했었다.

장판에서 생활한 지 햇수로 10년이 흘렀다. 지금은 자립생활운동을 해 보겠다고 성북센터에서 활동하고 있다. 요즘 사람들이 MB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추운 계절을 지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어쩌면 여러 장애인동지들도 같을 거라 생각한다) 30여년을 살면서 따뜻했던 계절을 맞이 해본 기억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가 될지 몰르지만, 쭉 그럴 거라 본다. 왜냐하면 계절이 바뀌고 사람과 건물이 바뀌어도 절대로 바뀌지 않을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나는 장애인이다라는 사실 그리고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있는 한 투쟁은 끝나지 않기 때문에

2004년 12월 29일 이동편의증진법이 법사위를 통과해 본 회로 안건상정이 되는 것을 확인하고 나오면서 김기룡 동지와 박김영희 부대표님과 같이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라는 민중가요를 흥얼거렸던 기억이 간혹 떠오른다. 그러한 마음으로 이 길을 가고 싶고 지키고 싶다. 마지막으로 내가 힘들 때 힘이 되어준 동지들이 많았지만, 그중에 도현이형이 내게 해준 말을 되새기며 재미없는 글을 정리해 볼까 한다. “나는 현이에게 든든한 내부 지지자이며 현이 너도 나에게 든든한 내부 지지자이다.” 이 말처럼 앞으로 정말 동지들과 내게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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