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시선의 대상이 된 눈, 그 타자의 시선을 보는 눈

며칠 전 연구실 동료가 <빅이슈>를 들고 왔다. 이 잡지는 홈리스의 경제적 자활을 돕기 위해 1991년 영국에서 창간되었는데, 판매권은 홈리스들에게만 주어지며 수익의 50%를 판매자에게 지급한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2010년에 창간되어 현재 1부당 5천원에 판매되고 있다.

▲홈리스의 자활을 돕기 위해 창간한 잡지 <빅이슈>
그런데 내가 건네받은 <빅이슈>에는 직접 손으로 쓴 편지 형식의 글 한 편과 연하장이 들어 있었다. 잡지를 판매한 이가 안에 끼워넣은 것이다. ‘첫 번째 이야기’라는 제목이 달려 있는 걸 보면 앞으로도 저자는 글을 계속 써 나갈 모양이다(*내용은 이 글 뒤에 첨부할 테니 읽어보시길). 이 글은 우리가 지하철 같은 곳에서 받곤 하는 그런 글이 아니다. 말하자면 동정에 대한 구걸도, 구매에 대한 단순한 감사도 아니다. 잡지에 게재하지 못했지만 잡지에 실어 보낸 글. 잡지의 판매자인 그는 분명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 글을 썼다. 한마디로 그는 작가로서 썼다. 그리고 나는 그의 글에서 사람들을 거북하게 만드는 어떤 중요한 시선을 느꼈다.

그러고보니 그가 쓴 것은 정말로 ‘눈’과 ‘시선’에 대한 것이다. 사실 그의 눈은 좀 특별하다. 그의 오른쪽 눈에는 시력이 없다. 생명을 잃은 그 눈은 벌써 탈색되고 변색되었다. 그가 2년 전 이야기라고 쓴 글(어쩌면 2년 전에 어딘가에 써둔 글의 한 대목 같기도 하다)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오늘도 나는 문방구에서 이력서를 산다.
이력이라곤 별로 내세울 것도 없는 것이지만 취직하려는 청소용역 업체서 갖고 오라 하니 써야 한다.
쓰면서도 기대는 많이 하지 않는다. 차가운 겨울이다. 거의 모든 곳에서 면접 시 나의 변색된 오른쪽 눈을 보고선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라는 한마디를 하곤 끝이 난다. 20분이 넘지 않는다. 우울하다.
나는 그들을 이해해줄 수가 있다. 어차피 그들도 윗선에게 괜한 잔소리를 들을 이유가 없으므로.
스스로의 삶을 점점 찾기 힘들어지는 내가 서글퍼진다.
더 이상은 이력서를 써서 낼 곳이 없다.

▲빅이슈 판매자가 잡지에 끼워넣은 글의 마지막 장엔 렘브란트의 '목욕하는 여인'을 볼펜으로 그린 그림이 있다.
시력이 없는 그의 ‘오른쪽 눈’과 달리 ‘왼쪽 눈’은 뭔가를 잘 본다. 글의 마지막 장에는 그가 렘브란트의 <목욕하는 여인>을 볼펜으로 그린 그림이 붙어 있다. 그는 렘브란트 외에도 고야와 르누아르에 대한 책을 구해서 그림을 스케치하곤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의 ‘왼쪽 눈’은 ‘오른쪽 눈’ 이상으로 특별하다. ‘오른쪽 눈’은 다른 이들이 보는 것을 보지 못하지만, ‘왼쪽 눈’은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본다. ‘왼쪽 눈’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오른쪽 눈’을 어떻게 보는지를 본다. 두 개의 눈. 보여지는 눈과 보는 눈. 타자의 시선의 대상이 된 눈과 그 타자의 시선을 보는 눈. 여기에는 현상학적으로 매우 중대한 물음이 들어 있다.

언젠가 장애인 야학에서 수업을 할 때 나는 대부분의 장애인에게 이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의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장애인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을 바라본다. ‘오른쪽 눈’이라는 게 지체장애인의 ‘몸뚱이’라면 ‘왼쪽 눈’은 그의 ‘의식’ 내지 ‘정신’이다. 당시에 우리는 어느 인류학자가 쓴 글을 읽고 있었다. 그 글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만약 어떤 파티 장소에 심각한 장애를 가진 여성이 나타나면 그는 그곳의 공기를 지배하게 된다. 그에게 친절한 말을 건네는 사람이든 얼굴을 찌푸린 사람이든 상관없다. 심지어 그를 보지 않은 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변화된 공기의 지배를 받는다.> 이 글을 읽다가 누군가 말했다. 사실 그걸 가장 빨리 알아차리는 사람은 해당 여성일 것이라고. 의지가 아주 굳세거나 어떤 의도가 있지 않다면 그 장애 여성은 금세 자리를 뜰 것이라고 했다. 무슨 약속이 있다든지 집에 무슨 일이 생겼다든지 하는 핑계를 대고서 말이다.

비장애인들도 이런 행동 양태를 보이기는 한다. 길에서 아는 장애인을 만났을 때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환하게 웃지만 이야기가 길어지지 않도록 무슨 선약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얼른 헤어지려고 한다. 뭔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불편함에 대해서는 장애인 쪽에서 더 민감하다. 그러다보니 장애인 쪽에서 먼저 적당히 웃음짓고 적당히 자리를 뜰 핑계를 찾는 경우가 많다. 상대방이 자신을 불편해 한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은 더 불편한 것이다. 그래서 특별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개는 어떤 핑계를 대고 자리를 먼저 뜨려고 한다.

 

내 수업에 참여했던 한 장애인 학생은 자기 앞에서 일부러 환하게 웃는 사람이 너무 싫다고 했다. 그런 과장된 행동을 통해 마치 자신은 거북하지 않은 듯 연기하는 게 다 보이기 때문이다. 실상은 장애인을 보며 얼굴을 찌푸리는 사람과 다를 바 없는 감정을 느끼면서도 그런 것을 표출하면 자신이 속물처럼 보일까봐 세련된 위장술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장애인의 ‘왼쪽 눈’은 그 위선을 꿰뚫어본다. 아마 그런 연기를 하는 비장애인도 장애인이 자기 속마음을 꿰뚫어 본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런 느낌 때문에 장애인의 눈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것은 부담스럽다. 그래도 비장애인에게는 강력한 해결책이 있다. 자리를 회피하거나 빨리 떠나버리면 된다. <빅이슈>에 끼워 넣은 글의 저자의 경우를 빌어 말하자면 그냥 ‘뽑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앞으로 거북할 일도 없다.

장애인의 경우는 어떨까. 길거리의 가벼운 마주침이라면 그냥 떠나는 것도 해결책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그럴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생활과 생존이 타인의 도움에 달려 있는 경우 문제가 간단치 않다. 예컨대 혼자 밥을 먹을 수 없다면 식사를 보조해 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경우 장애인이 취하는 방법은 비장애인에게 그토록 부담을 주는 ‘왼쪽 눈’을 감는 것이다. 장애인만 그런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심한 경우 구걸이라도 해야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눈을 보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비유컨대 더 이상 눈이 아니라 단지 몸뚱이의 일부가 된 그 ‘오른쪽 눈’을 타인 앞에 내놓고, 상대방을 꿰뚫어보는 ‘왼쪽 눈’은 감아야 한다. 몸뚱이는 내보이지만 고개는 숙이는 것이다. 눈을 닫는 것, 자기의식의 창을 닫는 것, 의식을 꺼두는 것. 그때 우리의 몸은 처분을 기다리는 가련한 사물이 되고 만다. 그리고 상대방은 이제 거북함 없이, 아니 도덕적 의기양양함까지 가지면서 우리를 처분할 수 있다.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말이다.

<빅이슈>를 판매하는 ‘작가’는 간절한 희망 하나를 갖고 있다. 그것은 언젠가 “오른쪽 눈을 보기 좋게 수술하는 것”이다. ‘볼 수 없는’ 눈이라면 ‘보기 좋게’라도 되는 편이 나을 것이고, 그것은 그의 삶에서 아주 절실한 희망임에 틀림없다. 나 역시 그 희망이 머지않아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무엇보다도 그가 말하는 ‘절망의 계절’에서 우선은 살아남아야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의 ‘오른쪽 눈’의 미관 만큼이나 ‘왼쪽 눈’의 건강을 기원한다. 그가 ‘왼쪽 눈’의 건강을 잃지 않기를, 그래서 계속해서 무언가를 쓰고 무언가를 그릴 수 있기를 바란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의 ‘오른쪽 눈’은 다른 이들이 보는 것을 못 보지만, 그의 ‘왼쪽 눈’은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그는 ‘왼쪽 눈’을 통해 타인 앞에 노출된 자신의 비참을 보면서 동시에 자신을 비참한 존재로 바라보는 타인의 수치도 본다. 말하자면 타인에 반사된 자신을 보면서도 타인을 꿰뚫어 그 속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대한민국은 행복한 사회라는 듯” 웃고 있는 사람들은 이 ‘왼쪽 눈’을 불편해 한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이 이 ‘왼쪽 눈’이 소중한 것이다.

 

참, 연하장 이야기가 빠졌다. 그는 연하장을 직접 그려서 복사한 후 일일이 채색을 했다. 연하장에는 자신과 함께 산다는 고양이 한 마리가 두 눈을 빤히 뜨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리고 고양이 뒤쪽에는 영원히 감기지 않을 ‘눈’ 하나가 또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아래는 그가 쓴 글의 전문이다. 내용은 그대로 싣는데 구체적인 신상이 드러날 수 있는 부분은 생략했다. 그가 자기 글을 잡지에 끼워 ‘게재 아닌 게재’를 한 것이고 자기 생각을 알리기 위해 쓴 글이어서 생략할 필요가 없을 듯 하고, 신상도 작가 이름 형식으로 쓴 것이어서 밝히는 게 어떨까 싶기도 하지만, 그의 생각을 최종 확인하기 전까지는 일단 해당 부분은 생략하겠다. 맞춤법도 따로 교정하지 않았다.

<첫 번째 이야기>

 

안녕하세요. **역 **출구 **시 <빅이슈> 판매원 인사드립니다. 올해도 마무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계획했던 일 잘들 돼시나요?
저는 올해로 오른쪽 눈 보기좋게 수술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는데 못하고 있어서 스스로에게 실망중에 있으며…
요 근래 화가들(고야, 렘브란트, 르누아르)에 대한 책을 구매해서 그림들을 살펴봤습니다. 그림을 보고나서 그들이 어려서부터 배우고 작업할 수 있는 환경에 부러움을 많이 가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천재’란 단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노력’이란 단어를 인정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그림을 스케치 해보다 문득 저의 수준을 가늠해봤습니다. 조각은 삼류 글과 그림은 사류라고 스스로 평가를 하게 돼더군요.
관찰력도 떨어진듯 보고나서 고개를 돌리면 잊어버리는 상태라 여러가지로 우울해집니다. 여러대가들이 그림을 보고나서 앞으로 회화가며 조각가이자 수필가에 대한 열정이 가라앉아 쳐져있는 나날을 보내기도 하고…
이번호에 드릴 글은 제가 빅이슈 판매 하기 바로 직전에 상황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느덧 2년전이 돼가는 군요.

언제부터였던가. 겨울은 항상 나에게 절망을
던져주고 떠나간다. 다시오겠다면서.

삼십이 넘어서부터 겨울은 항상 나에게 굶주림을 주었다.
건기 때 아프리카의 모든 동물들이 굶주리듯이
이것은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해야 하면서 삶에
지쳐가는 막노동 잡부가 치러야 할 댓가다.

오늘도 나는 문방구에서 이력서를 산다.
이력이라곤 별로 내세울 것도 없는 것이지만 취직하려는 청소용역 업체서 갖고 오라 하니 써야 한다.
쓰면서도 기대는 많이 하지 않는다. 차가운 겨울이다. 거의 모든 곳에서 면접시 나의 변색된 오른쪽 눈을 보고선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라는 한마디를 하곤 끝이 난다. 20분이 넘지 않는다. 우울하다.
나는 그들을 이해해줄 수가 있다. 어차피 그들도 윗선에게 괜한 잔소리를 들을 이유가 없으므로.
스스로의 삶을 점점 찾기 힘들어지는 내가 서글퍼진다.
더 이상은 이력서를 써서 낼 곳이 없다.
회사로 오라는 연락도 없다. 정신이 시들어간다.
고시원서 하루종일 T.V와 함께 내 삶이 녹아내린다.
T.V에 나오는 사람들의 삶은 다들 여유있어 보인다.
모두들 웃는다. 마치 대한민국은 행복한 사회라는 듯이
“내일도 T.V와 훗날과 담배가 내 영혼을 위로하겠지”
오늘처럼
항상 겨울은 절망적이지만 올해 겨울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최악의 절망이 나를 향해 오고 있다.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빅이슈>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수밖에. <빅이슈>에서도 안돼면 어디로 가지?
“임씨 정신차려! 당신은 홈리스라고” 또다른 자신이
내게 소리지른다.
홈리스 아닌 홈리스로 지낼려고 했었는데 말이다.
나에게 자존심, 창피함 등은 현재 거창하게 들리는
꿈일 뿐이다. 단지 필요한건 생존이 우선일뿐
그리고 절망에 겨울도 보내야 한다.
시간을 버려야 내가 산다. 새로운 시간이다.

빅이슈 판매원 생활전(2013년 1월초) 저의 상황이었습니다
지금에야 여유있게 쓰고 있지만 당시에는
참 막막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책구입 감사드리며 건승하세요.
**역** 출구 빅이슈 판매원
(**시 이후 지하)

-뒷 그림은 렘브란트의 ‘목욕하는 여인’을 볼펜으로 그려봤습니다. -

*이 글은 R-VIEW #93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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